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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멘토] “길이 없다고 망설이지 마라” 조각가 최만린
한국 추상 조각의 개척가
최만린
“그저 농부가 씨앗을 뿌려 양식을 거두듯
저는 마음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지요.
예술이 별 게 아닙니다.”
경기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얼굴>이 입선하면서 조각에 두각을 나타냈던 소년. 그 소년은 미술에 대한 열망을 품고 어렵게 미대에 진학했다. 한국 추상 조각의 개척가라고 평가받는 최만린 조각가다. 그는 서양 조각을 넘어 한국의 추상 조각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평생 고민했다. 1958년 데뷔작 ‘이브’를 시작으로 ‘천지’, ‘일월’, ‘태’ 시리즈를 통해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조각에 담으려고 한 그는 예술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991년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고 1994년, 1997년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2014년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한 최만린의 인생을 만나보자.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
“‘남자는 자기 길을 가는 거다’
할아버지는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짐을 놓고 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Q. 선생님의 유년 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유년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해요. 그 시절엔 요새같이 음식이 풍요롭지 못했기 때문에 계란 하나를 먹는다는 건 대단한 거였어요. 그런데 초라한 밥상에 아들을 위해서 계란 하나를 부쳐주셨어요. 그땐 철없이 그걸 먹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음식이었나 싶어요. 삯뜨개질을 하시는 분이 아들한테 계란 하나를 준다는 것, 그 생각을 하면 ‘아 그게 어머니의 사랑이구나. 그 힘이 내게 있었구나’ 하죠.Q. 경기중학교 3학년 때 미술선생님 권유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했습니다.
그 얘기는 참 쑥스러운 얘긴데요. 저는 미술, 그림, 조각은 꿈도 안 꿨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술을 만나게 해준 선생님이 계셨어요. 하루는 미술 숙제를 해서 냈더니 선생님이 내 숙제를 칠판에 압핀으로 꽂아놓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이건 색깔이 좋고, 참 좋은 작품”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아, 미술 점수는 좋아지겠구나’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얼마 후에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려갔지요. 선생님 앞에 섰더니 “너는 (미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게 있으니까 미술 공부를 하면 어떻겠니”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펄쩍 뛰었어요. “네? 아이, 미술 안 해요. 그런 거 안 해요” 그랬던 거죠.
옛날에는 어른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하잖아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그 뜻이 과연 무엇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빈곤한 사회에 살았으니까 높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나. 그래서 그땐 정치인 같은 걸 생각했지요. 젊었을 때 저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요. 흑백 영화나 잡지를 보면 턱시도 입고 왕이나 대통령 앞에서 외교관이 되는 신임장을 받잖아요. 그게 참 멋있었어요. 작은 나라니까 외교관이 되면 외국에도 갈 수 있잖아요. 소년기의 유치한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정치학, 정치외교학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때 경기중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미술반이 있었고 그 선생님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 공부를 하신 분이셨어요.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중학교에 조각반을 만든 게 아마 처음일 겁니다. 우리나라 조각사를 보면 1920년대에 조각의 원로이신 김복진 선생님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나오신 게 한국 근현대 조각사의 시작이에요. 바로 그 밑에서 조각 공부를 하신 박승구 선생님이 우리 미술 선생님으로 오신 거죠.
어느 날 선생님이 또 “조각반에 와서 안 할래?” 그러셨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어릴 때부터 흙장난도 좋아하고 뭘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조각반에 들어갔어요. 선생님은 정말 진지하게 저를 가르치셨고 그때 엄청난 기초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셨냐 하면 흙을 가지고 조각을 하다 보면 흙이 바닥에 떨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떨어진 흙을 주워서 내 위에다 놓으시면서 “조각은 흙이 아니라 살이야”라고 말씀하셨죠.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이었죠. 정말 저희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1~2년 공부한 다음에 1949년 처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시작됐어요. ‘국전’이라고 했죠. 그때 내가 국전을 알았겠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친구 얼굴을 조각한 걸 보시면서 “이리와, 국전에다 내도록 하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국전이 뭐예요?” 그랬지요. 그랬더니 설명을 해주시면서 선생님께서 만든 조그마한 관원상 목조를 흰 헝겊에다 싸가지고 “이거하고 네가 만든 얼굴하고 가서 출품해”라고 하시는 거예요. “예, 알았어요” 그랬죠. 그때 국전회관이 지금 경복궁 뒤편에 있었어요. 경기중학교에서 멀지 않았죠. 그래서 내 것과 선생님 목조 조각을 양 옆에 끼고 걸어가서 냈어요. 그게 첫 시작입니다. 입선이 됐죠. 1회 국전 카탈로그를 보면 <얼굴>이라고 돼 있고 제 이름이 적혀 있어요. 선생님 작품은 그때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고 지금 미술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 저를 데뷔하게 해주신 박승구 선생님이 저한테 일생 동안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Q. 가족들 모르게 미대에 진학하셨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됐고 저는 청소년기에 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이란 건, 책으로 읽거나 그림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관념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모든 게 부서지고 망가지고 걷잡을 수 없는 것들을 청소년기에 보았고 느꼈어요. 그런데 휴전이 되고 이제 또 내 길을 가야 하는데 학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굉장히 망설였어요. 그때 외할아버님이 제 보호자셨는데 대학에 가서 미술 공부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습니까. 잠깐 생각해보다가 “경제학을 해볼까 그럽니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연합고사 지망 학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라고 거짓말로 적었어요.
그렇게 대학을 가려는데 갈등이 정말 심했어요. 경제학 할 자신도 없고 마음에서 허락도 안 되는데 어떡하나.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했어요. “상과대학 갑니다.” 할아버지는 좀 안심하실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잔소리를 안 하시는 분이니까 “아 그러냐” 그러셔요. 그리고 미술학교 가서 시험을 치고 들어갔습니다.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 접어드는데 미치겠어요. 매일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할아버지께 “저 나가서 애들 가르치면서 하숙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어 그러냐” 그러셔요. 대학 앞에서 하숙을 했어요. 국민학교 학생들 그림을 가르쳤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1957년인가 국전에다가 <모자상>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게 대학 4학년 때였어요. 특선을 받았던가. 신문에 작품 사진이 나왔죠. 할아버지가 집에서 보시지 않았겠어요? ‘아이고, 들켰구나.’ 그래서 할아버지께 가서 “사실은 제가 경제학을 안 했습니다” 그랬죠. 할아버지는 가만 계셔요. “조각이라는 걸 안다”고 하시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왜 그런 얘기를 안 했니? 남자는 자기 길을 가는 거다.” 딱 그 세 마디. 정말 고맙고 감사했죠. ‘역시 할아버지는 존경할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녀석, 자기 길을 가는구나’ 그렇게 이해를 하셨고 감싸주셨습니다. 그래서 해방이 됐습니다.
Q. 미대를 졸업했지만 생계는 어려우셨습니다. 3년간 라디오 아나운서를 하기도 하셨는데요.
김종영, 김세중 선생께 사사하고 대학을 1958년에 졸업을 했어요. 그때 제가 힘이 들었던 게 ‘대학만 나오면 뭘 하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갔어요. 그때는 학부까지 나오면 대개 대학원 과정을 밟지 않던 시대예요. 학위에 대해서 집념이 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 조금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무리해서 대학원에 진학했죠. 대학원에 가니까 석사 과정까지 밟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게 좀 부담스럽기 시작했어요.그런데 어느 날 라디오를 틀었더니 (그때는 라디오밖에 없을 때거든요.) KBS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 모집’을 한다는 거예요. 아나운서? 밑천이 안 들 것 같았어요(웃음). 그땐 남산에 서울중앙방송국이 있을 때라 남산 위를 올라갔죠. 실업자가 많던 시절이라 지원자가 많더라고요. 마당에 새까맣게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쑥스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했죠. 그런데 어떡합니까. 보이스 테스팅을 했죠. 1차 합격이 됐어요. 필기시험까지 보고 들어갔죠.
직장을 처음 구해 본 것 아닙니까? 조금씩 병아리 아나운서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석사 과정을 쉬고 방송국 일을 했기 때문에 제가 1963년에 석사 과정을 마무리했어요. 그때 제가 보석을 하나 얻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그때 유명한 성우 1기생이었어요. 집사람과 인연이 돼서 결혼을 하게 됐고 나한테는 인생의 전환기가 됐습니다. (부인은 성우 김소원 씨로, 탤런트 최불암씨와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문화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초라한 것도 소중한 역사죠.
그것이 후학들에게 가는 겁니다.”
Q. 1958년 데뷔작 ‘이브’ 시리즈를 발표하셨습니다.
<이브>는 서양 성서에 나오는 이름이지만 ‘인간’에 대한 대명사예요. 이브가 선악과를 따게 됐고 원죄론적인 후예들이 우리들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라는 대명사로 ‘이브’라고 붙였어요. 또 이브는 여자이기 때문에 생명의 원천도 되죠. 전후에 우리들의 아픔, 인간의 모습을 담고자 했어요. 아름다운 여인의 몸이 아니고 거친 모습 아닙니까. 인간과 생명의 고통의 모습을 그런 방법으로 표현했던 것에 불과해요.
Q. ‘빌렌도로프의 비너스’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요.
미켈란젤로와 로댕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도 애써봤습니다.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도 기다려봤죠. 그러나 저를 감동시킨 것은 2만 년 전 원시인들이 만든 ‘빌렌도로프의 비너스’였습니다. ‘빌렌도로프의 비너스’는 인간의 손으로 빚은 11cm 정도의 조그마한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희랍 조각의 비너스를 닮은 것도 아니고 가슴이 크고 배가 동그랗게 나온 모양이죠. 그걸 보면서 ‘원시 시대 사람들의 마음과 요즘 인간에 대한 마음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인간이 작은 벌레나 작은 풀포기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또 지속하고 아주 순수하게 생명성을 표현한 것을 보고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젊은 시절 비너스상을 보고 ‘아 좋다’라고 했던 느낌과는 다르게 정말 내 마음에서 빨아들일 수 있는 감동을 받은 거예요. ‘그래, 이 모습엔 내 엄마의 모습이 있구나. 우리 엄마도 나를 낳기 위해서 배가 불렀을 것이고 가슴에 젖이 담겼을 것이다.’ 그렇게 초라한 흙에 모든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조각을 한다면 이런 것을 담을 수 있는 형상을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하게 됐죠. 그때부터 빌렌도로프의 비너스는 제 큰 스승이 됐습니다.
Q. 1960년대에는 ‘천지’, ‘일월’ 시리즈를 발표하시면서 한국 조각을 다시 정의했다는 평가를 받으셨습니다.
1960년 들어와서 갈등을 느낀 건 내 마음으로 하는 일인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어요. ‘이브’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남들한테 칭찬도 받고 그랬죠. 그런데 스스로는 알았어요. 내가 아무리 해도 어떤 울타리 속에 갇혀 있구나. 그 울타리라는 건 아마 서양 미술의 틀 아닌가.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니지 않느냐. 커다란 조형적 세계의 울타리 속에 내가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소도 울타리를 짓고 기르면 그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자랍니다. 그러나 나무 울타리 하나만 넘으면 무한히 공간이 넓어지죠.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이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일을 하다가‘아, 이런 방법에서 벗어나야 해’ 하게 된 것이죠.
내 책상에 놓인 것은 펜, 컴퍼스, 자. 이것들은 분석적이고 문법적인 도구에 불과해요. 일단 그것들을 버려야 된다,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알게 모르게 둘러 있는 지적 울타리, 관념적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는 연필 한 자루도 사기 힘들 때인데 다 버렸어요. ‘서양, 동양 지역적인 울타리까지 얘기하는 건 아니더라도 뭔가 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겠다’ 생각했죠.
그렇게 버리고 났더니 다 말라비틀어진 붓 한 자루가 남습디다. 그리고 벼룻돌하고 먹 갈던 것 하나. 왜 아직도 동양권에서는 붓을 가지고 일을 할까. 그래서 한 번 낡아빠진 붓에다가 먹을 찍어서 신문지에 점을 찍어 봤어요. 연필로 찍은 점하고 붓으로 찍은 점의 차이는 엄청나요. 서양 사람들은 점이 연결되면 선이 되고 선이 가로지르면 면이 된다고 하죠. 그게 우리 지식이고 방법이었어요.
그런데 붓에는 그런 얘기가 없어요. 점 자체도 하나의 지점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안고 있는 인간의 다른 내면이 포함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 이것에서부터 나의 사념을 시작하는 것 아니겠느냐.’ 1960년대 후반 ‘천지현’이라는 작품을 서체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미학자들도 많았는데 그런 문제라기보다는 ‘인간과 형상 속에 담을 수 있는 기의 세계’라고 올바르게 보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점을 찍는 데서 시작해서 한 번 옆으로 그어봤고 그게 나의 시작이예요. ‘천지현’ 시리즈는 나의 내면, 내 나름대로의 형상을 담으면서 시작한 것이죠. 서구적인 조형 방법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또 ‘나는 과연 무엇인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작품이죠. 모든 생명은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고 자기 뿌리를 내리고 살아요. 위대한 설법보다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에는 조각 문화가 별로 없어요. 석굴암, 신라의 불교 조각, 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아이콘입니다. 그 아이콘에서 파생된 예술이지, 인간으로서 형상 속에 뭘 담아 놓으려 하는 게 별로 없는 나라예요.
저는 생각했어요. ‘자기의 모습을 담을 수 있고 자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가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조형 문화는 과연 무엇인가? 아무리 우리가 가난하고 작지만 우리의 모습을 담은 형상을 나눌 수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때부터 조금 미련스러운 고집을 부렸어요.
Q. 1970년대에는 ‘태’ 시리즈로 작품 활동이 계속 변화했습니다.
‘태’ 시리즈는 ‘천지현’ 시리즈에서 ‘일월’ 시리즈 이렇게 단계적으로 갑니다. ‘태’ 시리즈를 하기 전에 잠깐 미국에 연수 갈 기회가 있었어요. 미국의 록펠러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하게 됐죠. 책으로만 보던 조각을 현장에서 보게 됐습니다.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아, 이건 내가 몰랐던 것이네’ 하면서도 자존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나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용접으로 ‘아(我)’ 시리즈를 하고 돌아왔어요.
‘태’ 시리즈는 외향적인 생명의 형태보다는 내 속에서 우러나는 생명감을 표출하려고 했어요. 어떤 미학자가 “선생님은 드로잉을 굉장히 많이 하시는데 태 드로잉은 없네요” 하기에 내가 “‘태’라는 작업을 할 때는 펼쳐진 흙으로 그린 게 내 드로잉입니다”라고 했죠. 그랬더니 “아, 그렇습니까” 그러더군요.
Q. 1977년 잠실주공아파트가 완공됐을 때 아파트 단지에 추상조각 ‘태’를 설치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나라가 아파트를 많이 짓기 시작했습니다. 주택공사 사장님이 잠실아파트 단지에 조형물을 세우자고 하더군요. 조각 작품을 하나 놓고 싶다고요. 고민을 많이 했죠. ‘태’를 세우자고 결정했습니다. 근데 뭔지 모르겠지만 찜찜하다고 반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설치해보고 사람들이 싫어하면 작품을 철거하겠다고 했죠. 입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근데 ‘뭔지 모르겠지만 좋다’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설치하게 됐죠.
Q. 서울대 미대에서 40여년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떠셨는지요.
저에게 굉장히 소중한 질문입니다. 교수 입장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식의 전달자가 될 것인가. 좀 안다고 해서, 좀 먼저 했다고 해서 방법론 같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할까. 저는 정원사와 같은 마음으로 교수 노릇을 했어요. 흙에 씨앗이 뿌려지면 싹이 트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건 어떤 거구나’라고 조심스럽게 자기 모습을 형성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걸 전달해봐야 노트 한 권으로 끝나는 것 아니겠어요? 도서관에 가면 수만 권의 책 속에 다 좋은 말만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교실에 들어갔고 연구실에 들어갔어요. 그게 내 교수 생활에서 꼭 지켜야 될 일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난 훌륭한 교수는 아닌 것 같아요.
Q. 1997년 3년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내셨습니다.
1990년대였으니까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사가 100년도 안됐을 때입니다. 우리나라 미술사는 춘곡 고희동 선생이 일본에 가서 미술 공부를 했던 1910년으로 봅니다. 그럼 80~90년 됐다는 거였죠. 그런데 전시하면서 외래문화가 어떻다 하는 게 의미 없어 보였어요. 그것보다 우리 미술 문화를 정리하며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나를 의식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야, 멋있는 전시회 한다’라고 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소중한 정신적 살림을 정리하자는 생각이었죠.
자랑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선배님들이 한 미술이 ‘근대’죠. 근대에 대한 연구가 약했어요. 그래서 ‘근대를 보는 눈’ 전이라는 전시회를 시리즈로 했습니다. 회화, 조각, 공예, 건축 각 분야를 체계화시키려고 했죠. 사람들은 다 오늘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지나간 일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문화라는 것은 늘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랑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에요. 부끄러운 것,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도 우리들의 소중한 역사죠. 그것이 후학들에게, 자식들에게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를 줄잡아가는 일부터 했고 그래서 부끄럽지가 않아요.
Q. 1990년대 이후 동그라미 형태의 ‘O’ 시리즈를 계속 만들고 계십니다.
사람이라는 게 거둬들이는 것도 있지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시인이 시를 쓸 때 언어를 집약하기도 하지만 버리기도 하잖아요. 저도 제 생각을 조금 비워가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 표제적인 명제를 붙이는 게 조금씩 께름해졌어요. 하늘이 어떻고 땅이 어떻다는 총체적인 입장에서 동그라미를 쳤어요. 영어로 하면 ‘제로’가 되겠고 한자로는 ‘공(空)’이 되겠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땅도 둥글고 태양도 둥글고 태양 주변을 도는 위성도 둥글게 돌죠. 그걸 한자로 표시하면 큰 원이 됩니다. 둥긂이라고 하죠. 둥긂은 찰 수도 있고 빌 수도 있습니다. 비움과 찲 , 그렇게 종합적인 상념을 담을 수 있는 게 ‘둥긂’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동그라미를 치고 제목을 정했더니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질 수가 없습니다. 짊어지고 가는 것도 있지만 짐을 내려놓고 버리고 가는 것도 참 좋아요. 그래서 ‘O’ 라는 제목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Q. 2014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셨습니다.
회고전 개막식에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죠. 오랜 세월 허리를 숙이고 작업을 해와서인지 허리협착증이 왔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건강을 다스리기에는 약을 먹는 것보다 작업하는 것이 낫습니다. 회고전에는 1950년대 후반 초기작부터 200여 점을 선보였습니다. ‘이브’를 다뤘던 초기작들, 서구 조각 전통을 이은 인체 조각에 대한 회의, 한국 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천지현황’ 시리즈, ‘생명’을 다룬 1970~80년대 작품들, 그리고 90년대 ‘O’ 연작까지 전시했어요. 회고전에 오는 사람들을 보니 감동적이었어요. 내가 걸어온 길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마음의 길은 한계가 없어요.
그 길을 찾아보세요.
자기의 광활한 세계가 있을 겁니다.”
Q. 인생에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으셨나요?
콕 짚어서 ‘괴로웠다, 편했다’라는 시간은 없어요. 힘든 걸 ‘힘들다’고 의식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쉽지가 않아요. 일반적으로 힘든 시간은 많지요. 그러나 이때는 왜 힘들었고 저때는 왜 힘들었고 그것은 좋고 싫고 즐겁고. 그렇게 규정해서 말할 시간은 아니에요. 아쉬운 시간은 있어요. 겨를 없이 일을 하다 보니까 내 몇 안 되는 식구들을 더 감싸주고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자식들이 이렇게 졸망거릴 때 보통 아빠들은 안아주고 데리고 놀러 다니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전 그런 시간이 많지 않아서 후회스러운 시간은 많습니다.
Q. 이 시대의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훌륭하다’ 기억되는 것은 욕심이고 거짓말 안 하고 착한 마음으로 자기 일을 하다가 간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지요. 뭘 그렇게 자랑할 게 많습니까. 예술이라는 게 참 쑥스러운 언어예요. 난 여태까지 ‘미술가’라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조각가’라고도 하지 않아요. 무슨 ‘가’ 소리를 붙입니까. 그냥 ‘조각이라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농부는 땅을 파고 씨앗을 심어서 양식을 거둬들이죠. 예술은 마음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게 아니에요.
Q. 인생의 모토, 지키고 싶은 삶의 원칙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삶의 원칙을 보면 대개들 ‘뭘 하자’ 써놓잖아요. 그런 건 없어요. 소중한 내 생명을 잘 지키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을 하는 것. 그래서 굳이 질문을 하신다면 ‘내 마음의 길을 간다’가 내 기본이예요.
Q.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다면.
당부의 말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는 얘기인데요. 젊은 사람들에게 내 자식에게도 하지 못한 말 ‘너는 이렇게 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런 것보다 제가 그동안에 살았던 얘기를 단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누구나 요새는 다 훌륭합니다. 머리로 다 살 수 있죠. 그런데 머리라는 것은 마음에 짚이는 일을 도와주는 역할 밖에 안 하는 겁니다. 두뇌라는 것은 도구에 불과해요. 요새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그 컴퓨터는 누가 만든 겁니까? 인간의 지능이 만든 거예요. 거기에는 마음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의 생명에는 마음의 빛이 있어요. 길이 없다고 망설이지 마세요. 요새는 전부 다 고속도로로만 빠져요. 고속도로에서도 빨리 가려고만 해요. 그런데 경부고속도로까지 가도 갈 데가 어딥니까? 부산밖에 없어요. 그건 한계를 알고 뛰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의 길은 한계가 없습니다. 마음의 빛을 따라서 마음의 길을 찾아보세요.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을 살피면서 걸어가서 자기 길을 열어가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겁나지요. 가다 보면 장애물도 있고 끊긴 길도 나올 거예요. 그러나 그 길을 가다 보면 자기의 광활한 세계가 있을 겁니다.
<임아영기자 layknt
최만린
“그저 농부가 씨앗을 뿌려 양식을 거두듯
저는 마음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지요.
예술이 별 게 아닙니다.”
경기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얼굴>이 입선하면서 조각에 두각을 나타냈던 소년. 그 소년은 미술에 대한 열망을 품고 어렵게 미대에 진학했다. 한국 추상 조각의 개척가라고 평가받는 최만린 조각가다. 그는 서양 조각을 넘어 한국의 추상 조각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평생 고민했다. 1958년 데뷔작 ‘이브’를 시작으로 ‘천지’, ‘일월’, ‘태’ 시리즈를 통해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조각에 담으려고 한 그는 예술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991년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고 1994년, 1997년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2014년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한 최만린의 인생을 만나보자.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
“‘남자는 자기 길을 가는 거다’
할아버지는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짐을 놓고 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Q. 선생님의 유년 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어머니와 어린시절의 최만린(왼쪽).
그 얘기는 참 쑥스러운 얘긴데요. 저는 미술, 그림, 조각은 꿈도 안 꿨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술을 만나게 해준 선생님이 계셨어요. 하루는 미술 숙제를 해서 냈더니 선생님이 내 숙제를 칠판에 압핀으로 꽂아놓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이건 색깔이 좋고, 참 좋은 작품”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아, 미술 점수는 좋아지겠구나’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얼마 후에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려갔지요. 선생님 앞에 섰더니 “너는 (미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게 있으니까 미술 공부를 하면 어떻겠니”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펄쩍 뛰었어요. “네? 아이, 미술 안 해요. 그런 거 안 해요” 그랬던 거죠.
옛날에는 어른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하잖아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그 뜻이 과연 무엇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빈곤한 사회에 살았으니까 높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나. 그래서 그땐 정치인 같은 걸 생각했지요. 젊었을 때 저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요. 흑백 영화나 잡지를 보면 턱시도 입고 왕이나 대통령 앞에서 외교관이 되는 신임장을 받잖아요. 그게 참 멋있었어요. 작은 나라니까 외교관이 되면 외국에도 갈 수 있잖아요. 소년기의 유치한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정치학, 정치외교학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때 경기중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미술반이 있었고 그 선생님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 공부를 하신 분이셨어요.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중학교에 조각반을 만든 게 아마 처음일 겁니다. 우리나라 조각사를 보면 1920년대에 조각의 원로이신 김복진 선생님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나오신 게 한국 근현대 조각사의 시작이에요. 바로 그 밑에서 조각 공부를 하신 박승구 선생님이 우리 미술 선생님으로 오신 거죠.
어느 날 선생님이 또 “조각반에 와서 안 할래?” 그러셨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어릴 때부터 흙장난도 좋아하고 뭘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조각반에 들어갔어요. 선생님은 정말 진지하게 저를 가르치셨고 그때 엄청난 기초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셨냐 하면 흙을 가지고 조각을 하다 보면 흙이 바닥에 떨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떨어진 흙을 주워서 내 위에다 놓으시면서 “조각은 흙이 아니라 살이야”라고 말씀하셨죠.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이었죠. 정말 저희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1~2년 공부한 다음에 1949년 처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시작됐어요. ‘국전’이라고 했죠. 그때 내가 국전을 알았겠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친구 얼굴을 조각한 걸 보시면서 “이리와, 국전에다 내도록 하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국전이 뭐예요?” 그랬지요. 그랬더니 설명을 해주시면서 선생님께서 만든 조그마한 관원상 목조를 흰 헝겊에다 싸가지고 “이거하고 네가 만든 얼굴하고 가서 출품해”라고 하시는 거예요. “예, 알았어요” 그랬죠. 그때 국전회관이 지금 경복궁 뒤편에 있었어요. 경기중학교에서 멀지 않았죠. 그래서 내 것과 선생님 목조 조각을 양 옆에 끼고 걸어가서 냈어요. 그게 첫 시작입니다. 입선이 됐죠. 1회 국전 카탈로그를 보면 <얼굴>이라고 돼 있고 제 이름이 적혀 있어요. 선생님 작품은 그때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고 지금 미술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 저를 데뷔하게 해주신 박승구 선생님이 저한테 일생 동안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Q. 가족들 모르게 미대에 진학하셨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됐고 저는 청소년기에 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이란 건, 책으로 읽거나 그림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관념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모든 게 부서지고 망가지고 걷잡을 수 없는 것들을 청소년기에 보았고 느꼈어요. 그런데 휴전이 되고 이제 또 내 길을 가야 하는데 학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굉장히 망설였어요. 그때 외할아버님이 제 보호자셨는데 대학에 가서 미술 공부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습니까. 잠깐 생각해보다가 “경제학을 해볼까 그럽니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연합고사 지망 학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라고 거짓말로 적었어요.

가족들과 단란한 모습. 최만린 선생의 딸은 연극배우 최아란 씨다. 아들 최아사 씨는 건축을 공부해 계원예술대 교수로 있다.
그렇게 대학을 가려는데 갈등이 정말 심했어요. 경제학 할 자신도 없고 마음에서 허락도 안 되는데 어떡하나.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했어요. “상과대학 갑니다.” 할아버지는 좀 안심하실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잔소리를 안 하시는 분이니까 “아 그러냐” 그러셔요. 그리고 미술학교 가서 시험을 치고 들어갔습니다.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 접어드는데 미치겠어요. 매일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할아버지께 “저 나가서 애들 가르치면서 하숙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어 그러냐” 그러셔요. 대학 앞에서 하숙을 했어요. 국민학교 학생들 그림을 가르쳤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1957년인가 국전에다가 <모자상>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게 대학 4학년 때였어요. 특선을 받았던가. 신문에 작품 사진이 나왔죠. 할아버지가 집에서 보시지 않았겠어요? ‘아이고, 들켰구나.’ 그래서 할아버지께 가서 “사실은 제가 경제학을 안 했습니다” 그랬죠. 할아버지는 가만 계셔요. “조각이라는 걸 안다”고 하시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왜 그런 얘기를 안 했니? 남자는 자기 길을 가는 거다.” 딱 그 세 마디. 정말 고맙고 감사했죠. ‘역시 할아버지는 존경할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녀석, 자기 길을 가는구나’ 그렇게 이해를 하셨고 감싸주셨습니다. 그래서 해방이 됐습니다.
Q. 미대를 졸업했지만 생계는 어려우셨습니다. 3년간 라디오 아나운서를 하기도 하셨는데요.

최만린 선생은 서울중앙방송(현 KBS)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성우였던 김소원 씨와 결혼했다.
직장을 처음 구해 본 것 아닙니까? 조금씩 병아리 아나운서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석사 과정을 쉬고 방송국 일을 했기 때문에 제가 1963년에 석사 과정을 마무리했어요. 그때 제가 보석을 하나 얻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그때 유명한 성우 1기생이었어요. 집사람과 인연이 돼서 결혼을 하게 됐고 나한테는 인생의 전환기가 됐습니다. (부인은 성우 김소원 씨로, 탤런트 최불암씨와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문화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초라한 것도 소중한 역사죠.
그것이 후학들에게 가는 겁니다.”
Q. 1958년 데뷔작 ‘이브’ 시리즈를 발표하셨습니다.
<이브>는 서양 성서에 나오는 이름이지만 ‘인간’에 대한 대명사예요. 이브가 선악과를 따게 됐고 원죄론적인 후예들이 우리들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라는 대명사로 ‘이브’라고 붙였어요. 또 이브는 여자이기 때문에 생명의 원천도 되죠. 전후에 우리들의 아픔, 인간의 모습을 담고자 했어요. 아름다운 여인의 몸이 아니고 거친 모습 아닙니까. 인간과 생명의 고통의 모습을 그런 방법으로 표현했던 것에 불과해요.

초기작 ‘이브’를 바라보는 최만린 선생.
Q. ‘빌렌도로프의 비너스’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요.
미켈란젤로와 로댕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도 애써봤습니다.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도 기다려봤죠. 그러나 저를 감동시킨 것은 2만 년 전 원시인들이 만든 ‘빌렌도로프의 비너스’였습니다. ‘빌렌도로프의 비너스’는 인간의 손으로 빚은 11cm 정도의 조그마한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희랍 조각의 비너스를 닮은 것도 아니고 가슴이 크고 배가 동그랗게 나온 모양이죠. 그걸 보면서 ‘원시 시대 사람들의 마음과 요즘 인간에 대한 마음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인간이 작은 벌레나 작은 풀포기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또 지속하고 아주 순수하게 생명성을 표현한 것을 보고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젊은 시절 비너스상을 보고 ‘아 좋다’라고 했던 느낌과는 다르게 정말 내 마음에서 빨아들일 수 있는 감동을 받은 거예요. ‘그래, 이 모습엔 내 엄마의 모습이 있구나. 우리 엄마도 나를 낳기 위해서 배가 불렀을 것이고 가슴에 젖이 담겼을 것이다.’ 그렇게 초라한 흙에 모든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조각을 한다면 이런 것을 담을 수 있는 형상을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하게 됐죠. 그때부터 빌렌도로프의 비너스는 제 큰 스승이 됐습니다.

전시회에 찾아온 가족들. 왼쪽에서부터 부인 김소원 씨, 배우 최불암 씨, 최불암 씨의 부인이자 김소원 씨의 동생인 탤런트 김민자 씨.
Q. 1960년대에는 ‘천지’, ‘일월’ 시리즈를 발표하시면서 한국 조각을 다시 정의했다는 평가를 받으셨습니다.
1960년 들어와서 갈등을 느낀 건 내 마음으로 하는 일인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어요. ‘이브’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남들한테 칭찬도 받고 그랬죠. 그런데 스스로는 알았어요. 내가 아무리 해도 어떤 울타리 속에 갇혀 있구나. 그 울타리라는 건 아마 서양 미술의 틀 아닌가.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니지 않느냐. 커다란 조형적 세계의 울타리 속에 내가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소도 울타리를 짓고 기르면 그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자랍니다. 그러나 나무 울타리 하나만 넘으면 무한히 공간이 넓어지죠.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이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일을 하다가‘아, 이런 방법에서 벗어나야 해’ 하게 된 것이죠.
내 책상에 놓인 것은 펜, 컴퍼스, 자. 이것들은 분석적이고 문법적인 도구에 불과해요. 일단 그것들을 버려야 된다,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알게 모르게 둘러 있는 지적 울타리, 관념적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는 연필 한 자루도 사기 힘들 때인데 다 버렸어요. ‘서양, 동양 지역적인 울타리까지 얘기하는 건 아니더라도 뭔가 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겠다’ 생각했죠.
그렇게 버리고 났더니 다 말라비틀어진 붓 한 자루가 남습디다. 그리고 벼룻돌하고 먹 갈던 것 하나. 왜 아직도 동양권에서는 붓을 가지고 일을 할까. 그래서 한 번 낡아빠진 붓에다가 먹을 찍어서 신문지에 점을 찍어 봤어요. 연필로 찍은 점하고 붓으로 찍은 점의 차이는 엄청나요. 서양 사람들은 점이 연결되면 선이 되고 선이 가로지르면 면이 된다고 하죠. 그게 우리 지식이고 방법이었어요.

작업실에 전시해 놓은 조각들. 최만린은 서양 조각을 넘어 한국의 추상 조각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평생 고민했다.
저는 생각했어요. ‘자기의 모습을 담을 수 있고 자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가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조형 문화는 과연 무엇인가? 아무리 우리가 가난하고 작지만 우리의 모습을 담은 형상을 나눌 수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때부터 조금 미련스러운 고집을 부렸어요.
Q. 1970년대에는 ‘태’ 시리즈로 작품 활동이 계속 변화했습니다.

조각에 바친 인생. 그는 ‘조각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았다.
‘태’ 시리즈는 ‘천지현’ 시리즈에서 ‘일월’ 시리즈 이렇게 단계적으로 갑니다. ‘태’ 시리즈를 하기 전에 잠깐 미국에 연수 갈 기회가 있었어요. 미국의 록펠러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하게 됐죠. 책으로만 보던 조각을 현장에서 보게 됐습니다.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아, 이건 내가 몰랐던 것이네’ 하면서도 자존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나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용접으로 ‘아(我)’ 시리즈를 하고 돌아왔어요.
‘태’ 시리즈는 외향적인 생명의 형태보다는 내 속에서 우러나는 생명감을 표출하려고 했어요. 어떤 미학자가 “선생님은 드로잉을 굉장히 많이 하시는데 태 드로잉은 없네요” 하기에 내가 “‘태’라는 작업을 할 때는 펼쳐진 흙으로 그린 게 내 드로잉입니다”라고 했죠. 그랬더니 “아, 그렇습니까” 그러더군요.
Q. 1977년 잠실주공아파트가 완공됐을 때 아파트 단지에 추상조각 ‘태’를 설치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나라가 아파트를 많이 짓기 시작했습니다. 주택공사 사장님이 잠실아파트 단지에 조형물을 세우자고 하더군요. 조각 작품을 하나 놓고 싶다고요. 고민을 많이 했죠. ‘태’를 세우자고 결정했습니다. 근데 뭔지 모르겠지만 찜찜하다고 반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설치해보고 사람들이 싫어하면 작품을 철거하겠다고 했죠. 입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근데 ‘뭔지 모르겠지만 좋다’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설치하게 됐죠.
Q. 서울대 미대에서 40여년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떠셨는지요.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최만린 선생. 그는 1967년부터 40여 년 서울대 교수로 일했다.
Q. 1997년 3년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내셨습니다.
1990년대였으니까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사가 100년도 안됐을 때입니다. 우리나라 미술사는 춘곡 고희동 선생이 일본에 가서 미술 공부를 했던 1910년으로 봅니다. 그럼 80~90년 됐다는 거였죠. 그런데 전시하면서 외래문화가 어떻다 하는 게 의미 없어 보였어요. 그것보다 우리 미술 문화를 정리하며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나를 의식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야, 멋있는 전시회 한다’라고 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소중한 정신적 살림을 정리하자는 생각이었죠.
자랑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선배님들이 한 미술이 ‘근대’죠. 근대에 대한 연구가 약했어요. 그래서 ‘근대를 보는 눈’ 전이라는 전시회를 시리즈로 했습니다. 회화, 조각, 공예, 건축 각 분야를 체계화시키려고 했죠. 사람들은 다 오늘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지나간 일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문화라는 것은 늘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랑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에요. 부끄러운 것,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도 우리들의 소중한 역사죠. 그것이 후학들에게, 자식들에게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를 줄잡아가는 일부터 했고 그래서 부끄럽지가 않아요.

전 문화부장관이었던 이어령 선생 부부와 함께한 사진.
Q. 1990년대 이후 동그라미 형태의 ‘O’ 시리즈를 계속 만들고 계십니다.
사람이라는 게 거둬들이는 것도 있지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시인이 시를 쓸 때 언어를 집약하기도 하지만 버리기도 하잖아요. 저도 제 생각을 조금 비워가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 표제적인 명제를 붙이는 게 조금씩 께름해졌어요. 하늘이 어떻고 땅이 어떻다는 총체적인 입장에서 동그라미를 쳤어요. 영어로 하면 ‘제로’가 되겠고 한자로는 ‘공(空)’이 되겠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땅도 둥글고 태양도 둥글고 태양 주변을 도는 위성도 둥글게 돌죠. 그걸 한자로 표시하면 큰 원이 됩니다. 둥긂이라고 하죠. 둥긂은 찰 수도 있고 빌 수도 있습니다. 비움과 찲 , 그렇게 종합적인 상념을 담을 수 있는 게 ‘둥긂’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동그라미를 치고 제목을 정했더니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질 수가 없습니다. 짊어지고 가는 것도 있지만 짐을 내려놓고 버리고 가는 것도 참 좋아요. 그래서 ‘O’ 라는 제목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Q. 2014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셨습니다.
회고전 개막식에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죠. 오랜 세월 허리를 숙이고 작업을 해와서인지 허리협착증이 왔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건강을 다스리기에는 약을 먹는 것보다 작업하는 것이 낫습니다. 회고전에는 1950년대 후반 초기작부터 200여 점을 선보였습니다. ‘이브’를 다뤘던 초기작들, 서구 조각 전통을 이은 인체 조각에 대한 회의, 한국 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천지현황’ 시리즈, ‘생명’을 다룬 1970~80년대 작품들, 그리고 90년대 ‘O’ 연작까지 전시했어요. 회고전에 오는 사람들을 보니 감동적이었어요. 내가 걸어온 길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마음의 길은 한계가 없어요.
그 길을 찾아보세요.
자기의 광활한 세계가 있을 겁니다.”
Q. 인생에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으셨나요?
콕 짚어서 ‘괴로웠다, 편했다’라는 시간은 없어요. 힘든 걸 ‘힘들다’고 의식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쉽지가 않아요. 일반적으로 힘든 시간은 많지요. 그러나 이때는 왜 힘들었고 저때는 왜 힘들었고 그것은 좋고 싫고 즐겁고. 그렇게 규정해서 말할 시간은 아니에요. 아쉬운 시간은 있어요. 겨를 없이 일을 하다 보니까 내 몇 안 되는 식구들을 더 감싸주고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자식들이 이렇게 졸망거릴 때 보통 아빠들은 안아주고 데리고 놀러 다니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전 그런 시간이 많지 않아서 후회스러운 시간은 많습니다.
Q. 이 시대의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훌륭하다’ 기억되는 것은 욕심이고 거짓말 안 하고 착한 마음으로 자기 일을 하다가 간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지요. 뭘 그렇게 자랑할 게 많습니까. 예술이라는 게 참 쑥스러운 언어예요. 난 여태까지 ‘미술가’라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조각가’라고도 하지 않아요. 무슨 ‘가’ 소리를 붙입니까. 그냥 ‘조각이라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농부는 땅을 파고 씨앗을 심어서 양식을 거둬들이죠. 예술은 마음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게 아니에요.
Q. 인생의 모토, 지키고 싶은 삶의 원칙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삶의 원칙을 보면 대개들 ‘뭘 하자’ 써놓잖아요. 그런 건 없어요. 소중한 내 생명을 잘 지키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을 하는 것. 그래서 굳이 질문을 하신다면 ‘내 마음의 길을 간다’가 내 기본이예요.
Q.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다면.
당부의 말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는 얘기인데요. 젊은 사람들에게 내 자식에게도 하지 못한 말 ‘너는 이렇게 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런 것보다 제가 그동안에 살았던 얘기를 단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누구나 요새는 다 훌륭합니다. 머리로 다 살 수 있죠. 그런데 머리라는 것은 마음에 짚이는 일을 도와주는 역할 밖에 안 하는 겁니다. 두뇌라는 것은 도구에 불과해요. 요새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그 컴퓨터는 누가 만든 겁니까? 인간의 지능이 만든 거예요. 거기에는 마음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의 생명에는 마음의 빛이 있어요. 길이 없다고 망설이지 마세요. 요새는 전부 다 고속도로로만 빠져요. 고속도로에서도 빨리 가려고만 해요. 그런데 경부고속도로까지 가도 갈 데가 어딥니까? 부산밖에 없어요. 그건 한계를 알고 뛰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의 길은 한계가 없습니다. 마음의 빛을 따라서 마음의 길을 찾아보세요.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을 살피면서 걸어가서 자기 길을 열어가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겁나지요. 가다 보면 장애물도 있고 끊긴 길도 나올 거예요. 그러나 그 길을 가다 보면 자기의 광활한 세계가 있을 겁니다.
인터뷰이 소개 최만린
1935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기중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부터 3년 간 서울중앙방송(현 KBS) 아나운서로 일하기도 했다. 데뷔작 ‘이브’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입문했고 1967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40여 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0년대부터 ‘일월’, ‘천지’, ‘태’ 시리즈를 통해 한국 추상 조각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9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장, 2006년에는 예술마을 헤이리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91년 김세종조각상을, 1994년, 1997년 대한민국 환경문화상을 수상했다.
1935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기중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부터 3년 간 서울중앙방송(현 KBS) 아나운서로 일하기도 했다. 데뷔작 ‘이브’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입문했고 1967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40여 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0년대부터 ‘일월’, ‘천지’, ‘태’ 시리즈를 통해 한국 추상 조각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9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장, 2006년에는 예술마을 헤이리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91년 김세종조각상을, 1994년, 1997년 대한민국 환경문화상을 수상했다.
<임아영기자 layk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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