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미술의 한 장르인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회화나 조각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어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이 판화가 가진 매력의 전부일까? 판화는 캔버스나 종이 위에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판(版)'이라는 매개체를 거쳐 작품이 완성되기 때문에 재료가 주는 특성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판화 감상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작가의 생각이 판을 거치면서 다른 형식으로 바뀌어가는 모든 과정과 절차가 담겨 있는 판화. 집안을 새롭게 꾸미고도 싶고 누군가에게 정성을 담은 선물을 준비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미술시간에 배운 고무판화 밖에는 접해본 적이 없어 망설이고 있다면, 몇 가지 판화의 특성을 미리 짚어보는 것도 전시를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판화는 어떤 원리로 제작될까?
판화의 종류는 제작원리에 따라 크게 볼록판, 오목판, 평판, 공판으로 나뉜다. 목판화나 고무판화처럼 형태에 따라 판을 깎아낸 후, 판에 물감을 입혀 파이지 않은 '볼록한' 부분에 묻은 물감을 찍는 것이 볼록판화. 이와 반대로 동판화 같은 오목판화는 판에 원하는 이미지대로 흠집을 낸 후 '오목한' 홈 안으로 들어간 물감을 종이에 찍어 올리는 방식이다. 금속판의 미세한 틈에 스며든 물감을 종이에 옮겨야 하므로 강한 압력을 줄 수 있는 프레스기를 이용하는 것. 석판화로 대표되는 평판은 판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판은 여전히 '평평한' 상태다. 그 대신 유성물감을 흡수하는 이미지 부분과 물 을 흡수하는 여백 부분이 서로 분리됨으로써 그림이 찍히는 원리. 끝으로 공판은 실크 같은 천을 틀에 팽팽하게 고정하고 미세하게 '뚫린' 천의 구멍으로 물감을 통과시켜 찍는 방법으로서 다른 판화기법과 달리 이미지가 뒤집혀 찍히지 않는다.

판의 종류에 따라 느낌이 어떻게 다를까?
모든 판은 각각의 개성을 갖는다. 전통적인 목판 인쇄와도 맥이 닿는 목판화는 부드러운 나무결과 명암을 살릴 수도 있는 반면 날카롭고 거침 없는 칼의 움직임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동판화는 미묘한 음영에서 비롯된 풍부한 화면효과와 섬세한 이미지 표현에 적합하며, 석판화는 판에 직접 그림을 그리게 되므로 붓질의 강약과 물감의 번짐 효과, 안료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난다. 실크스크린(세리그래피)은 이미지의 선이 뚜렷하고 깔끔하며 균일한 색면이 찍힌다. 최근에는 사진기법을 응용하여 한층 정교하고 세밀하게 이미지를 표현하게 됐다.

판화용어
에디션(edition)
원래 초판, 재판 등의 판(版)을 의미하며 인쇄물을 뜻하기도 한다. 미술에서는 한정된 수로 제작되고 전시, 판매되는 작품을 지칭한다. 판화의 경우 대부분 에디션으로 제작되고 사진 작품도 에디션으로 유통될 수 있다. 작품에 10/50라는 에디션 번호가 기입되어 있다면, 하나의 판을 사용해 총 50개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 중 이 작품은 작가가 10번째로 감수하고 서명했다는 의미.

A.P(artist proof) 또는 E.P(epreuve d'artiste)
에디션 넘버가 없이 A.P나 E.P로 표기된 것은 작가 보관용을 의미하며, 보통 총 에디션 숫자의 10%이내로 한정된다.

C.P(cancellation proof)
판을 모두 찍은 후 폐기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에 X표나 다른 표시를 하여 더 이상 본 판으로 찍어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리지널 판화(original print)
작가가 직접 도안하고 원판을 제작하여 찍은 것. 오늘날에는 작가의 지휘ㆍ감독하에 전문 프린터가 찍어낸 것도 포함한다. 반드시 작가의 사인과 함께 전체 에디션 매수와 일련번호가 기재되어야 한다.

복제(reproduction)
작가의 사인이 있고 매수가 제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아닌 타인이 오리지널 작품을 사진제판술이나 그 밖의 다른 기계적 과정으로 복사한 것. 판화의 범주에 포함되는 경우라고 해도 그것이 다른 오리지널 작품을 그대로 모사했거나 원작에 가깝게 복사한 것은 복제품에 속한다. 작가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복제는 사본(replica)이라고 한다.

복수미술(multiples)
'복수미술'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두 개 이상의 미술작품이 동일한 모양으로 제작된 경우를 말하며, 판화뿐 아니라 입체, 사진, 디지털미술 등 여러 작품을 찍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미술 형식. 대량생산을 위해 고안된 형식으로 미술의 오랜 관습인 일품미술의 오리지널리티에 도전하는 개념. 영어로는 '멀티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평면적인 판화보다는 복수로 제작된 입체작품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그 기원은 공방에서 판화나 조각이 한정판으로 복수 제작됐던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가나 '멀티플'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 중반에 등장했다. '멀티플'의 순수한 개념은 복수로 제작된 작품들이 다양한 나열을 통해 하나의 언어로 표현되는, 즉 복수의 작품이 하나의 단일작품으로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산업적 공정이나 실크스크린 등의 방법으로 다수 제작되지만 복제와는 달리 복수성 자체를 본질적 속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개개 작품이 오리지널리티를 보유하는 혁신적인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