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고사 구상'엔 본론도 결론도 없다
[주장] 학교 현실 무시한 '논술 반영 비율 높이기'
박병춘(hayam) 기자
▲ 저 정도 논술 참고서는 새발의 피다. 논술 교재만 하더라도 산을 이룬다.
ⓒ 박병춘

교수들이 양손에 대학 홍보물이나 기념품을 들지 않고도 가만히 앉아서 좋은 학생을 받을 수 있는 서울 소재 일부 대학들이 논술고사를 치르겠다고 한다. 서울대가 지난 8일 2008학년도 논술 중심의 입시안을 발표하면서부터 이 문제는 본격화되고 있다.

산행이나 항해를 하기 전에 먼저 기상 상태를 살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더구나 교육이라고 하는 국가적 대사를 놓고 감당하기 힘든 좌표를 설정하여 학교교육을 혼란에 빠뜨리면 안 된다.

대학과 교육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는 것은 본론과 결론을 앞에 쓰고 서론을 뒤에 쓰는 잘못된 논술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우리 학생들에게 서론·본론·결론에 무리가 없는 논리적 글쓰기를 원하면서 교육 당국의 입시 행정은 그 순서가 뒤죽박죽인 데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으니 심각한 문제다.

중하위권 대학이 '비판력·창의력·논리력'을 측정하지 않는 이유

누가 매긴 순위인지 모르나 관습적 서열 상위를 거머쥐고 있는 기득권 대학들은 일선 단위학교 현실을 전혀 모른 채 논술고사 시행을 밀어붙이고 있다. 논술고사 반영 비율을 대폭 높여 당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한단다. '본고사 부활이다' '아니다' 예상된 엇박자가 진동한다.

학원가는 논술에 사활을 걸 기세고 학생·학부모는 애간장이 탄다. 일선 학교에는 제각각 냉기가 흐르고 있다. 비상이다. 도대체 이 논술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일부 대학만 논술고사로 학생을 선발하려는 것일까?

서울대가 요구하는 논술고사나 웬만한 논술 서적에 등장하는 논술의 개념을 종합하면, '비판력·창의력·논리력' 등이 핵심이다. 먼저 글을 비판적으로 읽고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논리적 글쓰기를 하라는 것이 일반적인 논술 공식이다.

대학은 개인의 논술 능력이 대학 수학을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논술에서 요구하는 사고가 학문 수양에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진정 그렇다면 전국의 모든 대학이 일률적으로 논술고사를 대입 전형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낳는다.

하지만 전국의 수많은 대학 가운데 논술고사를 치르겠다는 대학은 몇이나 될까? 왜 전국 대학이 나서서 내남없이 고르게 논술고사를 치를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단언컨대 출제부터 채점까지 논술고사를 관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의 한 중하위권 대학 관계자는 자기네 대학도 논술고사를 치르고자 하나 출제부터 채점까지 관리가 힘들고, 수험생들까지 외면하여 지원율 감소가 두드러질 것이라고 말한다. 절대 다수 수험생들이 논술고사 치르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아예 논술고사를 치르지 않는 대학으로 쏠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교사로서 나는 우려한다. '비판력·창의력·논리력'이라고 하는 것들이 논술고사라는 형태로 측정됨으로써 오히려 절대 다수 학생들이 지닌 진정한 '비판력·창의력·논리력'이 잠식되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논술고사를 치르는 학생들은 어차피 상위 소수이니 말이다.

학교엔 담당교사도 과목도 없는데... 논술은 학원에서?

어느 대학은 논술고사를 보는데 어느 대학은 안 보고, 어떤 학생은 논술고사를 준비하는데 어떤 학생은 안 하고, 그 차이에 따라 대학의 위상이 높고 낮은 것일까. 논술고사 성적에 따라 인간의 능력이 결정되는 것일까? 초중고에서 논술 교육이 부족하여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세계 100대 대학이 한 곳도 없는 걸까?

비판력·창의력·논리력은 논술고사라는 특별한 시험 형태로 향상된다기보다 개별 교과의 수업 양태에 따라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한 수업 형태가 공교육 정상화의 토대가 되었을 때 대학이 논술고사를 치른다면, 이의를 제기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다면 일선 고교 현장은 어떤가. 논술을 누가 가르칠 것인가부터 따져보자. 논술 교육은 국어 선생의 몫인가, 철학 선생의 몫인가, 사회 선생의 몫인가. 더구나 '통합형 논술'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개별 교과의 몫으로 한정짓기가 얼마나 불편한가.

더욱 황당한 사실은 현행 교육과정상 학교 현장에 '논술'이라는 교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목도 없고 담당 교사도 없다. 그런데도 대학은 논술고사를 강행한단다. 이런 억지는 결국 '논술 교육은 학교에서 하지 말고 사교육으로 해결하라'는 강변으로 치닫게 된다. 그것이 먹혀드는 것 또한 현실 아닌가.

대학이 논술고사를 치른다니 고교 현장에서 준비를 안 할 수 없다. <한겨레>는 17일자 기사를 통해 "지방 학교들이 논술 강사 모시기에 비상이 걸렸다"고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공교육 현장의 논술 교육 황폐화를 지적하는 것으로 논술 관련 '대학 따로 고교 현장 따로'라는 등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 학생들이 수능을 치르고 나서 강남으로 가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 학교는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학생과 논술고사를 준비하지 않는 학생으로 구별되고, 그 자체는 또 하나의 비교육적 차이를 유발할 것이 분명하다. 기본적인 논술 텍스트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밀어붙이기식 논술고사를 강행하는 것은 공교육을 무시한 기득권 대학의 횡포 아니고 무엇인가.

내신에 수능에 논술까지...

대학이나 교육부 관계자에게 묻는다. 과연 일선 학교가 논술고사를 대비할 수 있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학이나 교육부가 진정 일선 학교 현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

읽기 자료를 제시하고 논제를 부여하는 형식인 논술고사는 평소 학생이 가진 배경지식을 총동원하여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글을 쓰는 것인데, 학교 교육이 이를 뒷받침한 만한 여건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 것이 순서다.

한 학생의 논술을 첨삭 지도하는 데만 30분 내지 1시간이 소요된다고 할 때,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이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학교는 없다고 봐야 한다. 소수의 희망자만을 대상으로 지도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고 논술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학교는 극히 드물다.

내신과 수능 준비만으로도 하루 열대여섯 시간을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정규 교과목에도 없는 논술이라는 괴물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추세라면 수능이 끝나고 논술 명강사를 찾아 가는 사교육 행렬은 그 끝을 보기 어려울 만큼 장사진을 이룰 것이 뻔하다.

내신과 수능 준비에 녹초가 되어 사는 고교생들에게 논술이라는 본고사격 시험까지 가세했으니 입시경쟁교육의 끝은 과연 어디일지 막막하기만 하다.

교육부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교육부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사교육을 막는 해법으로 종합 감기약이 아닌 해열진통제임을 전제하여 일선 학교에 e-러닝이라는 대체요법을 투입했다.

사교육 수요를 교육방송에 끌어들이려는 야심찬 전략이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나면 'EBS 수능 방송에서 80% 이상이 출제되었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교육이 줄고 있는지 묻고 싶다.

과연 우리 학생들이 EBS 교육 방송으로 사교육 욕구를 해소하고 있을까? 인문계 고교에 18년째 몸담고 있는 현장 교사로서 만약의 설문에 응한다면 그 대답은 결단코 '아니올시다'이다.

아주 놀랍게도 교육방송에 편승하여 인터넷 사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강(인터넷 강의)'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니 또 하나의 사교육을 공공연하게 탄생시킨 셈이다. 논술 또한 그렇지 않은가.

대학 서열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상위 대학에 진입하려는 욕구는 줄지 않는다. 논술이 상위 기득권 대학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논술 준비에 온 국민이 또다른 희생을 감수하지 않도록 교육부가 해결사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

교육부가 나서서 논술 교육의 현실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공교육 기관이 감당할 수 있는 교과와 교육과정을 놓고 대학 전형 방법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이 상식을 대학에 홍보하고 감독하는 역할은 교육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