[달라도 괜찮아] 귀로 악보 보는 9살 피아니스트 건호 이야기

박민지 기자, 영상=최민석 기자 입력 2019.12.31. 00:55

 

9살 피아니스트 김건호군 인터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건호가 지난 20일 서울맹학교에서 피아노 공연을 하고 있다. 최민석 기자


앞을 못 보는 9살 피아니스트는 온 몸으로 세상을 본다. 눈으로는 어둠과 빛을, 청각·후각·미각·촉각을 동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읽고 느끼고 볼 수 있다. 갖지 못한 평범함에 좌절하기보다 얻은 재능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아이. 도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남에게 먼저 손 내밀기를 바라는 부모. 무슨 일에든 “괜찮다”고 말하는 김건호군을 지난 20일 서울맹학교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에서 만났다.

무대에 선 ‘볼 수 없는’ 아이들

학교 강당에 도착했을 때는 초등부 고학년 합창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무대 위 제자리를 찾는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언뜻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연한 미소를 봤다. 설레는 모양이다. 대부분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무대로 걸어 나왔다. 손을 잡고 무대로 데려다 주는 일이 오히려 편할 텐데도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생님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오세요”
“앞에 아무 것도 없어요. 잠깐, 지금부터는 계단이에요”

아이들은 곧잘 따라왔다. 자기 자리를 찾았고 옆 친구와 손을 잡으며 간격을 맞췄다. 얼마나 오래 연습했을까.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노래가 시작하자 객석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보였다. 가창력이 뛰어나지도, 화려한 무대장치도 없었는데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새어나왔다. 학부모들은 고개를 빼고 카메라로 이 모습을 담았다. 무대에 선 아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을 테니 ‘엄마 쪽을 보라’며 손을 흔들 수 없었다. 직접 아이 앞 쪽으로 이동해 노래하는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갈 때도 아이들은 혼자였다. 앞 친구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아이를 아빠는 번쩍 안아들었다. 엄마는 그런 아이의 모습까지 꼼꼼히 카메라에 담았다. 공연을 마쳤는데도 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신 몸을 흔드는 아이도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피아노 앞에 앉다

이제 건호의 차례. 아무도 없는 무대를 차분히 걸어 나온 아이는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악보대는 비어있다. 심호흡을 하고 건반으로 손을 뻗더니 이내 첫 음의 자리를 찾았다. 이제부터 오로지 손의 감각으로 공연을 해내야 한다. 총 7분짜리 곡을 이 공연을 위해 4분으로 편곡했다. 건호가 떨리는 눈을 살포시 감자 악보가 머릿속에 스르륵 펼쳐지는 듯 보였다.

공연이 시작되자 환호성을 보내던 관중은 이내 조용해졌다. 숙연한 장내에 건호의 피아노 소리만 흘러나왔다. 맑고 영롱한 것이 마치 건호의 걸음걸이 같았다. 이 음악과 분위기와 건호를 담으려 카메라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듣고 싶었다.

연주를 위해 건호는 듣고 외우기를 반복한다. 어려울 법도 한데, 이 과정이 행복하다고 했다. “힘든 점은 없었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답했다. 건호는 어떤 질문에도 “괜찮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눈으로 본 적 없었으니 청각과 촉감에 의존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암기 외에 다른 방법으로 피아노를 쳐본 적 없으니 불편할 리도 없었다. 건호가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곡은 30개가 넘는다. 이날 건호는 정식 공연이 끝나고 취재진을 위해 편곡된 4분짜리가 아닌 7분짜리 모차르트 곡(Sonata in C major, K.545-I.Allegro II.Andante III.Rondo)을 암기해 연주했다.

누군가는 건호가 타고난 천재라고 말한다. 건호의 어머니인 박은아씨는 “음악적 재능이 있는 것은 맞지만 한 번 듣고 뚝딱 연주가 가능한 수준은 아니다”라며 “비장애 아이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연주하려고 2배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건호의 어린시절. 엄마 박은아씨 제공


건호는 생후 3개월에 선천성 망막 이상 흑암시증 진단을 받았다. 빛과 어둠을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다. 5살이 되던 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은 “피아노를 가르쳐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아이가 유치원 피아노를 만지는 걸 유심히 지켜보니 음감이 남달랐다고 했다.

선생님이 촬영해 보여준 영상은 놀라웠다. 같은 노래를 높고, 낮게 두 번을 불렀는데 건호는 그에 맞는 음을 찾아 연주했다. 아이에게 절대음감이 있다는 사실을 안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참 감사했어요. 장애인 아이를 둔 부모가 바라는 것은 비장애인과 함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거예요. 건호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저는 아이가 사회에 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니 이걸로 당당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건호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은 물심양면 도왔다. 장애인 맞춤 음악교육을 제공하는 ‘뷰티풀마인드 뮤직아카데미’를 소개해준 것도 선생님이었다. 입소하려면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는데, 건호는 6살 여름 훌륭한 성적으로 합격해 현재까지 지원받고 있다.

건호의 어린시절. 엄마 박은아씨 제공


건호는 만들어진 곡을 연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기존 연주곡을 변주하더니, 직접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주로 소리나 향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늘을 나는 느낌, 사랑을 받는 기분, 따뜻한 날씨 같은 주제로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음악선생님은 이걸 악보로 만들기 시작했다. 건호는 악보도 스스로 만들기 위해 점자악보를 배우고 있다.

풍부한 작곡을 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난달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은 앞을 볼 수 없어 세상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는 건호를 위해 첨단기기 음성전달 캠과 입체 프린터를 선물했다. 무언가를 읽고 싶을 때 음성전달 캠이 붙은 안경을 만지면 눈앞에 펼쳐진 글자들이 음성으로 재현된다. 입체 프린터는 건호가 세상 모든 것을 만지며 습득하도록 할 것이다. 엄마는 이 모든 게 감사하다.

“건호에게 피아노가 어떤 존재냐고 물었더니 ‘생명체’라고 하더라고요. 건호도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을 하고 싶어 하고 뛰어놀고 싶어 해요. 하지만 할 수 없었죠. 그래서 피아노를 친구라고 생각하나 봐요. 피아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칭찬해주기도 하고, 예뻐하기도 해요”

엄마는 내내 “건호가 사회에 녹아들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 짧은 말을 하는 엄마는 호흡을 여러 번 가다듬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아이를 동정하는 시선이었다. 사람들은 건호를 볼 때마다 “불쌍하다”고 했다. 아이가 크면서 사람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오히려 위축되는 것만 같아 걱정이다.

지난 20일 서울맹학교 강당에서 건호가 인터뷰하고 있다. 최민석 기자


함께 교육받을 권리

통합 교육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 장애 유형이나 정도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장애 학생이 비장애 또래학생과 함께 교육 받을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장애인은 소수자이고 ‘특이한’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특징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하던 내 친구가 눈이 안 보이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면 아이들은 과연 경계할까? 다르다는 생각조차 안할지 모른다. 줄넘기 3번 만에 넘어지곤 하는 친구가 있듯 앞이 보이지 않아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친구도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함께 어우러진 교육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 통합교육은 장애 아이의 교육장소를 분리교육 환경인 특수학교에서 일반학교로 이동시키고 동등한 구성원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 특수교육 기회의 양적 확대를 위한 첫걸음이다.

엄마가 힘줘 말했다.

“건호는 약자가 아니에요.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베풀 수도 있는, 나눠줄 수도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건호도 ‘같은’ 아이로 바라보고 응원해주세요”


박민지 기자, 영상=최민석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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