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광대골(도깨비골)
위치 : 동해시 망상동

'관대골'이라고도 하는데 , 연해불에서 동해 휴게소 쪽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말한다. 크고 넓다는 뜻으로 '도깨비골'이라고도 한다.

구전에 의하면 어떤 억센 분이 말을 타고 강릉에 갔다가 늦어져 이곳을 지나는데, 이쁜 색시에게 홀려"오빠 같이 가자"하니 '그럼 내뒷 등에 타라"고 하여, 떨어질까봐 꽁꽁 동여 가지고 집에 왔었는데 색시는 없고 빗자루만 뒤에 꽁꽁 묵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난 이남자는 그 빗자루를 모탕에 놓고 도끼로 내리치니 빗자루가 잘리면서 핏물이 튀었다고 하여 빗자루에 피를 묻히는 것을 금하였다고 한다.

고요한 날이면 거기서 큰소리를 지르면 "사람 살려라" 하는 소리가 들려, 이상해서 등불을 켜가지고 가서 보니 수풀 밑에서 들리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도깨비는 여자들이 머리를 빗을때 피가 빗에 묻으면 빗에있던 것이 나와서 도깨비가 된다고 하고, 또 부인들이 경도가 있을때 빗자루를 깔고 앉았다가 내 던지면 그것도 도깨비가 된다고 토속적인 구전 전설로 나와있다.



2.심동로 묘와 일출문
동호동에 연안된 삼척 심씨 시조 심동로의 묘소에 얽힌 전설로서 이 묘소의 정동향 바다쪽에는 향로봉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산이 있다.

해변에 접한 이봉에 육지 산쪽으로 큰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었는데 이름을 일출문이라고 하였다. 일명 일월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아침해가 뜨면 일출문 구멍을 통하여 햇빛의 초점이 동호동 뒷산의 한 곳을 비쳤던 바 심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바로 그 빛이 비치는 장소에 영안케 하니 오늘날까지 명당이라 전하는 심공의 묘소이다.

그후 진주군 심동로의 시제(時祭)는 매년 9월에 날을 정하여 제를 올리게 되는 바, 그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시제에 바치는 어물(생선)은 인근 어촌인 어달동 대진에서 어민들이 마련하여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부터 150여년전 어느 해 심공의 제일이 가까이 왔는데 연일 파도가 거칠어 도저히 고기잡이를 할 수 없게 되자 어민들은 심히 걱정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만약 어물을 장만하지 못하면 당시의 세도가인 심씨 문중에서 추상같으 문책이 떨어질 것이 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두타산의 중 연용섭이 시주를 얻고자 이 마을에 들렀다.

이때 한 주민이 중에게 "우리는 심씨 시형에 바칠 어물을 날씨 탓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대사께서 좋은 방도를 일러주시면 우리들은 시주를 아끼지 않겠다"고 사정을 했다. 이 말을 듣던 중은 엄숙한 표정을 띠며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다음날 이 고승은 진주군의 묘소에 나타나 심씨 종중이 모인 자리에서 "이 묘는 일출문바위의 구멍에서 햇살이 비쳐오기 때문에 후손의 대성이 어려우니 저 일출문 바위를 파괴해 버리고 신도비를 없애는 것이 길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이일이 있은 후 심씨문중은 중이 꾸민 말을 믿고 그 바위를 깨버리고 신도비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전하기도 하고, 그러한 곤욕을 받지 않기 위해 고승의 말에 따라 어부들이 몰래 그 바위를 깨어 버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일출문 바위는 흔적도 찾아 볼수 없으며 동로공의 묘소만 동해를 바라보며 명당을 자랑하듯 따뜻한 양지에 아담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3.강감찬과 개미
지금 망상학교 앞 철길 옆에 들축나무골이 있는데, 그 곳은 들축나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고려때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 들축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개미들이 자꾸 덤벼들어 귀찮게 하였다.

장군은 쥐고 있던 지팡이로 금을 쭉 그었대. 그랬더니 개미들이 전혀 달려들지 않았고, 지금도 그 금이 그어져 있던 자리에는 사람이 누워 자도 개미들이 달려들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4.강감찬과 모기
옛날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뒷뜨루(현 북평동)에 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모기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을 잘 수 없자 장군은 종이에다 방을 써서 창밖으로 뿌렸다.

그러자 모기들이 울지도 물지도 않아 잠을 편히 잘 수 있었고 지금도 뒷뜨루에있는 모기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한다.

 

5.아기장수 이야기
아기장수가 태어났던 집터는 지금은 토지정리를 해서 없어졌지만 쌍용양회 부근이라고 전해진다. 그곳에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배선남"이라는 애를 낳고 태를 자르 려고 하니 애가 안보이는 것이었다. 놀라서 남편을 부르고 관솔불을 훤하게 하고 찾아보니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실공(시렁)위에 냉큼 올라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장수가 나면 역적이라 해서 죽이고 3대를 멸하는 시대라 부부는 이를 염려하여 맷돌로 아기를 쳐 죽였다. 그러자 근처 굴에서 용마가 나 세번 울고 사라졌다고 한다.

근 300년전 이야기 이지만 용마가 난 곳은 도경역 근처에 있는 굴이라고 전해진다. 그 일이 있고 난뒤 그 집안에는 벙어리가 속출 하는 등 거의 다 부실하였다고 한다.

 

6.댐지실 부자
옛날 심곡리 댐지실에 김씨 부자가 살았는데, 어찌나 인색한지 시주나온 스님에게 쌀대신 마굿간 걸금을 잔뜩 퍼 주곤 하였다. 봉변을 당한 어느 스님이 집 주위를 한번 흘끔 보고 가더란다. 그후 몇일이 지났는데 그 스님이 변장을 하고 다시 와서 집뒤에 있는 묘자리가 돼지형상이라서 조상이 돼지로 되어 꿀꿀 거리겠다며 묘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주인은 조상이 돼지가 된다니 겁도 나지만 한편 그자리가 명당이라는 말을 들었던 차라 망설이다가 "묘를 파서 이상이 없으면 당신 목을 내놓으라"고 하고는 묘를 파는데, 파다 보니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일이 이쯤 되니 이장을 할 수 밖에. 사실 스님은 모욕에 대한 앙갚음으로 주인을 속인 것이었다. 그 묘자리는 김씨부자 집에서 일하던 박씨가 샀는데 그 사람은 그 자리가 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 묘를 이장했고, 가문이 잘 되어 자손중에 참의벼슬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김씨네는 집안이 망하고 자기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7.용암과 철불
이 바위는 구 삼화사 터 앞에 있는 바위로서 삼화사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여래불 삼불이 서역에서 동해로 건너와 인연이 깊은곳을 찾던 중 이곳을 발견하고 한 부처는 삼화사에, 한 부처는 지향사에, 나머지 하나는 근덕영은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때 삼불을 태우고 온 용은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가 곧 용암이다.

현재에도 용암 윗면에 삼불이 앉았던 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으며 삼불 중의 하나가 현재 삼화사 좌불암에 보관되어 있는 철불이라고 한다.


 

8.빨갛게 얼룩진 고부석
옛날 망상 마을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어느해 여름 긴 장마가 계속되다가 모처럼 햇빛이 나오자 두 고부는 냇가에 나가 밀렸던 빨래를 빨았다.시어머니는 너무 날씨가 무더워 빨래를 그만두고 목욕을 하게 되었다. 오랜 장마뒤라 물살이 세어 시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순간 냇물에 휘말려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자 빨래하는 며느리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요청을 하였다. 열심히 빨래를 하던 며느리는 위급한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물속에 뛰어들어 시어머니를 구하려 했으나 오히려 며느리도 소용돌이에 휘말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후 냇가 양쪽에 빨갛게 얼룩진 돌이 생기고 비오는 밤이면 여자의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며 이 바위를 고부석이라 부르게 되었다.

 

9.어진 호장과 까막바위
묵호항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300m지점에 높이 10m에 유난히 검은 색을 띠고 깍아 세운 듯한 해변에 우람한 모습을 나타내고 서 있는 바위가 곧 까막바위다.

이 까막바위에 대한 전설이 구구하지만 공통점을 지닌 전설에 의하면 이조 중엽(연대미상) 지금의 묵호동이 망상현에 속해 있을 때 이야기인 즉 이곳 마을에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있는 의로운 호장 (지금의 통·리장)이 살고 있었다. 춘궁기가 되면 마을의 가난한 사람은 한 집도 빼지 않고 곡식을 나눠 먹고 지나는 걸인 까지도 후한 대접을 해 주는 어진 호장으로 부략민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그런데 동해안에는 가끔 왜구가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주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농략하기 시작했다. 이때도 그 호장은 왜적에게 호통을 치며 싸웠으나 맨손으로 당해 내기는 속수무책이었다. 왜적은 약탈한 재물과 그 호장을 묶어 배에 싣고 항해하려 하자 마을의 전주민이 삽, 괭이, 곡괭이, 막대기를 들고 왜적들에게 그 어진 호장을 못 데려간다고 했으나 무참히 죽어만 갔다. 분노에 떨던 호장은 왜장에게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을 다시는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꾸짖자,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번개가 치고 파도가 밀어 닥쳤다. 그러자 호장이 탄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말았다.

이때 남은 한척의 배가 달아나자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나타나 달아나는 왜수의 배를 내리쳐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왜구는 모두 죽었다. 다음순간, 하늘은 맑게 개고 파도가 잔잔해지자 한 떼의 까마귀가 몰려들어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그 때 나타난 큰 문어는 어진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이라고 말하며 그로부터 이 마을에 왜구의 침입이 끊어졌다. 이 까막바위 밑에 큰 굴이 두 개 있는데 그 호장이 영혼이 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해녀들도 이 근처에는 가지 않고 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까막바위 굴 밑을 들여다보니 큰 문어가 있어 놀라 되돌아 오는데 갑자기 수십마리의 까마귀 떼가 덮치고 물어 뜯으며 울어댔다고 하며 죄지은 사람이 까막바위 밑을 지나면 문어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다.


 

10.여우가 변한 서구암
서구암은 북평 취병산 서편 백월산 밑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는 서구라는 여우의 화신인 노파가 죽어 변하였다는 전설로 서구의 손자국 흔적이 남아있다.

서구는 천년 묵은 여우의 화신으로 신통력과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근 주민이 자기에게 거슬리면 심통을 부려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또 질병을 퍼뜨려 주민을 괴롭혔다.

특히 어린이에게 천연두를 퍼뜨려 죽게 하므로 주민은 서구를 무척 두려워 하였다. 서구의 장난이 무서워 이곳을 지나갈 때 수십명의 무리를 지어 소와 제물을 바치고 지나갔다.

이처럼 서구의 작폐로 인근 주민이 불안과 공포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 이곳 출신의 소문난 효자 최진후와 힘센 역사 김면이 서구의 피해로부터 주민들을 구하기로 하고 합심하여 서구와 싸워 서수 머리를 쑥으로 뜸을 100여 곳에 놓자 서구는 3일간 정신을 잃고 있다가 죽어갔다.

이때 서구가 죽어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 바위가 서구암이다

11. 어진 호장(戶長)과 까막바위이야기
묵호항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300m지점에 높이 10m에 유난히 검은 색을 띠고 깍아 세운 듯한 해변에 우람한 모습을 나타내고 서 있는 바위가 곧 까막바위다.

이 까막바위에 대한 전설이 구구하지만 공통점을 지닌 전설에 의하면 이조 중엽(연대미상) 지금의 묵호동이 망상현에 속해 있을 때 이야기인 즉 이곳 마을에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있는 의로운 호장 (戶長:지금의 통·리장)이 살고 있었다.

춘궁기(春窮期)가 되면 마을의 가난한 사람은 한 집도 빼지 않고 곡식을 나눠 먹고 지나는 걸인 까지도 후한 대접을 해 주는 어진 호장으로 부략민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그런데 동해안에는 가끔 왜구가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주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농략하기 시작했다. 이때도 그 호장은 왜적에게 호통을 치며 싸웠으나 맨손으로 당해 내기는 속수무책이었다.

왜적은 약탈한 재물과 그 호장을 묶어 배에 싣고 항해(航海)하려 하자 마을의 전주민이 삽, 괭이, 곡괭이, 막대기를 들고 왜적들에게 그 어진 호장을 못 데려간다고 했으나 무참히 죽어만 갔다.

분노에 떨던 호장은 왜장에게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을 다시는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꾸짖자,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번개가 치고 파도가 밀어 닥쳤다. 그러자 호장이 탄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말았다.

이때 남은 한척의 배가 달아나자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나타나 달아나는 왜수의 배를 내리쳐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왜구는 모두 죽었다. 다음순간, 하늘은 맑게 개고 파도가 잔잔해지자 한 떼의 까마귀가 몰려들어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그 때 나타난 큰 문어는 어진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이라고 말하며 그로부터 이 마을에 왜구의 침입이 끊어졌다. 이 까막바위 밑에 큰 굴이 두 개 있는데 그 호장이 영혼이 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해녀들도 이 근처에는 가지 않고 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까막바위 굴 밑을 들여다보니 큰 문어가 있어 놀라 되돌아 오는데 갑자기 수십마리의 까마귀 떼가 덮치고 물어 뜯으며 울어댔다고 하며 죄지은 사람이 까막바위 밑을 지나면 문어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다.

PS 동해지역 설화집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