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술한잔 하고 싶은 '경회루'

 

눈내린 경회루, 경회루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인다.

 

근정전을 다 둘러보고 왼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큰 누각의 지붕이 보입니다. 그곳이 바로 경회루입니다. 경회루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진이나 그림과 달리 경회루를 직접 보게되면 웅장함에 놀라게 됩니다. 누각이지만 근정전에 버금가는 크기입니다.

큰 연못을 파고 돌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48개의 화강암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누각을 올려놓았습니다. 누각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크기가 웅장하지만 처마선이 예뻐서 중국의 그것처럼 위압적이지도 않고 일본것 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없습니다. 웅장하지만 눈과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아름답습니다. 경회루 동쪽에는 3개의 다리가 있어 드나들 수 있었고 여기에도 어김없이 돌짐승을 세워 나쁜귀신이나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경회루를 바라보면 술생각이 납니다. 달밝은 밤에 경회루에 올라 연못에 비친 달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한잔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해보곤 합니다. 옛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경회루는 임금이 연회를 여는 곳이었습니다.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나라의 기쁜 일이 있을 때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경회루를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연일 연회를 열다가 임금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현대에도 있었습니다. 경회루를 일반시민에게는 출입을 금지시켰을 때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은 사람들 모르게 경회루에서 연회를 자주 즐겼다고 합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호사를 누린 것이죠.

 

경회루 다리 난간에 나쁜 귀신을 막으라고 세운 돌짐승,

이 돌짐승도 경회루에서 남들 몰래 술자리를 가졌던 독재자들을 막지는 못했다.


경회루는 몇 년 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을 제외하고 신청인에 한하여 관람이 가능해졌습니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경회루는 연못밖에서만 보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누각은 그곳에 올라 경치를 보고 즐기라고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문화재를 통해 옛사람들의 정취를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일방적으로 출입을 통제해서 문화재를 보존하겠다는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하지 못합니다. 늦게나마 이런 결정을 한 문화재청을 칭찬하고 싶네요.
하지만 저는 한 술 더 떠서 다른 욕심이 있네요. 이왕 여흥을 즐기려고 옛사람들이 만든 곳이니 우리들도 그곳에서 여흥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군사정권에서처럼 권력자들끼리 권력을 이용해서 호사를 누려서는 안되겠지만요. 이런 것을 어떨까요? 선행을 한 사람들과 응모를 받아 당첨된 시민들을 모셔서 일년에 몇차례 경회루에서 연회를 연다면 경회루를 훌륭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경회루의 봄, 웅장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은 경회루는 조선궁궐 건물 중에 수작이라고 할만하다.

 


수정전과 그 주변

 

경회루 남쪽으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이 ‘수정전’입니다. 수정전은 잘 몰라도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을 만든 집현전은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집현전은 세종 때 학자를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곳입니다. 수정전은 집현전이 있던 곳입니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고 수정전은 고종이 신하들을 만나 정무를 의논하던 곳으로 쓰였습니다.

 

수정전 월대 앞에는 큰나무를 벤 흔적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조상은 정원 한가운데 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건물 앞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정원 한가운데 나무를 심으면 네모난 울타리에 나무 목(木)가 있어 곤란할 곤(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나무가 심어져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1910년에 찍은 수정전 사진이 남아있는데 그 사진에는 나무가 없습니다. 결국 이 나무는 1910년 이후에 심어진 것입니다. 추측하자면 일제가 의도적으로 나무를 심은 듯합니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제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다 헐지는 못했어도 얼마나 악의적으로 조선왕조를 저주했는지를 알게해줍니다. 이 나무는 1999년에 베어졌으나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이곳을 둘러본 사람들은 왜 이곳에 나무가 심어졌다가 베어졌는지를 알길이 없습니다.

 

1910년에 찍은 수정전, 나무가 없다. 1930년대에 찍은 수정전, 나무가 있다.

수정전 주변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넓직한 잔디밭이 좋아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 바꾸면 이 잔디밭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궁궐은 왕이 사는 곳이면서 동시에 임금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하던 곳입니다. 궁궐이 넓기는 하지만 궁궐안에는 관료들이 사무를 볼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이렇게 한가한 잔디밭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물론 임금이 산책하고 휴식해야 할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근정전 바로 옆에서 임금이 쉬었을까요? 아닙니다. 임금이 쉬던 정원은 근정전 뒤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우리조상은 정원에 잔디를 심지 않았습니다. 잔디는 무덤에나 심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수정전 주변에는 애초 잔디밭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영의정,우의정,좌의정이 나랏일을 보던 빈청,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승정원 등의 관청과 경호실 역할을 하던 오위도총부, 내금위 등의 관청이 있었습니다. 또한 드라마 허준과 대장금을 통해서 익숙해진 내의원과 사옹원 등 왕실의 건강과 살림을 담당한 관청들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수많은 관청이 있었기에 수정전 주변에는 빽빽할 정도로 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이곳에 있는 관청은 궐내각사(闕內各司)라고 불렀습니다. 광화문 밖에 있던 6조를 비롯한 관청은 궐외각사(闕外各司)라고 불렀구요.

 

그럼 그 많던 건물은 어떻게 됐을까요?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1910년을 전후로 조금씩 헐리기 시작해서 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기 시작하면서 아예 빈터가 된 것이고 후에 이곳에 잔디를 심은 것입니다.
이렇듯 일제가 조선의 궁궐을 어떻게 훼손했는 지를 알게 되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하지만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만 한다면 우리의 궁궐은 진정한 복원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지붕처마에 서있는 손오공과 친구들

 

지붕처마에 서있는 잡상,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이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은 궁궐을 돌아다니다 지붕 처마를 보며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궁궐 지붕 처마에 흙으로 만든 검은색 인형이 여러개 서있는데 무슨 인형인지, 그리고 왜 그곳에 있는지 궁금할 법도 합니다. 이 흙인형은 궁궐 대부분의 지붕 처마에 있습니다. 경복궁 뿐만 아니라 다른 궁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대문, 동대문 처마에서도 이 흙인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궁궐 뿐만 아니라 주요 건물마다 세워두었나 봅니다.

이 흙인형은 ‘잡상(雜像)’이라고 합니다. 잡상인이 아니라 ‘잡상’입니다. 잡상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라고 합니다. 잡상들 중 맨 앞에 서있는 인형이 삼장법사고 그 뒤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 서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순서가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저도 잡상을 자세히 봤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옛사람들은 우리처럼 서유기를 만화나 영화로 보지 않았으니 서로 다르게 상상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창덕궁 잡상, 삼장법사와 손오공이다. 경복궁 잡상과는다르게 생겼다.

그럼 지붕 처마에 왜 손오공과 그 친구들을 세워두었을까요? 잡상은 장식용 기와로 악귀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왜 하필 서유기의 인물인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 당 태종과 관련이 있다고 하네요. 사진기를 갖고 계신 분은 잡상 중 맨 앞에 있는 삼장법사의 표정을 당겨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 표정이 재미있으면서도 악귀가 오지 말라고 신경질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 궁궐에는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했다면서 우리가 쓰는 ‘어처구니 없다’의 유래를 설명하더군요. ‘어처구니’는 멧돌을 돌리는 손잡이로 알고 있었는데 정확한 것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럼 다음 호에는 근정전 뒤로 돌아가서 임금이 정무를 보던 사정전과 임금과 왕비의 침실인 강녕전과 교태전 등을 돌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