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유쾌했던 시절을 회상하며-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

[J플러스] 입력 2015-01-19 10:18:17




예술은 자고로 아름답고 예쁜것!

요즘 복고가 대세다. 인간은 과거를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사실, 과거는 분명 그렇지만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2.25 ~ 1919.12.3)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파리코뮌 유혈사태와 현대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파리, 특히 전통적인 것들이 남아있는 몽마르뜨를 사랑했고 보통사람들의 선한본성과 그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즐거움이 있는 삶을 예찬했다. , 유아, 여인의 누드, 강아지, 소녀들, 부유한 실내풍경 등 일생을 거쳐 오직 아름답고 예쁜 대상만을 그린 르누아르는 모름지기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 이어야한다. 세상에는 불유쾌한 것이 이리도 많은데 또 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물랭 드라 갈래트.png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 1876, 캔버스에 유채, 131 x 175cm, 오르세 미술관



고된 일주일을 보내고 맞이한 휴일. 사람들은 친구들, 가족, 연인들과 모여 댄스홀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누구하나 즐겁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사람들 위로 기분 좋게 일렁거린다. 이것은 1870년대 중반 프랑스 파리의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몽마르트의 물랭 드 라 갈레트 댄스홀의 풍경이다.(갈레트란 풍차의 소유주 가족이 풍차에서 구워서 팔았던 납작한 패스트리 스타일의 빵이다).남녀가 짝을 이뤄 즐거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유쾌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의 신체는 일부분이라도 타인과 닿아있어 그림 전체가 매우 촉각적이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림의 외각은 인물이 잘려지게 처리하여 화폭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시킨 듯 하고, 그림을 보는 우리도 그림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한다. 르누아르의 초기 인상주의 대표작인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는 정확한 형태와 묘사보다는 빛에 의에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체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인상주의의 그림이며,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중 하나로 손꼽힌다. 난해한 현대미술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아름다운 화풍이며 오히려 진부한 스타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그림이 첫 선을 보였던 18774월에 열린 3번째 인상주의 전시회 당시에는 스케치에 불과한 미완성 그림이라는 혹평을 감내해야 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빛이 인물들에게 떨어지는 모습을 얼룩덜룩 표현했고 태양이 비추고 있는 나무들도 납작하게 그려져 있다. 인물들의 묘사는 단순하고 평편하며 한 번의 붓질로 슥 마무리한 듯 보인다. 그러나 만약 르누아르가 각 세부까지 세세하게 묘사해서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를 그렸다면 이 작품은 진부하고 생동감 없게 보였을 것이며 나무들 사이로 얼룩진 빛의 효과도 이렇게 근사하게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에 모델로 등장하기도 한 조르지 리비에르(그림의 가장 오른쪽 앞에 모자를 쓰고 펜을 들고 있는 인물로, 르누아르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후에 그의 전기를 썼다.)는 한 비평에서 그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이며 파리인들의 삶의 귀중한 기록이다. 그렇게 큰 캔버스에 평범한 삶의 일화를 표현한 것은 르누아르가 처음이다라고 쓰며 그림의 현대성을 치하했다.



르누아르가 몽마르뜨를 사랑한 이유는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르누아르는 어렸을 때 도시재정비로 파리 중심에 있었던 어린 시절의 집을 잃었는데, 지리적으로 발전이 더뎠던 몽마르뜨에서 과거 자신의 집에서 느꼈던 친밀한 삶의 방식과 자연을 느끼게 된 것이다. 르누아르는 그의 작품 속에서 늘 18세기를 향한 향수를 표현했고 그것은 그의 예술적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그림은 르누아르의 환상이라고 이야기 된다. 르누아르가 이 그림을 구상하고 그리던 당시는 정치적 억압이 자행되던 시기였고, 특히<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의 배경인 몽마르뜨는 기존 정부에 저항하며 혁명을 외치던 레지스탕스 모임인파리코민의 본거지였다. 18715, 1주일간 지속됐던 격렬한 전투 끝에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적어도 2만면의 혁명 지지자들이 죽었다. 그 후 프랑스는 반공화국 주의인 군주정권으로 돌아갔고 몽마르뜨는 급진좌파 폭동들과 부도덕함으로 대표되었으며 전투에 대한 속죄에 의미인 듯 몽마르뜨엔 사크레 쾨르 성당이 세워졌다. 가속화되는 산업화로 인해 과거의 삶의 방식이 사라지면서 대부분의 노동자 계층은 혹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고, 그럼에도 점점 더 가난해졌다. 정치적으로 날이 선 현실과 주위의 빈곤을 반영하지 않고 아름답고 행복하기만한 그림만 그리는 르누아르를 일부에선 현실도피자 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그 자신도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가난과 끔찍하고도 매우 고통스러운 사회적 변화를 직접 겪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몽마르뜨의 만연한 가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부모가 일하러나가고 혼자 방치된 몽마르뜨의 아이들을 위해 탁아소 건립을 위한 기금마련을 직접 추진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에 허덕일 때 역설적으로 가장 유쾌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 그림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억압적인 정부의 권의의식에 도전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가 현실도피적 그림인지, 아니면 르누아르만의 정치적 메시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건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즐겁고 행복하게보이도록 그리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아픔보다는 아름다움으로 기억하듯이 말이다.



그 후 이야기

사실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라는 제목의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르누아르는<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에 스스로 만족해서 크기만 다르게 바꿔서 2번 그렸는데,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리 오르세미술관의 거대한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반 정도 크기로 현재는 개인소장이 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두 개의 그림모두 1876이라 기록되어 있기에 어느 것이 먼저 그려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미술계에선 작은 그림이 먼저 그려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 사이즈가 작아 주로 밖에서 작업했던 르누아르의 인상주의 스타일 화법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먼저 야외에서 완성한 후(큰 사이즈를 위한 스케치 정도로) 화실에서 큰 사이즈의 그림을 공들여 완성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은 사이즈의 그림이 1990년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공개 되어 경매장에 나왔을 때, 당시 소더비 경매사상 가장 비싼 금액인 781십만 유로, 원화로 약840억에 낙찰되었다. (낙찰 주인공은 일본의 대부 료에이 사이토였는데 그는 825십만 달러에 상당하는 고흐의 <가셰박사의 초상>도 소유했었다.) 작은 사이즈의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사이토는 온도가 조절되는 금고에 넣어 7년간 보관했다. 그가 죽고 제정이 어려워지자 1997년 다시 소더비에 나온 작은 사이즈의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는 이번에는 비밀리에 진행된 경매로 개인수집가에게 넘어갔다. 소유자에 대한 정보가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되고 있어 현재까지 그 그림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작은 사이즈의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가 극소수 사람들의 심미안만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이에 대해 미술계에서는 초기 인상주의의 대표작중 하나인 아름다운 작품이 개인 혼자만의 기쁨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이러한 작품일수록 공적 기관에 전시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겨야 한다고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에게 알려진 <물랭 드 라 갈래트 댄스>는 아름다움과 유쾌함, 행복의 이미지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