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 오는 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나와서 제 책가방을 물었어요. 제가 장갑을 던져주니까 그제서야 놓아주었어요. 장갑은 악어가 먹어버렸고요. 그래서 지각했어요, 선생님."
학교에 지각한 아이가 하는 말이다. 학교에 오는 길에 '하수구에서'(?) 악어가 나왔단다.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거짓말을 한 죄'로 반성문을 써야 했다. 아이에게 돌아온 것은 "이 동네 하수구엔 악어가 살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냉랭한 답변뿐이었다.
이 날 반성문의 효력이 약했을까? 다음날에도 아이는 학교에 지각한다. 그리곤 또 '진지하게' 이렇게 말한다.
"학교 오는 길에 다리를 건너는데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치는 거예요. 흠뻑 젖었어요. 그리고 물이 빠져 나갈 때까지 난간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어요. 그래서 지각했어요, 선생님."
'강에서'(?) 갑자기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쳤단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어떤 반응이 돌아왔을까? "살다 살다 별소리 다 듣겠다"는 선생님의 냉혹한 말이 다시 돌아왔다. 아이는 또 '거짓말을 한 죄'로 반성문을 써야 했다. 전 날보다 더 많은 분량으로….
다음날에도 존은 학교로 가는 길에 '뜬금없이' 사자와 만난다. 그에게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학교에 지각하고, 다시 더 크게 화가 난 선생님은 아이에게 더 많은 반성문을 쓰게 한다.
이렇게 이 동화의 이야기는 학교를 배경으로 아이와 선생의 갈등구조로 전개되어 나간다. 아이는 상상력이 풍부하나 선생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갈등이 반복되면서 점차 증폭되어 간다.
존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보게 되는 지각대장 존은 아직 '상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상상이 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인위적인 규율에 완전히 정복당하기 이전의 상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직 '계몽'되기 이전의 상태이고 '문명화 과정'에 완전히 편입되기 이전의 상태다. 아직 '자연 상태'에 가깝게 놓여있는 것이다. '그 덕에' 존은 자신만의 상상을 마음껏 즐길 줄 안다. 그래서 당연히 하수구에서 악어가 나오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건 결코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는 아이와 맞는 코드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학교는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의 세계를 교육의 이름으로 또는 계몽의 이름으로 파괴한다.
그러한 존에게 학교는 있기 싫은 장소다. 학교는 그의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없게 만들며, 그의 세계와 접속하지 못한다. <지각대장 존>은 계속되는 아이와 교사의 갈등으로 인해 한 아이에게서 그 세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간단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이 동화 속 아이와 선생의 갈등은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아이와 어른은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에서 각자 '독백'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동화 속에서처럼 아이와 어른은 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 독백하는 것일까? 그건 아이와 어른은 세계를 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고, 사유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원시 미술이나 현대 미술을 볼 때 당혹감을 느끼게 되듯이 아이의 세계도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제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린 이미 그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코드를 잃어버렸다. 그 코드는 '계몽의 과정'과 '문명화 과정'을 통해 오래 전에 깊고 어두운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우리는 예술가들이 망각의 강 '레테'를 넘어 그 세계에 접속하는 것을 본다.
상상력을 억압당한 만큼 현실에 대해서도 눈감아
상상이 넘치는 아이와 소통하지 못하는 교사의 갈등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교사는 아이를 계속 처벌하게 된다. 강도를 계속 높여가면서. 그리하여 존은 자신의 상상력을 포기하고 만다. 현실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그리고 이젠 학교에 지각하지도 않는다.
그럼 해피엔딩?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와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비로소 '계몽'된 것일까? 그리고 '문명화과정'을 훌륭하게 거친 사회성원의 일부로 자라나게 되는 걸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어느 날 선생이 고릴라에게 붙잡혀서 존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고릴라에 의해 천장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존은 "이 동네 천장엔 고릴라 같은 것은 살지 않아요" 하며 선생의 말을 무시한다.
이는 아이의 상상력이 억압당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존은 현실에 대해 눈감은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소중한 상상의 세계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억압당한만큼 현실에 대해서도 눈 감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에게서 '상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상상이 되는 세계'를 빼앗은 결과다. 이 동화는 이렇게 아이를 학교교육이라는 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잘 그려내고 있는 동화다.
아이에게 공감을 표시해주고 판단은 스스로에게 맡겨야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이렇게 하면 훨씬 좋을 것이다. 지각한 아이가 하수구에서 악어가 나왔다고 말할 때, 이렇게 한다면 말이다. "어머, 그거 참 흥미롭구나! 그런 일이 있어서 지각했구나. 그래도 선생님은 존이 제때 학교에 오면 기쁠 거예요."
이렇게 말한다면 아이는 선생님이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에 공감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아이들에게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아이들의 마음이 열리게 된다.
나아가 아이는 공감해주는 선생님 말을 듣고 지각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판단을 스스로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이의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화과정 속으로 '연착륙'시킬 수 있게 된다.
<지각대장 존>은 아이의 상상력이 억압받을 때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동화다. 그럼으로써 아이의 상상력을 억압하는 학교의 규율과 가정과 사회에서의 아동교육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반복 점층 구조를 지니고 있어 간단한 이야기 속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짧은 이야기 속에 아동교육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들며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이 담겨있는 동화라는 점에서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동화다. <오마이뉴스>
*며칠전 접한 그림책이다.
연필선이 드러나는 간단한 그림이었는데 힘이 넘친다
내용은 , 지각하게 만드는 갖가지 상황들이 매일 존에게 벌어진다
하지만 선생님은 존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며
존의 말을 들어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의 보이지 않는 벽이 보여지는 듯 하다
벽이란 세상과 나의 벽일 수도 있을 것이며 타인과 나의 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세상에 대해 또한 어른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잣대에 비추어 현실에 비추어 그들의 말은 변명처럼 되어 버리고
가능하지 않는 일이라 일방적으로 판단받게 되며
그들의 상상력이나 돌발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책은 어른에 대한 풍자이며, 세상에 대한 풍자이다
아이들에게 읽히기엔 조금 조소가 섞인 그림책인듯 하지만
분명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깨기엔 정말 아깝지 않는 그런 책인듯 하다.
몇장의 컷과 몇줄의 내용이 이렇듯 큰 힘을 작용할 수 있다는건 작가의 뚜렷한
메세지가 함축되어져 있기 때문일것이다
[난 지금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한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려 있다. 빨리 날 좀 내려다오. " "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 " ]
끝부분 반전을 접할때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아이들에게 한대 얻어 맞은듯한 기분이 드는건
나도 그 어른들 중의 한명이며 ,,편협 ( 偏狹) 한 이세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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