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간직한 마지막 ‘피난처’
전화도, 전기도 없는 ‘오지 중의 오지’ 강원 인제 - 아침가리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아침가리 계곡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철쭉꽃이 바람에 떨어져, 맑은 계곡물 위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아침가리 계곡은 지금 온통 짙푸른 녹음으로 가득 차 있다. 침엽수와 활엽수, 햇볕과 그늘, 물 밖과 물 안에서 초록색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색으로 변주된다.
‘아침가리’. 이름부터가 참 싱싱합니다.
서해 안면도 남쪽의 바닷가에 붙여진 이름 ‘바람아래’와 견줄 만하지요.
산이 깊고 험해서 아침에 잠시 밭을 갈 정도로 노루꼬리만큼 해가 들고,
금새 해가 져버릴 만큼 첩첩산중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답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의 ‘조경동’.
아침 조(朝)자에 밭갈 경(耕)자를 써서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아침가리’란 말의 펄떡거리는 싱싱한 울림에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아침가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곳이 얼마나 외진 곳인가’를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을 들먹이곤 합니다.
정감록에 난리가 나면 온전히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삼둔 사가리’를 꼽았다며,
삼둔은 생둔·귀둔·월둔이고, 사가리는 아침가리와 적가리,
연가리·명지가리(명지거리)를 일컫는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보탭니다.
하지만 정감록의 어느 곳에서도 ‘삼둔 사가리’란 말은 찾아볼 수 없답니다.

강원도의 피난처를 들면서 이른바 ‘삼둔 사가리’가 있는 인제나 홍천 땅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태백과 소백이 만나는 경북 풍기일대를 최고의 피난처로 꼽았지요.
정작 산 깊은 강원도는 뒷전이랍니다.
정감록을 이본(異本)까지 샅샅이 훑은 국내 최고의 ‘정감록 학자’로 꼽히는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의 말이니 믿어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삼둔 사가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비교적 최근에 강원도 깊은 땅의 지명을 조합해 누군가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정감록이 꼭 아니더라도, 누구의 입에서 처음 나왔건
‘삼둔 사가리’로 지목된 오지들은 피난처로 꼽히기에 충분합니다.
구비구비 험한 길을 돌아 들어가거나 물길을 헤치고 찾아들어가야 하는
그 땅들은 참으로 깊습니다.
그래서 정감록을 들먹이며 지어낸 말조차도 믿겨 왔던 것이지요.
전국 곳곳에 도로가 나고 터널이 뚫리면서 ‘이제 오지인 곳은 없다’지만,
아침가리는 여전히 오지 중의 오지로 남아있답니다.
이곳에는 휴대전화도 무용지물이고, 그 흔한 전화도 안 들어옵니다.
심지어는 전기도 없는 곳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이곳에서 난리를 피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번잡스러운 데다,
너나 없이 경쟁에 몰두하다 자칫하면 낙오하고야 마는
지금의 도회지 생활이 ‘난리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침가리야말로 그런 난리와 같은 도회지생활의 피난처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물론 도회지 사람들에게 ‘아침가리로의 피난’이란 것은
한나절 혹은 반나절의 짧은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도회지 생활에서 상처입거나, 힘들고 지쳤을 때
찾아가볼 만한 피난처인 아침가리입니다.

도시에서 입은 독한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은 물론 싱싱한 자연입니다.
들꽃들이 만발한 인적 없는 아침가리 계곡에 들어서면
먼저 인기척에 놀라 파드득 날아가는 물새들을 만나게 된답니다.
열목어가 노니는 찬 계곡물에 손을 담그고 물빛을 내려다보거나,
계곡을 건너는 바위를 딛고 서서 연초록 숲 앞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봄이 무르익은 계곡의 풍경이 너무 고요해서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가리는 계곡을 따라 무릎까지 적시면서 따라들어가거나,
숲 터널을 따라 비포장길로 타박타박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자연이 차려놓은 성찬’을 만날 수 있는 두 길 모두를 찬찬히 밟아봤습니다.
이곳을 찾아가서 아침가리의 풍경을 만난다면,
삶이 무거워져 불현듯 도망치고 싶은 때에 언제고 이곳의 풍경을 꺼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피난처 하나를 갖고 사는 일,
그게 사는 데 때론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제·홍천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7-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