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낮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는 거장 아니시 카푸어의 신작 전시 설명회가 열렸다. 이날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트위스트 연작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한 아니시 카푸어.
“예술은 단정할 수 없는 존재를 다룹니다. 물리적인 것들은 비물리적일 수 있고, 단순한 것들이 지극히 깊고 복잡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미묘한 ‘사이’들을 표현하려 합니다.”
이 거장은 그의 말대로 역설적인 작업을 한다. 조각을 복잡하게 만들어, 가장 단순하게 보여준다. 깊고 짙은 색조로 덮인 우묵한 원반과 세상의 풍경을 담고 반사하는 거울의 상들이 단박에 시선들을 빨아들인다. 관객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나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작가가 작업과정에서 품었던 다기한 인상, 관념들이 순환하듯 관객과 공유되는 경지라고나 할까.
세계 미술계에서 현존 최고의 조각 거장으로 꼽히는 영국 작가 아니시 카푸어(62)는 세상의 상반되는 개념, 물질들이 공존, 순환하는 역설을 작품들로 표현해왔다. 공간과 재료, 색채 등을 통해 양극단의 개념과 성질들을 마법처럼 버무려 보는 이에게 착시와 영감을 일으키는 상호작용이 카푸어 조각의 요체다. 복잡함과 단순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기하학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밝음과 어두움 등이 그의 조각 안에서 한 몸이 되어 끊임없이 순환하며 영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31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그의 네번째 한국 개인전 ‘군집하는 구름들’은 상반되는 개념·물성들의 대비와 포용, 공존을 색깔과 표면으로 이야기하는 특유의 작업들이 최근 어떻게 변모중인지를 보여준다. 2000년대 이래 오목한 원반 그릇이나 휘어진 조형물, 거대한 거울 구 등으로 세계와 물질, 공간의 속성을 성찰해온 작가는 최근 수년사이 날카로운 각을 짓거나 유기적 곡선을 지으며 뒤틀린 거울상들을 만들고 있다. 이 상들을 도열시켜 질서와 혼돈이란 상극의 요소가 만나 빚어내는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고 있다. 크고 작은 스테인리스 상들인 ‘비정형’(트위스트) 연작들이 바로 이런 생각을 반영한 출품작들이다. 양쪽으로 나뉘어 다섯점씩 도열한 매끈한 거울상들 사이를 걸어가면, 관객은 납작하게 짜부라진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이리저리 뒤틀린 상의 각도 때문에 정작 상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느낌을 받게 된다. 빛을 너무 많이 반사해서 투명 망토를 입은 듯 실체가 잡히지 않는 스테인리스 상들은 존재하지만 사라진 것으로 비치는 역설들을 내포한다. ‘물성이 증발된 조각’을 구현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K1 전시장 안쪽에 있는 ‘군집한 구름들’(개더링 클라우즈) 연작은 존재감이 명확한데, 뜯어보면 겉과 속을 분별할 수 없는 역설이 도드라져 보인다. 회색기 감도는 검은 색상(밴타블랙)을 입힌 오목한 원반형 조형물 5개는 색의 심도가 너무 짙어 전혀 빛이 반사되지 않는다. 그래서 입체인데도 그냥 평면 같다. 가까이 가서 보면 마치 색의 심연에 빠진 듯한 분위기가 감돈다.
전시의 두 연작은 깊고 깊은 색조의 압도감(개더링 클라우즈)과 날카롭고 부드러운 각면, 곡면으로 뒤틀린 형태(비정형)를 통해 존재-비존재의 경계 사이를 탐구한다. 표면에 얽매인 기존 조각가들의 관성에서 벗어나 색감, 전시공간과의 관계까지 파고들면서 영혼을 지닌 인간과 생명이 없는 사물의 경계, 그 사이에서 물성과 정신은 끊임없이 교감한다는 통찰을 이끌어내는 집중력이 돋보인다. 작가는 31일 전시간담회에 나와 신작들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 몸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지요. 영혼이 있기 때문인데요. 다른 사물, 재료들도 물질성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성질이 있습니다. 저는 예술이 이런 사물, 재료의 정신성을 실현시키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카푸어는 영국에 건너가 조각을 공부한 뒤 1991년 세계적인 예술상인 터너상을 받으면서 스타작가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고 2015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 여성의 성기와 자궁 등을 모태로 한 논쟁적 설치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국내에는 2012년 삼성미술관 리움의 회고전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세계적 명소가 된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의 대형 거울구 설치작업인 ‘구름문’(2006)도 그의 작품이다. 전시는 10월30일까지. (02)735-8449.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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