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신화 이중섭 전  http://www.jungseob.com/

 

 

 

이중섭(1916~56)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양, 정주, 도쿄에서 학업을 쌓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화가 활동을 시작했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온 후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으로
제주도, 부산 등지에서 피란생활을 했고, 전쟁 직후에는 통영, 서울,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6년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이중섭은 끈질기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가난한 피란시절에도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하면,
전쟁 후에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힘찬 황소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 되고자 했고, 한국의 전통미감이 발현된 ‘민족의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후 사기로 인한 빚에 시달렸고, 경제적 생활고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쓸쓸하고 애잔한 작품들을 뒤로 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났다.

 

 

 

 

 

 

[이중섭, 백년의 신화] [내가 본 이중섭] [1] [2]

이중섭과 김소월은 닮았다, 애절한 그리움이…[1]유홍준

시대에 아파했던 '순결한 童心'을 다시 한 번…[2]고운

 

 

[이중섭, 백년의 신화] [내가 본 이중섭] [1] 유홍준

이중섭과 김소월은 닮았다, 애절한 그리움이…
소월의 詩는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
중섭의 그림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 절절함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황혼에 울부짖는 '황소'이다


유홍준 미술사가·명지대 석좌교수 사진

유홍준 미술사가/명지대 석좌교수

 

'백년의 신화'가 오늘에 환생하는 것만 같았다. 이중섭이 한국 현대미술의 전설로 된 지야 오래됐지만 정작 국민이 그의 실작품을 보고 예술적 감동을 받을 기회는 아주 적었다. 미술과 함께 살아온 나 자신도 1986년에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이중섭 30주기전 이후 30년 만이다.

사람들은 "이중섭, 이중섭" 하면서 그의 예술에 담긴 이런저런 얘기들을 전설처럼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중섭 하면 먼저 세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 첫째는 그의 유작 중에는 정통 타블로(회화) 작업으로 인식되는 캔버스에 그린 유화(油畵)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도 처음 공개된 '향도'(1939년 일본 유학 시절 작품)를 빼고는 모두 종이에 그린 것이다. 캔버스 대작(大作)도 못 해본 열악한 조건의 화가였다.

둘째로 이중섭은 100년 전에 태어나 60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화가로서 활동한 10여 년의 세월은 일제 말 군국주의의 광폭적인 압박, 해방 후 북에서 겪은 작가적 고립, 한국전쟁 중의 피란 생활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셋째는 나이 마흔밖에 안 되는 생애 마지막은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다섯 차례나 드나들었고 끝내는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이했다. 화가인 그가 유석진 박사의 미술 치료를 받으면서 희미한 전기스탠드를 서툰 필치로 그린 그림을 보면 가슴이 저려온다.

불볕더위보다 더 뜨거운 ‘이중섭 열기’ - 이중섭 열기가 주말을 뜨겁게 달궜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를 보기 위해 5일 오후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만 4205명이 찾았다. 현충일인 6일도 개관한다.
불볕더위보다 더 뜨거운 ‘이중섭 열기’ - 이중섭 열기가 주말을 뜨겁게 달궜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를 보기 위해 5일 오후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만 4205명이 찾았다. 현충일인 6일도 개관한다. /이태경 기자

그런 지지리 복 없는 세월이었지만 이중섭은 자신이 겪은 개인적 어려움과 외로움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캔버스가 없으면 골판지에, 담뱃갑 은박지에, 바다 건너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여백에 자신의 마음을 그렸다. 그 예술적 편린 200여 점이 이번에 성대하게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다시 보아도 이중섭 예술의 본질은 '그리움'이다. 김소월의 시(詩)에 비견할 만한 것인데 소월과 중섭의 그리움에는 큰 차이가 있다. 소월은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면 중섭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기 때문에 더욱 애절하다. 그런 중섭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역시 황혼에 울부짖는 '황소'이다.

이중섭에게도 행복했던 순간은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살던 원산 신혼 시절과 서귀포 피란 시절이었다. 그리고 서른여덟에 첫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모처럼 창조적 예술혼을 불태웠는데 그때 이중섭의 예술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에 처음 공개된 젊고 힘이 넘치는 검은 눈망울의 '황소'이다. 이 두 작품은 이중섭의 자화상이다.
 
‘황소’(1953~1954년) 두 점. 배경에 쓰인 붉은색이 조금 어두운 오른쪽 작품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황소’(1953~1954년) 두 점. 배경에 쓰인 붉은색이 조금 어두운 오른쪽 작품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그의 은지화(銀紙畵)에는 역시 외로움, 그리움, 그리고 거의 병적인 자학이 절절하다. 팔다리가 묶인 군상들, 게 한 마리를 끌고 다니는 귀여운 아이,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짙은 포옹, 입술을 꽉 깨문 키스 같은 그림은 아주 작은 철필 스케치이지만 가히 명작이라는 탄사가 절로 나온다.

전시장에서 여러 미술관 관장을 만나 중섭의 예술에 대한 감상을 교감하였는데 대화 끝에는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 전시 디스플레이가 언제 이렇게 발전했느냐는 찬사였다. 정말 환상적이다. 백 년 전에 세워진 석조건물에 백 년 뒤 후손들이 이중섭이라는 '백년의 전설'을 이렇게 장식하고 있는 것을 천상의 중섭은 지금 보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묻고 싶어만 진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6년 10월 3일까지]

▲입장료: 성인 7000원(덕수궁 입장료 1000원 포함), 유치원 및 초·중·고교생 4000원

▲문의: (02)522-3342, www.jungseob.com

20160606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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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백년의 신화] [내가 본 이중섭] [2] 고은

시대에 아파했던 '순결한 童心'을 다시 한 번…


고은 시인

고은 시인


대향(大鄕) 이중섭을 기리는 몇 마디야 으레 운성(暈城) 구상(具常)이 맡아오던 지난날들이 생각난다. 그런 운성의 곡진한 우애가 아직 이 세상의 것이라면 이번의 진지한 이중섭 회상전에도 그이가 나서리라.

내가 그런 운성을 대신하는 까닭은 각별하지 않다. 1950년대 전후의 명동 밤거리에서 딱 한 번 본 대향의 인상이 있다. 무슨 일로 공초(空超) 오상순 옹과 통금을 앞둔 밤중에 거처인 조계사로 돌아가는데 얼굴 한쪽에 흙을 잔뜩 묻히고 어슬렁거리는 헌칠한 키의 예술가가 나타났다. 공초가 가만히 말하기를 "흐흐 이중섭이 제 안면에 명작을 남겼군."

그런 이색(異色)의 인상 때문이었는지, 그 후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목숨을 다한 며칠 뒤에야 어느 조간신문에 그의 사망 소식이 있었는데 그 무렵부터 운성을 통해서 들어온 이중섭의 예술과 삶의 단편들 때문이었는지 내가 시작한 평전 쓰기 가운데서 한용운, 이상에 앞서 첫머리로 이중섭 평전을 연재, 출판하게 됐다. 이중섭 평전은 바로 중판을 거듭했고 영화화되어 박근형이 이중섭 역할을 맡았다.

그로부터 어언 40년 세월, 이중섭이 국민적인 애호의 대상이 되어온 것과는 달리 그는 나에게는 점점 하나의 익명이 되었다. 그런 나머지 때마침 고려인 화가 변월룡전의 벽력같은 충격에 이은 이중섭의 대기획전이 현대 한국 미술의 한 절정을 증거하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이중섭의 천진난만의 고뇌를 만나고 있다.
이중섭이 1954년 그린 유화‘싸우는 소’.
이중섭이 1954년 그린 유화‘싸우는 소’. 두 마리 소가 온 힘을 다해 싸우는 모습에서 죽을 힘을 다해 역경을 헤쳐나가겠다는 이중섭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식민지 말기와 한국전쟁 직후의 한계 상황에서 만들어진 그의 순결한 내상(內傷)은 그것이 순결할수록 결코 쉽사리 넘겨버릴 수 없는 비운과 축복의 역설을 교차시킨다. 그의 동심(童心)은 현실의 각박함과 야비 앞에서 한없이 약화됨으로써 도리어 현실의 내성(耐性)을 이룬다. 그럴 경우 그의 예술가적인 방황은 거의 의도된 불치병에 가까운 자학의 유희를 거듭한다.

 

가족의 우화가 산산조각 나고 전쟁의 후방에서 화실 작업은커녕 하룻밤의 숙박도 얻지 못하고 떠돌아야 하는 부랑(浮浪)의 시절에 그의 미학은 담뱃갑 은박지에서 살아난다. 그것은 얼핏 보아 소꿉장난이요 다시 보아 천부적인 근원성의 암각화를 일구어낸다. 아니 때로는 굶주리는 날 상상한 바닷가 낙원도 아끼고 아꼈던 물감을 마지막으로 풀어 그려낸 것이다.

그런 중에도 어느 때는 생계 보장이 되는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도 사절해버리는 화도(畵道)의 본분을 지켜내기도 한다. 나중에는 신화나 전설이 되고 싶어 했던 가족애마저도 현해탄의 이산 형태로 되어버린 고독으로 시대의 임시 환경을 견디어 낼 뿐이다. 이중섭 예술의 아픈 경지가 이 같은 상황의 꽃으로 피어난 것에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이제껏 연민과 찬탄 속에서 이중섭의 실재를 기억하는 일 없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더러 괜히 이중섭의 그림값만 천정부지로 만들어 놓았다고 야유한다. 나는 예술이 피카소적인 충일의 행운 말고 그 반대의 감수성과 예술의 미완성성을 가장 신성하게 거느린 완성 지향의 꿈을 믿는다. 그럴 때마다 이중섭의 화면은 숙연하다. 그의 호 대향은 그가 어느 한 고장의 화가로만 애지중지되는 것을 거부하는 뜻인지도 모른다. 어디로 더 멀리멀리 날아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