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 이주의 시인, 유희경
나무로 자라는 방법 / 유희경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두 눈이 빨개지고
두 손이 비어 아플 정도로
아무도 아니었다
나무가 애석한 까닭에 대해서
남자도 새도 가지도 방금,
지워질 듯 떨어져버린 잎도
할 말이 없다 대개 그렇듯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간다
남자는 나무를 심지 않았고
나무의 둥치를 만져본 적 없고
몸을 기댄 적도 없지만,
남자와 나무의 속도는 같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방금 떨어진 것은 나무의 잎맥이고
나무의 전생이며 지독하게
갔다가 돌아온 남자의 일상이고
무표정한 당신의 민낯
한 남자가 있고 한 그루
나무와 당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만큼
어떤 시간이 지나가고 나도
모르고 있을 그만큼의
● 제작진
기획: 박유리, 제작: 한겨레TV, 낭송: 유희경, 영상편집: 윤지은, 영상: 이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