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판은 지금 ‘응답하라’ 복고 열풍

등록 :2016-10-02 22:38수정 :2016-10-03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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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판 온통 회고전 일색
흘러간 조류가 최신 트렌드인 모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과천관 중앙홀. 비행선 모양을 한 이불 작가의 대형 설치작품 <취약할 의향>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과천관 중앙홀. 비행선 모양을 한 이불 작가의 대형 설치작품 <취약할 의향>이 보인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차려진 부산비엔날레 프로젝트1 ‘아시아 아방가르드’ 전시장. 출품작인 원로작가 이승택씨의 70년 퍼포먼스 <바람-민속놀이>의 사진과 68년작인 <목구놀이>가 바닥에 재현돼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차려진 부산비엔날레 프로젝트1 ‘아시아 아방가르드’ 전시장. 출품작인 원로작가 이승택씨의 70년 퍼포먼스 <바람-민속놀이>의 사진과 68년작인 <목구놀이>가 바닥에 재현돼 있다.
지금 한국 미술판은 온통 ‘응답하라…’류의 회고전시로 뒤덮여 있다. 지난달 초 격년 국제미술축제인 대형 비엔날레들이 광주, 서울, 부산에서 잇따라 개막한 것을 시발로, 그즈음부터 서울 도심 주요 공사립미술관과 북촌 화랑가 등에는 20~40년 전 미술계 흐름을 되짚는 크고 작은 전시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1970~80년대 세간에서 ‘기행’으로 불렸던 당대 전위작가들의 실험적 퍼포먼스와 설치작업, 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 변화를 예고한 개념적 작업들이 줄줄이 전시장에 불려 나왔다. 국내 미술계는 다수의 서구 유력 기획자, 컬렉터들이 방문하는 가을 비엔날레 시즌을 국내 미술판의 최근 흐름과 작업들의 정수를 내보이는 호기로 간주해왔다. 이런 관행을 고려하면, 현재 회고전 열풍에 담긴 과거 미술 흐름들은 현재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 과시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특장이 되는 셈이다. 지금 생성 중인 작품 콘텐츠보다 흘러간 조류가 가장 내세울 만한 최신 트렌드가 된다는 건 모순이다.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미술판의 복고 열풍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트선재센터의 ‘커넥트1: 스틸 액츠’ 전시장에 재현된 정서영 작가의 과거 설치작품 <꽃>과 <전망대>.
아트선재센터의 ‘커넥트1: 스틸 액츠’ 전시장에 재현된 정서영 작가의 과거 설치작품 <꽃>과 <전망대>.

왜 하지? 아리송한 소장품 잔치

‘과천 비엔날레?’ 8월19일부터 입이 떡 벌어지는 소장품 잔치를 벌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30주년 특별전을 미술판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빈말이 아니다. 86년 과천 본관을 지어 이전한 지 30돌을 맞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는 제목으로 꾸린 전시는 작가 300여명의 소장품과 신작, 각종 아카이브 자료 560여점을 모아 8개 전시장 전실과 복도, 홀 등에서 무더기로 보여주는 전례없는 기획전이다.

미술관 얼굴인 백남준의 대형 티브이 탑 <다다익선> 주위를 밧줄로 얽어맨 이승택 작가의 설치작업과 1층 중앙홀 허공에 비행선처럼 떠 있는 이불 작가의 대형 작품 <취약할 의향> 등을 필두로 ‘해석’(1층), ‘순환’(2층), ‘발견’(3층)이란 세개의 큰 주제 아래 근대기 우리 화단의 거장들부터 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원로·중견·소장 작가들, 국외 거장들의 작품들이 다기한 세부 주제로 얽혀 선보이는 중이다. 건축가들의 미술관 공간 변형 프로젝트 전시와 미술관 건립 이전·이후의 역사를 돌아본 ‘아카이브 프로젝트-기억의 공존’까지 덧붙여져 1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소전시들이 전관을 가득 메웠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용익 작가의 개인전 전시장. ‘땡땡이’로 불리는 80~90년대 그의 비판적 모더니즘 연작들이 내걸렸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용익 작가의 개인전 전시장. ‘땡땡이’로 불리는 80~90년대 그의 비판적 모더니즘 연작들이 내걸렸다.
지난겨울 개수공사에 들어갔던 서울 북촌 아트선재센터도 회고전으로 전시 재개를 알렸다. 98년 창립 이후 초창기 전시를 수놓았던 이불, 정서영, 김소라 등 여성 작가 3명의 과거 전시작들을 재현하는 ‘커넥트1: 스틸 액트’전이다. 미국 뉴욕 모마미술관에서 전시 중 철거됐던 문제작으로, 부패하는 생선을 장식해 투명가방에 넣은 이불 작가의 <장엄한 광채>와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작인 사이보그 조형물, 수영장의 전망대와 스티로폼으로 재현한 꽃 등을 놓은 정서영 작가의 개념적 설치작업, 김소라 작가의 책 라이브러리 작업 등이 새로 재현돼 나왔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아트선재센터 등
미술관의 소장품, 대가 회고전 잇따라
비엔날레는 아시아 아방가르드,
화랑가도 70~80년대 실험미술 회고전 일색

국내 현대미술의 대표공간으로 꼽히는 두 기관의 소장품 회고전을 두고 미술계는 뜬금없다는 반응들이 많다. 과천관 쪽은 소장품의 시대적 배경, 생애와 운명에 대한 재해석을 강조했고, 아트선재 쪽은 소장품을 현재적 관점으로 살피면서 새 담론을 촉발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왜 이 시점에 소장품전을 해야 하는지, 새로운 재해석이 어떤 것인지는 두 전시에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과천관은 신설된 서울관에 관객수가 밀리면서 새 정체성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특별전은 소장품 물량 과시에만 치중해 과거 역사에 대한 성찰과 전망 모색은 미진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과거 미술사조나 대가들 작품들을 돌아보는 복고 흐름은 다른 미술관들도 비슷하다.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은 중견작가 서용선씨의 80년대 이후 드로잉 회고전을 8~9월 치렀고, 경기도미술관은 원로·중견 대가들의 집단회고전 격인 개관 10주년 ‘기전본색’전을 최근 시작했다. 서울시립미술관도 올 연말에 90년대 한국 미술의 변화상을 살피는 ‘응답하라 1990’전을 열 계획이어서 미술관의 ‘응답하라…’ 바람은 내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30년 전 실험미술을 띄워라

70~80년대 실험미술과 당대 아시아 전위(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재조명은 최근 복고 트렌드의 단적인 특징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의 비엔날레 프로젝트 1 ‘아시아 아방가르드’전은 김찬동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장의 기획으로 60년대 이래 90년대까지 한·중·일 전위미술의 흐름을 실물 작품들로 선보였고, 화랑가도 이건용, 김구림 등 한국 실험미술 원로작가들의 재조명 전시가 유례없이 활기를 띠고 있다.

갤러리 현대는 이건용 작가의 70년대 논리적 퍼포먼스를 조명하는 ‘이벤트-로지컬’전을 통해 합판을 잘라내며 선을 긋는 신체드로잉과 관련 사진, 설치작품들을 전시 중이다. 아라리오 갤러리도 당대 전위미술의 산증인인 김구림 작가가 최근 인명경시 세태를 비판적으로 조형화한 신작전을 차렸다. 일민미술관은 국제갤러리 후원으로 70~80년대 단색조회화 진영에서 떨어져나와 비판적인 모더니즘 추상작업을 펼쳐온 김용익 작가의 회고전시를 마련했고, 국제갤러리는 요절한 추상화가 최욱경(1940~85)의 미국 시절 구작전을 여는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부산 비엔날레처럼 동아시아, 동남아의 과거 전위미술사 기획전을 2018년 한국, 일본, 싱가포르 국립기관과 협업해 열 계획이다.

새 흐름, 젊은 작가는 외면…단색조 그림 이어
대체상품 띄워보려는 상업적 의도
새 담론 새 지형 만들 역량 안 보여
퇴행적 양상 두드러진다는 우려도

문제는 이런 일련의 전시들 대부분이 새로운 각도의 비평적 관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존 작품들의 나열과 담론들 재연에 그치는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박영택 평론가는 “각광받는 원로 실험미술가들이 90년대 이후엔 돋보이는 신작 등을 내놓지 못하고 기존 작업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러왔는데도, 과거 작품만 계속 부각시키는 화랑가 전시들은 과잉 조명이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갤러리 현대 지하층에 재현된 원로 전위작가 이건용씨의 70년대 설치작업.
갤러리 현대 지하층에 재현된 원로 전위작가 이건용씨의 70년대 설치작업.

시장에 끌려가는 미술판

화랑가의 실험미술 띄우기는 최근 단색조 회화의 열기를 이어갈 대체상품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미술판 자체가 이런 의도에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사실 미술판이 회고전 일색으로 재편되는 양상은 2000년대 이후 더욱 강화된 경매와 아트페어 같은 미술 시장의 영향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세계 미술계 흐름이 과거 미술의 전개 양상을 복기하면서 담론과 시장에서 새 전망을 모색해온 것과도 연결되지만, 한국은 판의 흐름을 끌어갈 미술관, 평단 등의 인문적 역량이 소진돼 이런 복고 추세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새로운 틀거지의 재해석과 담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특정 화랑들이 ‘짬짜미’에 가까운 의도적인 복고 몰이를 하는데 미술관들이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의 경우 비엔날레 전시 중인데도 시쪽이 관객 확보를 내세워 블록버스터 전시인 이중섭 회고전을 추가 유치하고, 20일부터 넉달간 치르기로 확정해 뒷말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한 중견기획자는 “복고를 선호하는 미술자본의 전략이 한국에서는 더욱 노골적이고 천민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라며 “급변하는 미술지형 속에서 미술관, 화랑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과 혁신적인 대안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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