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이유와 의미는?...|    역사소모임

터사랑|조회 67|추천 0| 2011.10.12. 10:57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세한도를 그린 이유와 의미는 그림 옆에 있는 발문에 나와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고사를 인용해서 쓴 글이라 그 고사의 내용을 이해하면 발문의 내용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한도를 주제로 한 책(키워드 한국문화1. 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박철상 지음, 문학동네)에서

옮겨 적어본다.(양이 많아서 워드 치느라 고생^^)...분량이 많더라도 꼼꼼하게 다 읽어보시면 이해가 쏙쏙^^

 

<세한도>

 

<세한도 좌측에 있는 발문>

 

 

<발문을 다시 옮기면...>

去年以晩學大雲二書奇來 今年又以藕耕文編奇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유權利之是이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憔최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司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不以權利視我耶 太司公之言非耶

孔子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特稱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絶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비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발문을 해석해서 옮기면...>

지난해엔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 大雲山房文藁」두 가지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하장령賀長齡의 「경세문편經世文編」을 보내왔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게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에서 구입해온 것들이다. 여러 해를 걸려 입수한 것으로 단번에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권만을 좇는데, 그 책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심력을 쏟았으면서도 권세가 있거나 이권이 생기는 사람에게 보내지 않고, 바다 밖의 별볼일없는 사람에게 보내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들이 권세나 이권을 좇는 것처럼 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나 이권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세나 이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께서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아! 서한시대처럼 풍속이 순박한 시절에 살았던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권세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비下邳 사람 적공翟公이 문에 방문을 써서 붙인 일은 절박함의 극치라 할 것이다.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쓴다.

<발문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두면 좋을 듯한 내용들...>

추사가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준 표면적인 동기는 구하기 힘든 책을 청나라에서 구해다가 제주도에 유배중인 자신에게 보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책들을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바쳤다면 출셋길도 열렸을 것이고, 보다 나은 삶이 보장되었을 텐데, 굳이 바다 밖 먼 곳에서 유배중인 자신에게 보내줬으니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이상적의 앞길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고, 그를 도와줄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그림이나 한 폭 그려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한도>에 붙인 추사의 글은 짧지만 이해가 쉽지 않다. 추사의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옛 고사를 알아야 한다.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정세가鄭世家」의 이야기로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 때의 일이다.

 

정나라의 임금인 장공莊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홀忽, 돌突, 자미子亹가 그들이다. 큰아들 홀의 어머니는 등鄧나라 사람이었고, 둘째인 돌의 어머니는 송나라의 정경正卿 옹씨雍氏의 딸이었다. 옹씨는 송나라에서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둘째 아들 돌은 든든한 배겨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임금인 장공이 죽자 정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제중祭仲은 큰아들 홀을 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소공昭公이다. 송나라 임금은 홀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아주 화가 났다. 사람을 시켜 제중과 돌을 송나라로 유인하였다. 그러고는 제중을 협박하여 귀국 후 돌을 왕위에 세우도록 했다. 제중은 송나라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소공 홀은 제중이 송나라의 협박으로 동생인 돌을 왕위에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위衛나라로 망명하였다. 귀국한 제중은 돌을 왕위에 세웠다. 그가 바로 여공厲公이다.

여공이 즉위한 후 몇 년이 흐르자 제중은 국정을 전횡하였다. 이를 걱정한 여공은 제중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제중의 사위 옹규雍糾에게 그 일을 시켰다. 옹규는 이 일을 아내에게 이야기했고, 옹규의 아내는 다시 자신의 어머니인 제중의 부인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중이 오히려 옹규를 죽여버렸다. 그해 여름 여공은 정나라의 수도에서 나와 역櫟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제중은 소공 홀을 맞아들여 재빨리 즉위시켜버렸다. 그러자 여공은 정나라에서 파견되어 있던 대부大夫 단백單伯을 죽이고 역 지역에 정착하였다. 여공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여공을 복귀시키기 위해 정나라를 여러 번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송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여곡이 역 지역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군사를 보내 지켜주었다. 이 때문에 정나라에서도 여공을 공격할 수 없었다. 여공은 이렇게 그곳에서 17년을 지냈다. 그사이 정나라에서는 소공이 죽었고, 그의 아우 자미가 왕위에 올랐다가 역시 죽음을 맞았다. 다시 진陣나라에 머물고 있던 자미의 아우 영嬰을 불러와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그가 바로 정자鄭子이다.

이후 정나라의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제중이 죽자 여공은 생각이 달라졌다. 정나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람을 시켜 정나라의 대부 보하甫瑕를 유인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우라고 협박했다. 보하는 여공의 요구대로 정자를 죽인 뒤 여공을 왕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나라로 돌아간 보하는 약속대로 정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인 후 여공을 맞이했다. 여공은 귀국하자 백부伯父인 원原을 꾸짖었다.

“내가 국외에 망명하여 지낼 때 백부께선 나를 맞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 심하셨습니다.” 그러자 원이 말했다. “임금을 섬길 때에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제 죄를 압니다.” 그러고는 자결하였다. 그러자 여공은 보하에게 말했다. “그대는 임금을 섬김에 두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보하를 죽였다. 보하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큰 덕을 베풀면 보상받지 못한다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사마천은 『사기』「정세가鄭世家」를 끝맺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는 말이 있다. 보하의 경우가 그렇다. 보하는 비록 협박을 받아 정자를 죽이고 여공을 맞아들였지만 여공은 끝내 보하를 배신하고 죽여버렸다.

추사는 여기서 이상적의 의리를 치켜세운다. 태사공이 말하지 않았던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그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고 말이다. 세상 사람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대는 어찌해서 세상의 이런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 초연할 수 있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추사의 입장에서 태사공의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 억울하게 유배객이 된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도 대부분 소식이 끊겨버렸다. 겨우 초의와 같은 승려나 몇몇 여항인들만이 추사를 끝까지 따랐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추사를 이 사지에서 구해줄 힘이 없었다. 정작 힘 있는 사람들은 추사와 애써 소식을 끊고 지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의 의리는 추사에게 눈물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추사는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調’라는 구절이다. ‘세한’이란 추운 계절, 즉 겨울을 가리킨다. ‘후조後調’는 순서대로 번역하면 ‘뒤늦게 시든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면 시들기는 하지만 다른 나무보다는 늦게 시든다는 말이 된다. 절개가 변하긴 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늦게 변한다는 말이다. 올바른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는 뒤에서부터 번역하여 ‘시드는 것을 뒤로한다’로 해석해야 한다. 시드는 것을 뒷전으로 한다는 말은 곧 시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풀이해야 공자의 말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내리면 다른 나무들의 잎은 모두 지고 없다. 그렇다고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그 다음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은 사시사철 지는 법이 없다. 언제나 푸른 잎을 자랑한다. 사람들은 봄이나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만 해도 이 사실을 잘 모른다. 겨울이 되어 다른 나뭇잎이 모두 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자 역시 그랬던 것이다. 겨울이 되고 나서야 잣나무와 소나무를 보고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이상적도 마찬가지였다. 추사 자신이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에도 이상적은 자신에게 너무도 잘 대해줬다. 연행을 가면 언제나 추사를 위해 수많은 책들을 구해다주었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완원의 『황청경해』를 가져다준 사람도 바로 이상적이었다. 그런데도 추사는 이상적에게 그다지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잘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머나먼 바다 건너 제주도롤 온 뒤 사람들은 추사를 이전처럼 잘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식을 끊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상적은 추사가 유배중인데도 이전과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어렵게 구한 책들을 보내주었고, 청나라의 새로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주었다. 추사는 여기서 깨달았다. 공자가 왜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는지 말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영원히 푸르다는 것을 깨닫듯이, 유배객 신세가 되어서야 이상적의 의리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우선! 그대는 진정 송백과 같은 사람이구나.

이제 추사는 다시 『사기』의 「급정열전汲鄭列傳」을 인용해 글을 맺는다. 급암과 정당시의 열전에 붙인 사마천의 평이다.

급암과 정당시 같은 어진 사람들도 세력이 있을 때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열 배가 되었다가 세력이 없어지면 흩어졌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하비현下邳縣의 적공翟公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에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찾아오는 손님들이 문을 메울 지경이었지만, 벼슬을 잃게되자 문밖에 새 그물을 칠 수 있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적었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찾아오려고 했다. 그러자 적공은 문에다 이렇게 써 붙였다. “한번 죽었다 한번 살아나봐야 사귀는 정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졌다 한번 부유해져봐야 사귀는 태도를 알게 된다던데, 나는 한번 귀해졌다 한번 천해졌더니 사귀는 정이 드러났다.” 급암과 정당시 또한 그랬다 할 것이다. 슬프구나!

급암은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조정은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질서가 잡힐 정도였다. 한번은 천자가 학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의仁義를 베풀려고 한다.” 그러자 급암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속으론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베풀려고 하십니다. 그래서야 어찌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정치를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천자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노했다. 낯빛이 변하여 조회를 중지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급암을 걱정했다. 무제武帝는 물러나오면서 좌우에 이렇게 말했다. “급암의 우직함이 너무 심하구나.” 어떤 신하가 급암을 꾸짖자 급암은 이렇게 말했다. “천자께서 대신을 두어 보필하게 하셨는데 신하 된 사람이 아첨하여 천자의 뜻만 따르면서 그를 불의에 빠지게 하겠는가? 이미 그 지위에 앉아 있는 이상 자기 몸이 아무리 아깝더라도 조정을 욕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급암의 간언은 이렇게 매서웠다. 한번은 무제가 장조莊助에게 물었다. “급암은 어떤 사람이오?” “급암은 보통 벼슬자리에 앉히면 남보다 뛰어난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임금을 보필함에 있어선 그 본성을 굳고도 깊게 지켜 어떤 조건으로 불러도 오지 않고 손짓하여 불러도 가지 않습니다. 비록 맹분孟賁(중국 제齊나라의 용사 이름)이나 하육夏育(전국시대의 용사)을 자처하는 용사가 나서도 그의 절조는 빼앗을 수 없습니다.” 무제는 대장군을 만날 때에도 침대에 걸터앉아 만나기도 했고, 다른 신하를 만날 때에는 관을 쓰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급암을 만날 때만큼은 관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급암은 천자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곧은 성격 때문에 급암은 벼슬살이에서는 부침이 있었다.

정당시는 사람 천거하기를 좋아하고 기개가 있었다. 그가 태사로 있을 때 문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는 그 손님의 지위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말고 집 안으로 모셔 들이라.” 그는 이렇게 주인이 손님을 맞는 예를 다하여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남에게 몸을 굽혔다. 하지만 너무나 청렴하여 자신의 살림살이는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급여나 하사품을 받으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온화한 태도로 황제의 뜻을 따랐고 일의 옳고 그름을 심하게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천거한 사람이 일을 잘못하여 죄를 짓게 되었고 이 때문에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얼마 뒤에 다시 장사長史에 오르기도 하였다.

급암이나 정당시는 이처럼 훌륭한 인물들이었지만 이들에게 세력이 있을 때에는 손님들이 몰려들었어도 세력이 약해지면 손님들도 흩어졌던 것이다. 적공의 글은 정치판의 염량세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봐야 상대방의 진심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졌다가 한번 부자가 되어봐야 상대방이 어떻게 처신하는지 알게 된다는데, 적공은 정위 벼슬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서 사귀는 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자신의 집 앞에 가득했었는지 그 진심을 알게 된 적공은 그런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 적공만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급암과 정당시 또한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추사 자신이라고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추사는 마지막 부분을 ‘비부悲夫’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태사공이 「급정열전」의 마지막에 썼던 바로 그 문구였다. 태사공의 심정을 추사는 가장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추사에게 이상적은 정말 시류에 초연한 송백과 같은 인물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어디로들 갔단 말인가. 슬프구나. 비부悲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