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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동해시의 문화재와 명승지
보물 제1292호
- 1998.12.18
- 통일신라
- 무릉로 584(삼화동)
- 문화예술센터(☎033-530-2441)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시멘트로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국가지정문화재 ]삼화사삼층석탑
보물 제1277호
- 1998. 4. 6
- 2중 기단 3층 석탑
- 통일신라시대(9세기 말엽)
- 무릉로 584(삼화동)
- 문화예술센터(☎033-530-2441)
삼화사에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지정문화재 ]삼화사
- 전통사찰 10호
- 1988. 5. 28
- 무릉로 584(삼화동)
- 삼화사(☎534-7661)
삼화동 무릉계곡, 두타산(1351m)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삼화사는 인근 천은사 .영은사.지상사 등과 더불어 영동 남부지역의 가장 중심적인 사찰로서 선종의 종풍을 가진 깊은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삼공암, 측연대, 중대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절과 관련하여 세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삼화사사직〉 .〈진주지〉등에 의하면, 이 절은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지장율사가 흑연대를 창건하여 그 시초가 되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한편〈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말 굴산사의 개창주인 범일국사가 〈척주지〉에는 신라 흥덕왕4년(829)에 범일국사가 산에 들어와 불사를 지어 삼공암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와 아울러 현존하는 유물들을 감안하면 삼화사는 대체로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절은 본래 동쪽 약 1.3km의 반릉 부근에 있덨던 것을, 사찰을 포함한 인근지역일대가 1977년 쌍용양회 동해 공장의 채관권내에 들어가자 무릉계곡내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여러 가지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삼화사는 고려 공민왕 16년(1367) 풍우로 퇴락된 것을 란옹스님이 중건하였으며, 조선 선조년간에 왜군들의 방화로 전소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지금의 중대사터로 이건하여 중대사로 불리었다가 영조24년(1748)에 다시 구지에서 중건되어 삼화되어 삼화사로 하였다. 선조20년(1820) 절과 부속암자들이 전소되었다가 1824년에 조회염스님이 중건하였다. 1929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정원용.이기연 등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여 중건하였으며, 1869(고종6) 화운과 덕추스님이 단청하였다. 1873년 (고종 10)에 신당, 1896년에 승당이 건립되었다.
이와같은 여러차례의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창을 거친 삼화사는 1905년에 삼척지방의 의병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으며, 1906년 일본은 의병의 거점파괴라는 이유를 붙여 대웅전, 선당 등 2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 이듬해인 1908년 대웅전, 요사채, 칠성당 등을 다시 건립하여 유지해오다 1977년에 개발지역에 편입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삼화사의 구지에는 당시의 건물지와 기단축대, 초석일부가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고려~조선시대의 기와편과 백자 등의 유물들이 산재되어 있다.
현재의 삼화사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범종각,육화로,천왕문,요사채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문화재로는 삼층석탑과 철불, 목조지장보살상, 부도 및 비가 있다.
[강원지방문화재38호]동해척주비
동해 바다에 연해 있는 강원도 삼척을 가면 삼척시와 그 이웃한 동해시 주민들이 매우 신성시 하며 보물로 여기는 한 비석이 있다.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인 ‘척주동해비’ (陟州東海碑)가 그것이다.
척주동해비를 세운 미수 허목
척주란 삼척의 옛 이름으로 이 비석을 세운 이는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미수(眉?) 허목(許穆, 1595년, 선조 28∼1682년, 숙종 8). 허미수는 60세가 넘도록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뒤늦게 관직에 오른다(최초 관직 사헌부 지평, 63세). 사헌부 장령(64세)을 하던 1660년, 조선조 17대 임금인 효종이 붕어(1659년)한 후 인조(16대)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服喪)문제로 우암 송시열과 맞서 논쟁을 벌였다.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송시열은 효종이 차남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조대비는 1년상만 입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허미수 등 남인은 효종이 차남이어도 대통을 이어 왕위를 계승했고, 종묘의 제례를 주관한 사실상의 종통이므로 3년 복상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며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허미수는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퇴조비(退潮碑)를 세우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미수는 향약(鄕約)을 만드는 등 백성을 교화하며 여러 치적을 쌓아 목민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2년간의 짧은 부임 기간 중에 역사에 길이 남을 치적의 하나로 척주동해비를 건립한다.
당시 삼척에는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미수는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극치를 담은 오묘한 문장인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글)을 짓고는 그가 개발한 독특한 전서체(篆書體)에 담아 비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다.
비(碑)를 세운 이후 수마가 물러가고 바다가 잠잠해지다
허미수가 척주동해비를 세운 이후 신기하게도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 비석과 비문의 신비한 위력에 놀라 이 비를 퇴조비로 부르기도 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미수 선생이 비석을 세운 곳은 정라진의 만리도(萬里島, 지금의 큰 방파제 끝부분)였다. 그런데 48년 뒤인 1708년 누군가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한다. 한편 김구용이 지은 『척주지』(1848년)에 의하면 1708년 비석이 파손되자 조수피해가 다시 일어나므로 당시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허미수 선생의 문하생(門下生)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개각을 했으며, 1709년 2월에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竹串島) 동쪽 산록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후 이 비석은 259년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오다가 비각의 위치가 음지라 훼손의 염려가 있어 1969년 12월 6일 지방 유지들이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현재의 삼척시 정상동 죽관도(현재의 육향산) 산정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장차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다”
금석문 연구가들에 의하면 척주동해비문의 글씨는 허목 선생의 전서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글씨라고 하는데, 특히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창적인 서체로 품격 있고 웅혼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비문의 신비한 힘이 알려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비문을 탁본하여 소장하였는데, 소장한 사람들이 물과 수재로부터 보호되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이 비문이 모든 재액을 물리치고 소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하며 가정의 안녕과 번창을 보장해 준다는 믿음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삼척시청 문화공보담당관실 안내문의 내용).
그런데 취재진은 현지 답사를 통해 이 비를 처음 세운 허미수 선생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입을 타고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때는 이곳을 떠나라. 앞으로 불로 난리가 난 후에 물로 큰 난리가 있다.”(척주동해비가 있는 육향정 아래 육향식당 주인 김성근씨 증언, 42세)
장차 불과 물의 대개벽을 예고한 허미수의 놀라운 통찰력
2000년 4월 강원도 고성, 강릉, 삼척 등 영동지방에는 사상 최악의 산불이 발생하여 수많은 이재민을 발생시키고 수만 핵타르의 산림을 황폐하게 만드는 대사건이 있었다. 지금도 영동지역의 전주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 산불은 그러나 삼척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허미수 선생의 전언에 비추어 보면 개벽을 알리는 작은 예고탄에 불과할 뿐이다.
취재진이 만난 박남언 씨(68세, 삼척시 정상동 3통 1반, 전 어촌계장)는 자신이 이곳에 살면서 경험한 바를 잘 말해 주었다. 10년 전 북해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TV 뉴스를 보았는데 2시간 반만에 이곳 삼척에 해일이 닥친 것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는 것이다. 해일이 몰려오면 오십천에서 흐르던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역류하여 들어와 시내로 물이 넘쳐흘렀다는 것이다.
무릉계곡 명승지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명승지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우는 무릉계곡명승지는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계곡으로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마치 현존하는 선경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태고의 신비와 전설 속에 무릉계곡명승지는 이 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관광명소이다.
고려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때에 삼척부사로 재직 하고 있던 김효원이 제명 하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무릉계곡명승지는 수많은 관광객을 도취시키며,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명승지로,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삼척부사나 토포사들의 이름이 각각 10명 이상 새겨져 있다.
[강원도지정문화재 ]해암정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제자를 가르치며 생활할 때 지은 정자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 짓고,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언광이 다시 지었다.
심동로는 어려서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제자를 가르치며 생활할 때 지은 정자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 짓고,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언광이 다시 지었다. 심동로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는데, 고려말의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다가 권력을 잡고있던 간신배들이 마음에 들지않아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왕은 그를 말렸으나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결국 허락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을 제외한 3면은 모두 4척 정도의 높이까지 벽을 만들고 모두 개방하였다. 이곳에는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들러 남긴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라는 글이 남아 있다.
[강원도지정문화재 ]용산서원학규현판
용산서원〈龍山書院〉은 조선 숙종〈肅宗〉31년(1705) 삼척 부사 이세필〈李世弼 〉이 창건하여 교학에 힘썼으며, 그 뒤 여러번 중수되어 오다가 고종〈高宗〉 5년( 1865) 대원군〈大阮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철폐〈撤廢〉되었던것을 1966년 이 고장에서는 유서 깊은 서원〈書院〉이라 하여 이곳 사림〈士林〉들에 의하여 1966년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서원 내에 보존되어 있는 유물로는 이세필〈李世弼〉의 흥학비〈興學碑〉 1기와 용산서원학규현판〈龍山書院 學規縣板〉이 있다. 학규현판은 피나무판으로 가로 156㎝, 세로 48㎝의 크기이며 1705년 이세필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삼척의 흥학을 위하여 용산서원을 창건하고 학규〈學規〉 21조를 제정하여 이것을 수서〈手書〉하여 판각한 것으로 오 늘의 교칙〈校則〉에 해당되는 것이다. 글씨는 해자〈楷字〉로 종서〈縱書〉하였고 이것을 음각〈陰刻〉하여 교생들이 지키도록 문에 걸어 놓았고 표제를 학규라 하였다. 후 기에 위 용산서당 학도〈爲 龍山書堂 學徒〉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서원 에서 글공부하는 원생이 지켜야 할 사항을 기록하였다.
향교는 관학〈官學〉인 탓으로 그 규범이 일정한데가 있으나 서원은 사학〈私學〉인 탓으로 사학 나름의 성격이 이 학규에 나타나 있다. 말미에 "숭정후제이 을유육월일 월성이세필 위용산서당 학도근서〈崇禎後第二 乙酉六月日 月城李世弼 爲龍山書堂 學徒謹書〉"라는 기록이 있어 연기〈年記〉가 확실하다.
[강원도지정문화재 ]심상열가옥
건립된지 250여년된 가옥으로서 안채와 사랑채 곳간에 의해 ㅁ자 배치를 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겹집의 팔작기와지붕 양식으로서 우측에 부엌 을 두고 전열에 아랫방, 윗방, 후열에 안방, 도장이 있다. 안방에는 안마당을 향 한 광창이 있으며, 안방과 도장 사이에 외짝 여닫이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안방을 식당방으로 사용하고 있고, 윗방 에는 원래 고방쪽 벽에 네짝 장지문으로된 벽장이 있었다.
윗방은 상노인이 거처하였으므로 측면에 툇마루와 함께 두짝 여닫이 궁판세살문이 있고, 안채 외부출입을 위한 작은 협문이 큰대문 옆에 있다. 도장 방 바닥은 마루널, 벽체 하부는 판벽, 상부는 흙벽으로 마감하고 흙벽의 중앙에 봉창이 있다. 안채의 뒤쪽 마당에는 도장방 측면 벽 담에 연결되게 협문이 두짝 판문으로 되어 있다. 부엌은 시멘트 바닥에 상부 회벽, 하부 판벽구조이며 안채는 5량가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시멘트 몰탈마감 기단에 툇마루를 두고, 아랫사랑과 윗사랑이 외짝 여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방의 뒤쪽으로는 벽장이 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중문간의 주출입 대문간이 있고 이어서 마구간이 곳간이 ㄱ자로 꺾어져 연결되며, 사랑채 좌측과 안채 사이에 는 부엌 출입의 대문간과 행랑방이 자리하고 있어 ㅡ자의 안채와 ㄷ자의 우진각 지붕 사랑채가 연결되어 완전한 ㅁ자 배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본채에서 우측으로 15 m정도 떨어져 대나무숲에 둘러싸인 곳에 합각판이 있는 맞배지붕에 벽체는 흙벽 위 시멘트 몰탈 마감되었으며, 전면은 두짝 여닫이 세 살문으로 된 사당이 있다.
- [강원도지정문화재 ]김형기가옥
김형기〈金炯祺〉가옥은 김형기씨의 11대조부터 살기 시작한 터전으로써 172 6년에 본 가옥을 건축하였으나, 많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최근에는 1922년 개·보수를 행하였다. 안채와 사랑채로 ㅁ자 배치를 하고 행랑 과 대문간으로 다시 별채를 구성하고 있다. 안채는 전면 4칸, 측면 2칸의 겹집 형태로 우물마루 대청을 중심에 두고 좌측에 도장과 안방을, 우측에 새방과 건넌방이 있다. 안방 방바닥은 마루보다 5㎝ 낮게 깔려 있으며, 안방 측면대청에는 도장방 이 있는데 도장은 생활에 필요한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대청마루에는 가묘 가 있다. 새방에 이어서 건넌방이 있는데 이곳은 선반과 함께 책,의관 등을 보관하 는 벽장이 있고, 큰 마당으로 통하는 외짝 여닫이 세살문 + 용자창으로된 측면 창 호와 외짝 여닫이창이 있으며, 일반 민가에서 볼 수 있는 코클이 아직 남아 있다 . 또 안마당을 향한 부엌벽에는 두등불이 있었던 공간이 있어 이 가옥에는 강원도 산간 지방의 서민적 생활을 위한 설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대청 의 중간 전면 기둥만 원기둥으로 하고, 상부에 보아지를 걸고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또 아랫방 전면에 T자형의 담이 흙벽과 빈지로 벽체를 만들고, 상부에는 당와와 기와를 얹었다. 이 담은 남, 녀의 공간을 명확 히 하여 우측은 남자, 좌측은 여자들의 생활 공간이 되고 있다.
[강원도지정문화재 ]동해어달산봉수대
봉수는 연기나 불빛으로 변경지방의 상황을 중앙에 알리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이 어달산 봉수는 2000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연대 밑에서 네모꼴의 기단이 잘 남아 있었고, 연대를 둘러싼 호 안쪽에는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돌을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어달산 봉수는 고려시대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어졌다가 후대에는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통신시설로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서울의 남산에 있던 목멱산 봉수까지 연락 되도록 시설된 봉수대들 가운데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신호방법은 연기나 불빛의 숫자가 정해져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멀리 나타났을 때는 둘,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셋, 적이 국경을 넘어서면 넷, 적과 아군이 교전을 하면 다섯이었다.
이 어달산 봉수는 남쪽으로는 삼척의 광진산 봉수에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강릉의 오근산 봉수에 연결되어 있다.
[강원도지정문화재 ]송정동 철기시대 유적
송정동 유적은 동해항으로 흘러드는 전천(箭川) 북쪽의 해안사구지대에 위치하는 동해안 최대의 철기시대 유적이다. 유적의 전체 범위는 약 41만㎡로 추정되나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으므로 문화재로 지정하는 구역은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확인된 일부 지역이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4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996년 관동대학교박물관이 유적의 남쪽부분인 동해항만 확장공사부지에서 집자리 4기를 조사하였으며, 이중 1호 집자리에서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와 함께 관옥, 곡옥, 유리구슬, 은제귀걸이 등 일반인들이 소유할 수 없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의 지배계층 집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이어 1999년과 2000년에는 강릉대학교박물관이 유적의 중간부분인 송정중심도로 건설지역에서 각각 철기시대의 집자리 45기와 9기를 발굴조사하여 송정동 일대가 대규모의 철기시대 취락이었음이 밝혀졌다.
2004년 6월에는 강원문화재연구소가 이번 지정구역 중 일부지역(국민임대주택 건설예정부지)을 시굴조사하여 집자리 약 35∼ 40여기, 원형유구 5∼7기, 적석유구 2기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유적에서 철기시대의 문화층이 현 지표로부터 약 35~150cm 깊이에서 3개층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였고, 철기시대 문화층 아래에는 신석기시대의 문화층이 존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유적의 시기는 출토된 유물과 집자리의 중첩관계, 문화층의 양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유적의 시기 폭이 비교적 크지만 중심연대는 대략 기원후 2~3세기로 추정된다.
이처럼 송정동유적은 동해안의 철기시대 유적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발굴지역에서 나타난 유구의 밀집도를 고려할 때 전체 취락의 규모가 약 1,6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규모는 집단 취락지의 범위를 넘어 사서(史書)에 나오는 실직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중요한 마을유적이라는 점에서 지정·보존가치가 크다.
[강원도지정문화재 ]동해 이로동 기와가마터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에 지어진 조선시대 석축산성.
1414년(태종 14)에 축성된 것으로 천연적으로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지어진 산성이다.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하여 견고하지는 않으나 산의 지형이 험준하여 천연의 요새이다. 현재는 두타산 중턱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함경도로 후퇴할 때 조선의 군사와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3일 만에 함락되었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두타산은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이곳에 머물면서 ‘동안거사(動安居士)·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라 자칭하고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이라고 전한다.
두타산성은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내의 두타산 중턱에 위치한 높이 1.5m 둘레가 2700m이나 되는 여러개의 돌로 쌓아 만든 석성으로 신라 파사왕 23년(102년)에 축조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산성밑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남북 15리 절벽 사이에 도령시켜 많은 군대가 있는 것처럼 위세를 보였으나, 같은 해8월 왜군들의 주력부대를 만나 비밀통로가 탄로나 백복령을 넘어 우회 침공하는 적에게 함락당하였다.
전투중 많은 병사가 흘린 피가 내를 이루어, 지금의 삼화동 입구의 신흥에서 흐르는 물과 무릉계곡에서 흐르는 물의 합수지점의 깊은 소에, 붉은 피가 가득하여 '피가 고였던 소, 즉 피소'라 하였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자갈로 메워져 없어졌다.
두타산성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두타산 정상 쪽으로 200M쯤 등산로로 올라가면, 서쪽으로 가는 갈대 밭 사이로 난 소 등산로가있고 바로 내려서면 작은 계곡과 아찔한 절벽을 만난다. 이 절벽 아래로 계곡물이 흐르며 산성 12 폭포라고도 한다.
이 폭포는 등산로에서는 볼 수 없고 접근이 어려우나 등산로에서 서쪽으로 조금 나가면 폭포가 보이는 절벽 끝에 서게 되는데 이곳에서 폭포의 상부 쪽의 장관을 볼수 있다. (안내 표시 없음)
산 정상 계곡쪽으로 작은 폭포가 2-3 곳이 소를 이루어 경관이 좋다. 이곳에서 길이 없는 서쪽 갈대밭을 지나 10 M 정도 나가면 두타산 정상으로 향하는 옛 등산로를 만난다.
이 등산로를 따라 20 M 정도 올라서면 여기서부터 원형이 잘 보존된 석성을 볼 수 있다. 돌이끼가 까맣게 씌워진 산성이 산기슭을 따라 산 마루로 연결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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