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나무로 자라는 방법' [#70]

교양·라이프시 읽는 토요일 2016년 09월 9일 15:05 윤지은

[한겨레 토요판] 이주의 시인, 유희경


나무로 자라는 방법 / 유희경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두 눈이 빨개지고

두 손이 비어 아플 정도로

아무도 아니었다

 

나무가 애석한 까닭에 대해서

남자도 새도 가지도 방금,

지워질 듯 떨어져버린 잎도

할 말이 없다 대개 그렇듯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간다

 

남자는 나무를 심지 않았고

나무의 둥치를 만져본 적 없고

몸을 기댄 적도 없지만,

남자와 나무의 속도는 같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방금 떨어진 것은 나무의 잎맥이고

나무의 전생이며 지독하게

갔다가 돌아온 남자의 일상이고

무표정한 당신의 민낯

 

한 남자가 있고 한 그루

나무와 당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만큼

어떤 시간이 지나가고 나도

모르고 있을 그만큼의


● 제작진

기획: 박유리, 제작: 한겨레TV, 낭송: 유희경, 영상편집: 윤지은, 영상: 이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