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를 찾아서... 아니 '다른 삶'을 찾아서
산중에서 혼자 무술 수련을 하는 사람을 만나다
지리산에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하얀 눈구름이 지리산 왕시루봉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더니 이내 산마을 전체에 눈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오늘(29일) 아침 산중에서 무술 수련을 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서 아는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산중에서 혼자 무술 수련을 하는 사람이라…' 호기심에 취한 나는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일반 차량은 올라갈 수 없는 길이어서 우리는 사륜구동형 트럭을 타야 했다. 트럭은 아스팔트에서 콘크리트로, 다시 자갈길로 이어진 길을 달려갔다. 다시 길은 흙길로 이어졌다. 그리고 더는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이 나왔다.

▲ 산길로 접어 들자 멀리 집 한채가 보였다.
ⓒ 조태용
거기부터는 이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폭 좁고 가파른 등산로가 이어졌다. 산 능선 하나를 넘어가자 멀리 집 한 채가 보였다.

▲ 산속에 집은 아궁이를 불을 지피고 촛불로 생활을 한다고 했다.
ⓒ 조태용
'문명이 만든 것들과 단절된 생활은 어떤 것일까?' 이런저런 호기심이 그 집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불꽃처럼 일어난다. '도대체 저기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기척이 느껴지자 "누구시오"라는 말이 방안에서 들려왔다.

지인은 "네 접니다"라고 했고, 그는 반갑게 문을 열고 방안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방안 가득 포근한 붉은 기운이 느껴졌다. 태양이 눈구름에 가려 있어 촛불을 켰다고 했다. 방안에는 촛불 두 개가 익숙한 전등을 대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방안에 사물이 모두 희미했으나 이내 익숙해졌다. 아마 산골 생활도 그러하리라.

그는 나와 비슷한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산에 들어온 이유는 무술수련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무술 수련과 함께 밤 0시부터는 새벽 3시까지 바위에서 명상을 한다고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방안에 전등이 보였다. 태양열 전지판으로 하루에 2시간 정도 불을 켤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촛불을 켜고 생활한다고 했다. 초 두 개로 일주일 정도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휴대폰 통화는 가능하지만 휴대폰은 없다고 했다. 산으로 들어오면서 가져오지 않았단다.

▲ 초는 일주일 정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 조태용
그는 우리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사람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반갑기도 할 것이다. 그는 차를 대접했다. 향이 좋은 녹차였다. 아마 산중에 맑은 물로 끊인 차여서 더 맛이 좋은 것 같다.

그는 지금 민족무예를 연마한다고 했다. 20년 정도 무술 수련을 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한다. 그는 민족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더불어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도 아주 해박했다. 하지만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산중에서 혼자 살지만 편협하지는 않았다.

나도 한때는 산중에서 혼자서 살고 싶어하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처음 지리산 종주를 했을 때쯤부터 산 속에서 혼자 생활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부럽기도 했다.

혼자 산 속에서 살기에 돈도 필요 없다고 했다. 가끔 아는 분들이 식량을 보내 주기도 하고 얼마간의 돈으로 구입하기도 한다고 한다. 난방은 산중에 아궁이를 사용한다. 산에는 나무가 많아 나무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온돌방은 아주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물은 산에서 흘러오는 물을 마시면서 살고 있었다.

▲ 지리산 산 마을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조태용
나는 차가 없는 그가 구례읍에 나가서 물건을 구매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집을 떠난 그는 산길을 걷고, 다시 흙길을 걷고, 자갈길을 걸어 콘크리트 포장 길을 걷다가 아스팔트를 만난다. 이렇게 집에서 버스를 타는 곳까지 걸어 내려와 버스를 기다려 산을 빠져나와 구례읍에 도착한다.

그리고 시장에 갔다가 다시 그 짐을 지고 버스에 내려서 가파른 아스팔트 콘크리트길 자갈길 흙길, 그리고 산길을 짐을 지고 다시 산 속으로 향할 것이다. 그가 들고 나는 길은 길의 역사와 문명의 흐름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문 밖으로는 눈이 내렸고 바람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해주는, 수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렸으나 그가 말하는 세상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더 이상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거의 돈을 쓰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한다. 이런저런 시테크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몇 년 전에는 '아침형 인간'이라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시간을 좀 더 많이 사용해서 돈을 챙기는 인간이 최고의 인간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점 한 모퉁이 그때 나온 책들이 주인을 찾지 못해 쌓여 있지만 말이다.

▲ 집 앞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다.
ⓒ 조태용
그는 산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쇼핑도 하지 않고 특별하게 매달 내야 할 돈도 없다. 그러니 돈도 들지 않는다. 그는 그냥 산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하며 산다.

물론 그도 매일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돈을 벌어 무엇인가를 해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생각해 보면 돈을 벌지 않고도 시간만을 투자해서 행복해지는 일도 있다.

세상엔 많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그가 살고 있는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 그래서 세상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눈 쌓인 길이 꽤 미끄러웠다. 차를 타고 내려오다가 더 이상 차를 움직일 수가 없어 산길에 차를 그대로 두고 걸어서 내려왔다.

산마을에는 눈이 소복하게 내려 있었다. 우리는 전기와 전화가 있고 차로 갈 수 있는 길로 걸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산중에 남았다. 나는 산중에 있는 그가 부러웠다. 하지만 그는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리산 산중에서 그와 보낸 시간이 추억으로 남았다. 여전히 지리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리산 기슭에 서린 천년의 향기에 취해
'제11회 하동 야생차 축제'를 찾아서
정호갑(mos0805) 기자
▲ 하동 야생 녹차밭.
ⓒ 정호갑
녹차를 마시니 커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스스로 녹차 체질이라 여기며 차를 가까이 하고 있다.

이렇게 멋모르고 차를 마시기 시작한지 20년이 흘렀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행복하다. 커피와 달리, 차는 함께 마셔야 제 맛이 난다. 물을 부어 식히고 그리고 우러나오길 기다리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나와 같은 생각에 흐뭇하고, 또 나와 다른 생각에 나의 부족함을 메운다. 주위의 벗들은 우리 집을 찻집이라 불러주며 찾아와 차 한 잔을 나누니 그 또한 고맙다.

그러다 3년 전에 중국에 갔다. 중국은 '차의 나라'였다. 우롱차, 보이차, 말리화차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우리보다 많이 싸서 좋은 차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 좋았다. 이런 나를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면서 걱정 아닌 걱정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차에 욕심을 내어 6개월 동안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차를 사서 가지고 왔다.

3년만에 돌아오니 한국은 '넉넉살이(웰빙)'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맞게 언론에서는 녹차의 효용을 집중 보도하고 있다. 이제 녹차는 차뿐만 아니라 먹거리(식초, 국수, 냉면, 만두, 녹차 삼겹살), 화장품, 목욕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 효용이 끝없이 개발되고 있다.

녹차는 우리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많이 마신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일본 녹차는 빛깔이 탁하여 정이 들지 않고, 중국 녹차는 향과 맛의 깊이가 엷어 손이 가질 않는다. 반면 우리 녹차는 맑은 빛깔에, 은은한 향 그리고 깊은 맛이 좋다.

이런 나에게 '하동 야생차 축제'가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하동 차시배지에서 열린다고 하니 안 가볼 수가 있겠는가? 마침 나의 이러한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직장도 임시 휴일이다. 야생차 축제라는 말에 3년 전의 입맛이 그대로 살아 전해 온다. 녹차의 맑은 빛깔과 그윽한 향이 나의 몸에 스며드는 듯하다.

▲ 하동 가는 길에는 이러한 나무숲 맞뚜레(터널)가 몇 군데나 있다.
ⓒ 정호갑
하동읍을 지나 섬진강에 들어서니 나무 향기, 나무 숲 맞뚜레(터널), 섬진강의 맑은 물결과 하얗고 고운 모래에 마음이 맑아지고 편안해진다. 이렇게 길에서부터 차를 마실 마음의 준비를 마련해 준다.

▲ 하동 야생 녹차를 판매하고 있는 전시장.
ⓒ 정호갑
축제에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다구(茶具), 솟대, 녹차 묘목, 먹거리 장터 등등 둘러보는데, 다정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녹차 전시장에 들려 차를 마신다. 맑은 빛깔, 은은한 향, 그리고 깊은 맛이 좋다. 잊혀졌던 그 맛이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

이곳에서 차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윤권진씨(명성농원 대표)에게 하동 녹차의 특징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하동 녹차는 다른 곳과 달리 야생차이며 그리고 수제차이기에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어떤 맛이냐는 물음에 "은은하고 깊은 맛이라고 할 수밖에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며 웃는다.

오늘은 축제라 평소보다 가격을 싸게 준다는 말에 조금 무리하여 녹차 가운데 가장 좋다는 '우전' 한 통을 샀다. 당분간 중국차를 뒤로하고 그리움에 젖은 하동 녹차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절로 즐겁다. 또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 축제장에서 팔고 있는 하동 재첩.
ⓒ 정호갑
섬진강의 재첩에 발길이 머문다. 간에 좋다기에 다른 곳에서도 많이 먹어보았지만 그 맛이 옅어 잘 먹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먹는 재첩은 그 맛이 진하다. 이른바 '진국'이다. 집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포장을 해 주기에 샀다. 또 택배도 된다고 하여 명함을 받아 두었다.

▲ 영호남 화합의 상징인 화개장터.
ⓒ 정호갑
이렇게 돌다 보니 식사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주위에 들어가 재첩국과 은어로 요기를 하고 다시 둘러본다. 영호남의 화합을 상징하는 화개장터에 들어서니 지리산에서 나는 많은 약초들이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집사람은 둥글레, 벌나무, 헛개 열매, 칡을 산다.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니 나의 건강에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다. 이곳 인심 또한 넉넉하여 말 한 마디만 잘 하면 값도 깎아주고, 덤도 많이 준다. 넉넉한 인심에 절로 넉넉살이가 된다.

▲ 화개장터에 팔고 있는 약초들.
ⓒ 정호갑
하동 야생차 축제에 하동 녹차를 이렇게 소개하여 놓았다.

하동 화개는 우리나라 차시배지로 차 재배에 알맞은 기후와 토질을 갖고 있다. 다경(茶經)에 차나무는 바위틈에서 자란 것이 으뜸이라 했는데 하동의 차나무는 경사진 골짜기의 바위틈에서 자라는 야생의 것들로 직근성으로 뿌리가 곧게 내리기 때문에 옮겨 심으면 죽어 옛날 여자가 시집갈 때 차씨를 정절의 상징으로 혼수 속에 담아 갔다.

맑은 빛깔, 은은한 향, 그리고 깊은 맛에 곧음까지 갖춘 하동 녹차에 취한 넉넉한 하루였다. 나의 삶에는 이러한 녹차 맛이 언제 스며들런가?
<하동 야생차 축제>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하동 차시배지(쌍계사)에서 열립니다. 가는 길도 아름답고 축제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넉넉살이(웰빙)가 절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삶에 묵은 때를 벗기고 마음을 다시 맑게 다스리기 위해 한 번 가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소개합니다.
선비의 기를 마시고 세속의 찌든 때를 씻다
산청 남사 예담촌을 찾아서
정호갑(mos0805) 기자
채우지 않고 비워 두는 남사 예담촌

불혹을 넘겼건만 무엇을 버려야하고 무엇을 채워가야 할지 모르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옛 사람의 삶을 쫓아가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려나?

▲ 평온한 남사 예담촌의 돌담
ⓒ 정호갑
지리산 초입에 자리 잡은 남사 마을. 2003년에 남사 마을이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남사 예담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예담촌이라는 이름은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내온 옛 담의 신비로움, 전통과 예를 중요시 하는 옛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닮아가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마을은 당산이 수룡의 머리이고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가 되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형상으로 쌍룡 교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반달 모양의 마을 터를 배 모양으로 생각하여 마을의 중심부에는 그 무엇도 채우지 않고 우물을 파는 것도 금하여 왔다고 한다. 차면 기울기 마련이므로 늘 조금 비워두는 옛사람들이 지혜가 아직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 평온한 남사 예담촌 :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수룡의 머리이다
ⓒ 정호갑
예부터 이 마을은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던 학문의 고장이므로, 마치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동성의 곡부 마을과 거의 비슷하다고 하여 산도 니구산이고, 마을을 안아 흐르는 강의 이름도 사수이고, 서당도 이동서당으로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

▲ 남사 예담촌 입구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
ⓒ 정호갑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서로 몸을 포개고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 준다.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손꼽아 온 나무로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 곳곳에서 회화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은 마을(현재 340여 명이 살고 있음)에서 나라를 이끌고 학문을 빛낸 많은 인재가 났다. 조선 개국 1등 공신인 이제를 비롯하여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하연,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고 줄곧 병석을 지키고 있다가 숨을 거둔 효자 이윤현, 조선 숙종 때 덕행과 문장이 으뜸으로 명망이 높은 이계 박래오, 그리고 나라 잃은 시대에 나라를 찾기 위해 온몸을 바친 곽종석 등등. 이 마을 출신 현역 국회의원이 6명이나 된다고 한다.

옛 담을 따라 고가와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이영복(49·문화관광 해설사)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동안 묵은 때를 씻고 좀 더 여유롭게 그리고 올곧은 선비의 삶에 다가서고자 한다.

마을을 둘러보고 난 뒤 바로 이웃한 목면시배유지를 찾았다. 이곳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이미 알고 있기에 별 기대 없이 찾은 전시장인데 이영복씨는 목화의 재배에서부터 옷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빠짐없이 정성스레 설명해 준다.

그리고 문익점의 삶에 대해 말한다. 나라를 생각하는 올곧은 마음,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 그리고 관리로서 백성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놓치지 않고 전해 준다. 정성과 자부심이 묻어나는 그의 해설로 문익점이 붓통에 가져온 목화씨가 3알이 아니라 10알이었다는 것을 비롯하여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 솜과 씨를 분리해내는 씨앗
ⓒ 정호갑
여기서 자동차로 40여 분만 가면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구형왕릉이 있다기에 그 곳으로 함께 자리를 옮겼다.

구형왕릉의 신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왕릉이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 가야 왕의 무덤이 왜 이 곳에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해 해설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설을 들려준다.

6세기에 가야는 신라와 맞서 싸우게 되는데, 그 때 전쟁에 참가한 구형왕은 신라에 밀리면서 화살을 맞았다고 한다. 화살을 맞고 피신해 들어온 골짜기가 바로 이곳인데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이 흙 속에 묻힐 수 없어 돌을 덮으라고 유언을 해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가야가 신라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므로 구형왕은 신라에 가야를 양위하고 만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이기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식읍을 받은 이곳에서 5년간 칩거하다 생을 여기에서 마치게 된다.

▲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구형왕릉
ⓒ 정호갑
이 두 가지 설 가운데 어떤 것이 맞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무덤을 구형왕릉으로 추정하는 것은 1789년 유생 민경은이 왕산을 등산하다 갑자기 비를 만나 피하기 위해 왕산사를 찾았는데 대들보 위에 나무 궤짝이 있기에 스님에게 그 궤짝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스님은 "알려고 하지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민경은은 계속 스님을 졸라 마침내 궤짝을 열어 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 구형왕과 왕비의 유품 그리고 <왕산사기>가 있어 이 능이 구형왕릉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구형왕릉의 정식 명칭은 전구형왕릉이다. 구형왕릉 앞에 전(傳)자가 붙은 이유는 구형왕의 능이라는 확증이 없고, 단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왕릉으로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들이 안내판의 구형왕릉 글자 앞에 써 있는 '전(傳)'자를 긁어서 훼손하여 놓았다. 전이라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다.

▲ 전구형왕릉의 안내판 : ‘전’자가 긁어져 훼손되어 있다
ⓒ 정호갑
왕릉은 가로 22m, 세로 7.15m, 일곱 단으로 이루어진 석총이다. 4번째 단에는 높이 40cm, 깊이 68cm, 너비 40c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지만 이것이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둘레에는 돌담이 둘러쳐져 있으며 능 앞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 새겨진 비석과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등이 능을 지키고 있으나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해설사는 이 왕릉에 전해 오는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구수하게 전해 준다. 왕릉 위로는 새도 날지 않고, 칡덩굴도 왕릉으로 뻗지 않으며, 낙엽도 능 안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낙엽이 떨어지면 곧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그 낙엽을 다른 곳으로 날려 보낸다고 한다.

또 인근 마을의 한 부자가 명당자리를 찾아 이곳에 아버지 무덤을 썼는데, 그 아들의 꿈 속에 아버지가 나타나 제발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하였단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냥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또 다시 나타나 갈비뼈가 짓눌러 너무 답답하니 제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기에 할 수 없이 이장을 하기 위해 무덤을 파니 시신의 갈비뼈가 부러져 있더라는 것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도 이야기이거니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눈앞의 펼쳐진 석총의 신비로움, 이 산 이름도 왕산(王山)이고 절 이름도 왕산사(王山寺)이니 왕이 이곳에 살았고 묻혔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닐까?

버리고 비워야 맑고 깨끗해짐을

남사 예담촌으로 돌아와 정몽주의 후손인 정구화씨의 사양정사에서 묵었다. 옛날 고가의 기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가이다. 갑자기 돌쇠에서 대감의 삶으로 올라선 기분이다.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이리 오너라"를 외치는 벗이 정겹다. 평상에 모여 모처럼 맞이한 한가로움에 벗들과 한 잔의 술로 시골의 깊어가는 밤을 보낸다.

▲ 고가의 품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양정사
ⓒ 정호갑
고가에서 나오는 맑은 기운은 지난밤의 취기를 말끔하게 씻어준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돌아가기 아쉬워 다시 대원사로 발길을 옮긴다. 언제보아도 맑고 깨끗한 대원사 계곡과 지리산의 하늘. 비워야 깨끗해짐을 배운다. 버려야 맑아짐을 깨닫는다.

▲ 대원사의 맑은 계곡
ⓒ 정호갑
불혹이 넘어선 오늘에서야 버리고 비워야 맑은 계곡과 깨끗한 하늘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리석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선비의 맑은 기운도 채워 왔으니 그 어리석음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정성이 가득 담긴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깃든 이영복(목면시배유지의 관리소장이며 산청군 문화관광 해설사)씨의 친절한 해설로 많은 것을 배웠고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고마움을 여기서 밝힌다. 이영복 해설사님 너무 고마웠습니다.
2006-06-09 11:53
강원도로 오세요" 산길 물길
장마후 더 청정… 돌피리·꺾지 퍼덕퍼덕

덕풍마을에서 제1 용소로 올라가는 길. 덕풍계곡이 들어있는 응봉산은 비록 소수이지만 ‘마니아’를 갖고 있다. 그들은 매년 휴가를 몽땅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이곳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강릉의 단경골은 놀라운 ‘자연의 복원력’을 보여준다. 태풍 루사(2002년)와 매미(2003년)가 가져다 주었던 만신창이 피해를 스스로 치료하고 청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강원도에는 같은 아픔을 간직한 계곡과 물길이 많다.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원상 회복됐다. 과거 수마에 피해를 입었다가 제 모습을 회복한 지역을 찾아본다면. 올해의 아픔도 반드시 극복된다는 신념과 힘이 생기리라.

# 아침가리계곡(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1999년 이 계곡에 들었었다. 풍광에 홀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를 떠올렸다. 주인공이 머물던 환상세계의 3일은 인간세계의 3년이라 했다. 계곡을 빠져나가면 훌쩍 세월이 흘렀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닐까. 변했다면, 이 곳처럼 변했으면 좋겠는데…’라고 상념에 잠겼었다.

아침가리는 그런 계곡이다. 숲과 물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오지 탐험가들만 간간이 드나들 뿐 일반인은 범접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트레킹을 하는 이들이 늘었지만 지금도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운 골짜기이다.

태풍은 이 골짜기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었다. 계곡에 훤한 마을 사람조차 “집채만한 바위들의 위치가 몽땅 달라져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경”이라고 할 정도였다. 계곡 입구인 진동리로 들어가는 방태천길은 진짜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겨울에 눈 때문에 자주 고립되는 진동리는 태풍 때문에 한여름의 고립을 겪어야 했다.

아침가리계곡의 물은 청정옥수 그 자체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시원해진다.
사람과 중장비가 길을 정비하는 사이 아침가리는 스스로의 회복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떠돌았던 바위들은 제자리를 잡아 적응했고, 뿌리째 떠밀려온 아름드리 나무들은 풍화돼 자연의 색에 합류했다. 지금은 한여름의 눈이 시린 녹음과 그 색깔을 닮은 ‘천하 제일급수’를 만날 수 있다.

아침가리 트레킹은 길을 찾는 작업이다. 길은 스스로 희미해지다가 결국 지워진다. 앞에는 절벽이 가로막고. 그러면 물을 건넌다. 건너편에 이르면 신통하게 다시 길이 이어진다. 출발지인 갈터에서 목적지인 방동초등학교 조경동분교터까지 직선거리는 약 3km. 계곡이 굽어있어 실제거리는 7km가 넘는다. 길을 잃어 헤매는 거리까지 합치면 약 10km. 오르는 데만 3, 4시간이 족히 걸린다.

신발은 물론 모든 복장은 ‘잠수’가 가능한 것으로 준비한다. 초입부터 계곡을 첨벙거리며 건너야 한다. 몸이 더워지면 그냥 물에 누워버리면 된다. 물안경을 반드시 챙길 것. 열목어, 돌피리, 꺾지…. 물 속에 요정들이 산다. 사람을 잘 모르는 이들은 꽁무니를 빼지 않는다. 얼굴을 물에 담그면 빤히 쳐다본다. 물고기와의 눈맞춤. 진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트레킹 출발지인 갈터의 진동산채가(033-463-8488)는 단순한 맛집이 아니다. 이곳 여행의 중요 아이템 중 하나이다. 산채비빔밥의 원형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제군 기린면 현리 남쪽에 진동리로 들어가는 418번 지방도로가 있다. 이 도로도 이번 비에 조금 피해를 입었지만 여행에는 지장이 없다.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033)460-2081

# 덕풍계곡(삼척시 가곡면 풍곡리)

덕풍계곡은 삼척시의 응봉산에 들어있다. 해발 999m의 중급산이지만 바위가 많고 골이 깊어 속살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 산 중턱에 덕풍마을이 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진짜 오지였다. 외부에서 약 8km의 계곡을 거슬러 올라야 마을의 굴뚝이 보인다.

계곡에는 희미한 길이 전부였다. 지게를 지고 걷고, 물을 건너고, 가파른 곳에서는 기어서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다는데, 처음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조상은 병적인 인간 기피증의 소유자였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접근이 어려웠다.

21세기가 되면서 이 마을로 길이 났다. 사람이 걷기 편해진 것이 아니라 차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다. 청정한 오지의 아름다움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덕풍계곡은 삼척시가 ‘기대하는’ 관광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조상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었을까. 태풍 루사는 그 길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길 뿐만 아니라 그림 같던 계곡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응봉산의 봉우리들을 넘고 넘어 겨우 외부와 교통해야 했다.

4년이 지난 지금 덕풍계곡은 완전히 모습을 되찾았다. 길이 다시 놓인 것이 진정한 ‘제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외부인들은 다시 덕풍의 청정자연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덕풍마을까지 이르는 약 6km 계곡길은 트레킹 코스이다.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마을에 닿는다. 마을은 산 속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깊은 골짜기 안에 이렇게 넓은 분지가 있다니. 우선 감탄이 터져 나온다.

덕풍계곡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는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응봉산을 오르는 계곡이다. 골짜기는 갑자기 바위 벽으로 바뀐다. 그 바위 벽 아래로 사람 하나가 다닐만한 길이 나 있다.

약 2㎞을 오르면 제1 용소. 일반인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그 위로는 본격적인 암벽등반 코스이다. 삼척시청 문화관광 tour2.samcheok.go.kr/culture/main/

# 남대천(양양군)

태풍 루사와 매미가 덮쳤을 때, 양양의 남대천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동해안 하천 중 비교적 규모가 큰 곳이기 때문에 피해 역시 컸었다. 전쟁의 폐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처참했던 것은 양양읍에서 어성전리에 이르는 22km 구간이다. 모두 8개의 다리를 지그재그로 건너며 415번 지방도로가 남대천을 따라간다. 당시 새로 포장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길과 다리는 대부분 망가졌다. 길따라 강물따라 예쁘게 지어 놓은 펜션들도 둥둥 떠내려 갔다.

남대천은 북쪽으로 흐르는 남한에서 흔치 않은 강 중의 하나다. 동해안으로 흘러 드는 대부분의 하천이 시멘트 공장과 송어 양식장 등으로 제 색깔을 잃었지만 남대천은 여전히 건강하다.

남대천의 진객은 은어다. 가을이 올 때까지 물에 반쯤 몸을 담근 채 긴 낚싯대를 드리우고 은빛 보석을 건져내는 태공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은어낚시터는 강의 최하류에 있다.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많아질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모래톱이 드러나고 수심도 깊지 않다. 특히 옛다리 주변에 낚시꾼이 많다. .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리, 도리, 장리등 예쁜 이름의 마을들이 이어지다가 어성전에 닿는다. 어성전(漁城田)은 ‘물고기가 많고 산이 성벽을 이루며 땅이 기름지다’는 의미. 한마디로 사람이 살기에 좋다는 뜻이다. 어성전리는 1990년대 들어 오지 여행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도로가 생긴 이후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지는커녕 양양읍과 하조대, 강릉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가 됐다. 계곡을 따라 사람 허리 정도의 얕은 소(沼)가 이어지고 울창한 숲이 강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물에 풍덩 빠지면 그만이다. 한여름에도 소름이 돋는 차가운 물이 압권이다. 양양군청 문화관광과 (033)670-2721,2


강원=권오현 기자 k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