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동해,삼척)의 자랑스러운 인물

 

* 역사인물(옛날 인물)

1. 남구만

(1629~1711 인조 7~숙종 37)은 조선 중기 문신·서예가이다. 자는 운로, 호는 약천·미재. 본관은 의령. 송준길의 문인으로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조정랑을 지냈으며, 사인·함경감사 등을 거쳐 87년(숙종 13) 영의정에 이르렀다. 1674년(현종 15) 함경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유학을 진흥시켰고 변경의 사정을 연구하여 무산부를 설치했으며 갑산·길주 사이에 새 도로를 만들고 변방수비에 힘썼다. 83년 병조판서 때에는 폐사군의 복치를 주장하여 무창·자성의 2군을 설치하였다. 그 무렵 서인이 노·소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701년(숙종 27)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가벼운 형벌을 주장하다가 퇴관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청렴한 신하로서 경사에 밝았으며 문사·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약천집》 《주역참동계주》가 있고 글씨에는 《좌상남지비》 《형판김우석비》 《찬성장현광비》 등이 있다.

 

2.홍낙섭

1874-1918, 서화가, 송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백천, 호는 용대·석사·만재이다. 그는 송정의 솔밭인 '담안'에서 성장하였으며, 담안의 건물은 1백칸에 이르렀다. 소남 이희수 밑에서 서도에 정진하였다. 그는 해강 김규진과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소남은 그를 가리켜 '낙섭은 역시 눈설미가 있어 수제자감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그리고 해강은 그의 해서체에 대해 '동대문 밖은 자네가 맡게'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소남을 계승하여 명필의 지위에 올랐으나, 44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는데 미치지 못하였다. 소남과 그의 글씨는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 생전에 시문·제문·상량문·묘표·행장 등을 기록한 <<만재집>>과 <<구회계록>>이 전한다. 그의 글과 글씨는 영동지역에서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어 한꺼번에 시서화에 능한 인물을 배출하게 하였다. '치엄당'의 글씨 등 그의 해서는 동대문 밖에서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 올 만큼높은 경지에 있었다. 제자로서 심지황·최중희 등도 일가를 이루었으므로 소남·만재로 이어지는 영동서화인맥이 형성되었다.

 

3.허목(許穆)  

척주동해비를 세운 미수 허목
 
 척주란 삼척의 옛 이름으로 이 비석을 세운 이는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미수(眉?) 허목(許穆, 1595년, 선조 28∼1682년, 숙종 8). 허미수는 60세가 넘도록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뒤늦게 관직에 오른다(최초 관직 사헌부 지평, 63세). 사헌부 장령(64세)을 하던 1660년, 조선조 17대 임금인 효종이 붕어(1659년)한 후 인조(16대)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服喪)문제로 우암 송시열과 맞서 논쟁을 벌였다.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송시열은 효종이 차남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조대비는 1년상만 입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허미수 등 남인은 효종이 차남이어도 대통을 이어 왕위를 계승했고, 종묘의 제례를 주관한 사실상의 종통이므로 3년 복상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며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허미수는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퇴조비(退潮碑)를 세우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미수는 향약(鄕約)을 만드는 등 백성을 교화하며 여러 치적을 쌓아 목민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2년간의 짧은 부임 기간 중에 역사에 길이 남을 치적의 하나로 척주동해비를 건립한다.
 
 당시 삼척에는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미수는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극치를 담은 오묘한 문장인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글)을 짓고는 그가 개발한 독특한 전서체(篆書體)에 담아 비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다.

출처 http://www.samcheok.go.kr/kor/01/02_02_15.asp

 

 

 

4. 이사부(생몰년 미상.)

활동연대 505년 ~ 562년) 또는 김태종(金苔宗)[1]은 신라 지증왕 ~ 진흥왕 시대의 장군·정치가로, 내물 이사금의 4세손이다.

이사부는 대한민국의 대중 가요인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과 〈독도는 우리땅〉에 등장한다.

지증왕 6년(505년)에 실직주(悉直州) 군주가 되었다. 이때 거도의 꾀를 이용하여 변경의 가야 세력을 일부 병합하였다.

지증왕 13년(512년)에는 아슬라주(현대의 강릉시 일대)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벌, 신라의 영토로 복속시켰다. 우산국의 사람들이 위세가 사납고 지형의 험한 것을 믿고 쉽사리 항복을 하지않자,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사자상을 배에 싣고 거짓으로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왕이 바뀌어 진흥왕 2년인 541년에는 병부령에 올랐다. 진흥왕 6년(545년)에는 왕에게 건의하여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진흥왕 11년(550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전쟁을 벌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으며,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빼앗았다. 양국 군대가 피로한 틈을 타 이사부는 군사를 이끌고 두 성을 모두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천여 명을 배치하였다. 이후 고구려가 금현성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으나 물리쳤다.

또한 단양 신라 적성비에 따르면 이사부는 이 때를 전후하여 파진찬 두미(豆彌), 아찬 비차부(比次夫)·김무력(金武力)과 함께 한강 상류 일대를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진흥왕 23년인 562년 9월에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진흥왕은 이사부를 주장,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으며, 이사부는 명을 완수하였다.

 

 

5. 이승휴

제왕운기의 저자 - 이승휴는 고려 고종11년(1224)에 태어나서 충렬왕26년(1300)까지 살았던 고려 후기의 문인이며 정치가였습니다.

이승휴의 자(字)는 휴휴(休休)이며, 자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입니다. 경산 가리현(加利縣) 사람으로 가리이씨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리현인으로 되어 있을 뿐 실제로 그곳에 어떤 연고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그의 일생 대부분은 외가(外家)인 삼척의 두타산 밑 구동(龜洞;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에서 보냈습니다. 대현 이율곡이 외가인 강릉의 역사인물인 것처럼 이승휴도 삼척의 역사인물로 숭앙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종39년(1252) 이승휴는 29세의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가 계신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1253년 몽고의 제4차 침입으로 강도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자, 삼척의 요전산성에서 몽고군과 대항하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승휴는 두타산 밑의 구동으로 들어가 지금의 천은사 옆 냇가인 용계(龍溪)변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다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인 1263년 관동안집사(關東安集使)로 온 이심(李深)의 주선으로 강화에 들어가, 다음 해 경흥부(강릉) 서기로 발탈됨으로써 관계(官界)에 첫발을 딛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지방관 생활은 오래지 않았고, 곧 중앙의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로 승진되어 중앙정계의 핵으로 급부상합니다. 그러나 충렬왕6년(1280) 감찰사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 항목으로 간언하다가 파직당하고 맙니다.

이승휴는 파직당한 후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당호(집이름)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국사와 세론에 일체 함구하고자 결심하고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왕운기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민족을 단군의 자손으로 규정한 사서(史書)로 유명한 제왕운기가 우리 삼척에서 삼척의 인물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입니다.

제왕운기는 상하 2권 1책으로, 상권은 중국의 역사를 신화시대부터 원나라의 흥기까지 7언고시(七言古詩) 264구(句)로 읊어놓았으며,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사(동국군왕개국연대)와 고려조의 역사(본조군왕세계연대)로 나누어 각각 264구 1460언의 7언고시, 152구 700언의 5언고시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요약하면 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비하여 읊은 웅대한 서사시이며, 오언 또는 칠언으로 된 고시체(古詩體)로서 춘추사관에 입각하여 노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노래는 대체로 민족의 자주의식과 이승휴의 사관, 그리고 당시 노래하던 서사시의 전형을 잘 드러낸 것으로 파악됩니다. 사대를 표방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이처럼 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등한 구조 속에서 읊고 있는 것은 투철한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제왕운기를 저술하고 2년 후 1289년 용안당 남쪽에 보광정( 光亭)을 건립하고 그 곁에 표음정(飄飮亭)이란 샘을 만들고, 정자 아래 지락당(知樂塘)이란 연못을 시설하여 살다가 71세 되던 해(1294) 홀연히 용안당의 간판을 간장사(看藏寺)로 바꾸어 놓고 모든 재산을 불가에 희사합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이승휴를 특별히 기용하여 개혁정치의 중심세력으로 활약하게 합니다. 그러나 국정이 계속 표류되자 이승휴는 자신의 힘이 미력함을 인식하고 벼슬에서 물러납니다.

이승휴가 벼슬자리를 내놓고 정든 구동으로 돌아온지 2년 후인 1300년 10월, 77세의 나이로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치게 됩니다. 고려사 열전 이승휴조 끝 부분에 "성품이 정직하고 세상에 구함이 없었으며, 심히 부서법(불법)을 좋아했다"라고 평하였습니다. 현재 그의 묘가 성주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승휴의 아들은 3형제인데, 첫째아들의 이름은 임종(林宗)으로 등과하여 헌부산랑의 벼슬에 있었으나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셨고, 둘째 아들은 담욱(曇昱)으로 출가하여 불제자의 길을 갔으며, 셋째 아들은 연종(衍宗)으로 등과하여 사헌규정을 거쳐 밀직사 겸 감찰대부에 이르렀다 합니다

 

 

6. 목 조(穆 祖)

출생지 / 전주

1274(원종 15),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본명은 이안사(李安社), 본관은 전주(全州), 장군(將軍) 양무(陽茂)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齊)의 딸이다.

목조는 전주의 토호(土豪)였는데,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지주(知州;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를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하여 가솔과 토착인 170여호를 거느리고 삼척(三陟)의 활기동(活耆洞)에 이주하였다. 여기서 1231년(고종 18) 5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노동(蘆洞)에 장사를 지냈고, 또 모친상을 당하여 동산(東山)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삼척에 이주해 온 이안사는 배를 건조하여 왜구를 방어하였으며, 1253년(고종 40) 몽고의 4차 침입에 대항하여 두타산성에서 항전하였다. 그런데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에 이곳에 부임하는 안렴사(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 있을 때 산성별감이었음으로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함길도(咸吉道)의 의주 용주리(宜州 湧州里) 곧 지금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 따라온 170여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는데, 고려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그뒤 원나라가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안사가 머물고 있던 의주도 이에 소속되었다. 따라서 이안사가 와서 그가 거느린 집단은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에 편입되어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남경(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여진족까지 다스리면서 그 세력 기반을 대를 이어 물려 주어 증손 이자춘(李子春 ; 桓祖)까지 몽고의 벼슬을 하였다. 그의 능은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7. 김겸

 

8. 김맹손(金孟孫) : 두타산성을 쌓은 분

일명 동석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성은 102년(신라 파사왕 23)에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1414년(조선 태종 14)에  삼척부사로 왔던 김맹손(金孟孫)이 천연적으로 험준한 두타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1.5m, 둘레 2.5km의 산성을 다시 쌓았다. 두타산성은 매우 경사가 심한 산비탈 위에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험준한 바위 절벽을 이용하여 쌓았고 그 출입구가 매우 좁기 때문에 도저히 함락될 것 같지 않은 천연의 요새이다.   현재는 두타산 중턱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석재는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고 험준한 산의 지형과 암벽 사이사이에 인공의 석축을 조화시켜 만들었다. 주위에는 통일 신라대의 토기와 기와조각을 볼 수 있는데 간혹 고려 때의 유물도 보인다. 성터에는 돌무더기가 오랜 비바람에 씻겨 검게 변해 있으며 성내에는 계곡과 돌우물 50여개소가 있어 산성의 필수요건인 물이 흔한 편이다.

 

*현존인물

1. 박상철(1969년 ~ )

대한민국 가수 배우 영화 배우이다. 본래의 직업은 미용사였으나 1999년 <전국노래자랑>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직후에 무명시절이 있었으나 <자옥아>를 히트시키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무조건>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인기가수가 되었으며 노래방 애창곡 1위인 곡이 되었다.

노래방 애창곡 1위

MBC 가요베스트 1위

OBS 가요베스트 1위

아이넷 성인가요차트 1위

전국민방 전국TOP10가요쇼 1위

트로트 가요대상 본상 수상

전통가요상 남자 가수왕 수상

서울가요대상 성인가요 본상 수상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성인가요10대 가수상 수상)

수상수상 내역 년도 부문 곡명

2010년 제18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성인가요부문 대상

2010년 제18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성인가요 10대 가수상

2010년 제1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성인가요부문 가수상

2010년 제19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트로트부문상

2008년 제16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가요부문 성인가요10대가수상

 

 

2. 황영조(1970. 3. 22 ~. )

태어난 곳 강원 삼척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삼척 근덕중학교 시절 사이클 선수로서 운동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후 명륜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마라톤을 시작했다. 어부와 해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수영을 즐겼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988년 처음으로 전국규모대회인 경부역전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뛰어난 활약을 보여 신인선수상을 받았고, 졸업과 동시에 코오롱 마라톤 팀에 들어갔다. 마라톤 풀코스로는 처음 참가한 1991년 3월 동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2분 35초로 3위에 입상한 후, 같은 해 6월 첫 국제대회인 영국 셰필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해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로 성장했다. 1992년 2월 일본 벳푸[別府]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 마라톤 사상 처음으로 2시간 10분벽을 돌파, 2시간 8분 47초의 기록으로 2위를 차지해 올림픽 마라톤의 제패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김완기·김재룡과 같이 출전한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1992. 8. 9). 이는 아시아인으로서는 손기정(1936, 베를린올림픽)에 이어 56년 만에 2번째 우승이었다. 1991년 백상체육대상, 1992년 대한민국 체육상경기상,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다.

3.김월성씨

42년간 홀시아버지 봉양하며 봉사활동


김월성(59·사진)삼척소방서 신기여성의용소방대 구호반장이 지난 8일 어버이날을 맞아 경로효행 실천을 통해 국가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김월성 구호반장은 초등학교도 다니기 힘든 어려운 환경속에서 결혼해 당시 6살이던 시동생과 2남2녀의 자녀들을 교육해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시켰고, 1970년부터 지금까지 42년간 홀시아버지를 한결같이 지극정성으로 봉양해 온 효행이 인정됐다.


또 2009년 1월 신기여성의용소방대에 입대해 각종 재난상황시 솔선수범으로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으며, 도계적십자봉사회 활동, 독거노인 김장 담가주기 등 사회봉사활동에 남다른 관심과 기여로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 강원일보2012.5.18


 

4. 최자랑씨 국제콩쿨대회 3위 입상(아시아뉴스통신2012년05월04일)

강원도 동해시에 태어난 최자랑씨(23, 여)씨가 이탈리아 발세비아 국제 콩쿨대회에서 3위에 입상해 화제가 되고 있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최자랑은 16세때 단신으로 독일 유학을 떠나 네덜란드 쯔월레 국립음대를 거쳐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네덜란드 명문 헤이그 왕립음악대학 3학년 재학 중 지난달 30일 이탈리아 발세비아 국제콩쿨대회에서 세계 바이올린계의 거장들을 뒤로하고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최자랑씨는 1989년 4월 강원도 동해시에서 출생해 동해 중앙초등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며 2002년 동해시 교육청 주관 중학생 음악실기 대회 바이올린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6년 3월 북평여자 고등학교 1년을 수료하고 단신으로 독일로 유학을 떠나 2008년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같은 해 9월 네덜란드 쯔월레 국립대학에 입학해 2009년 6월 1학년을 수료했다.

최씨는 쯔월레 국립대학 1년을 수료하고 2009년 9월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대학에 입학해 수학중에 있으며 지난해 12월에는 네덜란드명문 국립악단과 협연해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가족은 동해시청 공무원인 아버지 최형준씨(53)와 동해 아트챔버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어머니, 서울 총신대 음악과에 재학중인 여동생이 있다.

한편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대학으로 2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왕실재단에서 설립해 세계적인 음악영재들만 선발하는 학교로 입학과 졸업이 어려운 음악대학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