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도 충청도 출신이었어? 느긋하고 담담하지만 묵직하게 깊은 울림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11-13 10:46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11-13 10:52

충청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산비탈에서 돌이 굴러내려오는 위급한 상황에도 태연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돌 굴러가유”라고 말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굼뜬 행동’ 외에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보이지 않는 신중함을 ‘충청도 출신 사람들’의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주위에도 충청도가 고향인 지인들이 꽤 있다. 대체로 입이 무겁고 전후좌우를 꼼꼼히 살피는 스타일의 소유자들이다. 현안을 놓고 타지(他地) 출신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도 충청도가 고향인 친구들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설득하기보다 묵묵히 경청하는 편이다. 얘기를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주장을 펼치기보다 두루뭉슬하게 표현해 뭔가 여지를 남긴다. 그 자리에선 정확히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돌아서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엄청난 메시지들을 담고 있는 말들이어서 문득문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를 충청도인들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식으로 일반화했다간 여기저기서 돌멩이가 날아들 게 뻔하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경험과 한정된 지인들의 인상에 기초한 사견(私見)일 뿐이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뭉뚱그려 어떤 특성을 띤 범주에 한꺼번에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그만큼 위험천만한 일이다.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이 그 위험천만한 작업에 나섰다. 21명의 충청남도 출신 작가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충남 근현대 미술의 주요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낯익은 해후>를 기획했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을 근현대 한국화부터 시작해서 서양화, 조각,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이다. 덕분에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 등의 수작(秀作)들을 한꺼번에 대거 관람할 수 있게 됐다.

전시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전시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느긋하고 담담하다. 묵직하고 깊은 울림이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아라리오 갤러리가 충남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고 내린 결론이다. 작품도 작가를 닮는다고 했던가. 충청도 특유의 느릿느릿한 사투리, 달관한 듯한 삶의 여유, 흥분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밀고 나가는 ‘충청인’들의 특성이 작품에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언뜻 보면 적요한 마을, 자연, 그리운 고향 등에 대한 느긋하고 담담한 일상적, 사적 시선이 주를 이루지만 정직하게 직시된 그 시선의 끝에는 각 작가들이 살았던 당대의 시대 정신과 그들의 치열한 고민들이 담겨 있다. 충남 작가들의 ‘묵직한 진정성’과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전시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전시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전시는 충남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한국화 거장들부터 시작해서 우리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을 담은 서양화가,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조각가, 실험적 사진의 여정을 보여준 사진작가, 사뭇 다른 매체와 소재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낸 현대 회화와 영상, 설치 작가들을 아우른다.

전시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전시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한국 산수화

근대 한국 산수화는 이상범의 작업에서 시작한다. 그의 작품은 부드럽고 몽환적으로 표현된 한국의 자연과 민초의 삶이 강하고 절도 있는 붓의 움직임과 대비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게 특징이다.

청전 이상범, 추경산수, 수묵담채, 64 x 134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청전 이상범, 추경산수, 수묵담채, 64 x 134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짐승, 꽃, 나무 등을 세필채색화로 즐겨 그린 조중현과 겨울 풍경과 초가집을 독특한 수묵필치로 향토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표출한 김화경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하얀 여백 위를 역동적으로 가로지르는 인간 군상들을 표현한 이응노의 작품들을 거쳐 근대 한국화의 지필묵(紙筆墨) 전통은 현대적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먹이 번지며 윤곽이 퍼지게 하는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한국화에 추상을 더한 민경갑과 이종상의 작품을 통해 한국화의 현대화는 더욱 속도를 높인다. 신체를 매개로 하나의 호흡을 통해 한 획을 상징적으로 구현해낸 김순기가 한국화 흐름의 긴 호홉을 마무리한다. 김순기의 작품은 정신 수양의 실천 행위가 근간인 한국화의 지필묵 전통을 실험적으로 확장해 현대적으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양화의 발전

서양화는 사실적 자연주의에 충실한 풍경화와 정물화로 잘 알려진 1세대 서양화가 이마동과 우리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과 그리운 풍경을 그려낸 이종무의 작품에서 시작한다. 장욱진은 근대적 관습에서 벗어나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며 현대로 나아가려 했던 시도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한국적 토속성을 추구하면서도 화면을 단순화하고 대상을 축약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장욱진, 마을, 1978, 캔버스에 유채, 20 x 15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장욱진, 마을, 1978, 캔버스에 유채, 20 x 15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이후 세대로서 고향과 농촌, 농민의 정서를 소박한 감정이 담긴 푸근한 서사로 표현한 신양섭과 이를 조금 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풍경들로 그려낸 이종구가 서양화의 명맥을 잇는다. 충남 출신 작가 특유의 느긋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선이 두드러진다. 임옥상은 녹록하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민중의 목소리를 담은 사회비판적 작업들을 통해 당대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다.

임옥상, 상록수, 1983, 캔버스에 유채, 190 x 160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임옥상, 상록수, 1983, 캔버스에 유채, 190 x 160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조각에서의 현대적 시도

조각에서의 새로운 표현 시도는 60년대 이후 강태성, 김창희, 백현옥의 작품 속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실험적인 방식으로 가족, 여인 등 인물을 표현했다. 노상균은 전통 매체를 벗어난 매체적 확장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실험적 사진의 여정

현대 사진 작업의 모태가 되는 박영숙과 황규태의 작품은 60년대 초기 현대 사진에서부터 그 이후 디지털 사진으로 연결되는 실험적 사진의 여정을 보여준다.

황규태, Melting the Sun, 1993, R-Print, 200 x 133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황규태, Melting the Sun, 1993, R-Print, 200 x 133 cm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새로운 가능성

중견 작가 홍원석의 회화와 김웅현의 영상, 설치 작품을 통해 동시대 작가들의 정체성과 문제 의식을 과거와는 사뭇 다른 매체와 소재 속에서 발견한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가능성을 예상해보면서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느긋하지만 강렬한’ 충남 작가들의 긴 여정 탐방은 끝을 맺는다.

■ 충남 작가 소장전 <낯익은 해후>

전시 기간 : 2020년 10월20일(화) ~ 2021년 4월4일(일)
전시 장소 :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만남로 43)
전시 작품 : 한국화, 서양화,조각, 사진, 영상, 설치 등 총 70여점
관람 시간 : 월요일 ~ 일요일 오전 11시 ~ 오후 7시

참여작가 : 청전 이상범, 고암 이응노, 청구 이마동, 당림 이종무, 심원 조중현, 장욱진, 유천 김화경, 강태성, 유산 민경갑, 일랑 이종상, 황규태, 당진 김창희, 백현옥, 박영숙, 신양섭, 김순기, 임옥상, 이종구, 노상균, 홍원석, 김웅현 등 21명

자료 및 사진 | 아라리오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