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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지 않고 비워 두는 남사 예담촌 불혹을 넘겼건만 무엇을 버려야하고 무엇을 채워가야 할지 모르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옛 사람의 삶을 쫓아가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려나?
마을은 당산이 수룡의 머리이고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가 되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형상으로 쌍룡 교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반달 모양의 마을 터를 배 모양으로 생각하여 마을의 중심부에는 그 무엇도 채우지 않고 우물을 파는 것도 금하여 왔다고 한다. 차면 기울기 마련이므로 늘 조금 비워두는 옛사람들이 지혜가 아직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은 마을(현재 340여 명이 살고 있음)에서 나라를 이끌고 학문을 빛낸 많은 인재가 났다. 조선 개국 1등 공신인 이제를 비롯하여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하연,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고 줄곧 병석을 지키고 있다가 숨을 거둔 효자 이윤현, 조선 숙종 때 덕행과 문장이 으뜸으로 명망이 높은 이계 박래오, 그리고 나라 잃은 시대에 나라를 찾기 위해 온몸을 바친 곽종석 등등. 이 마을 출신 현역 국회의원이 6명이나 된다고 한다. 옛 담을 따라 고가와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이영복(49·문화관광 해설사)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동안 묵은 때를 씻고 좀 더 여유롭게 그리고 올곧은 선비의 삶에 다가서고자 한다. 마을을 둘러보고 난 뒤 바로 이웃한 목면시배유지를 찾았다. 이곳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이미 알고 있기에 별 기대 없이 찾은 전시장인데 이영복씨는 목화의 재배에서부터 옷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빠짐없이 정성스레 설명해 준다. 그리고 문익점의 삶에 대해 말한다. 나라를 생각하는 올곧은 마음,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 그리고 관리로서 백성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놓치지 않고 전해 준다. 정성과 자부심이 묻어나는 그의 해설로 문익점이 붓통에 가져온 목화씨가 3알이 아니라 10알이었다는 것을 비롯하여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구형왕릉의 신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왕릉이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 가야 왕의 무덤이 왜 이 곳에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해 해설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설을 들려준다. 6세기에 가야는 신라와 맞서 싸우게 되는데, 그 때 전쟁에 참가한 구형왕은 신라에 밀리면서 화살을 맞았다고 한다. 화살을 맞고 피신해 들어온 골짜기가 바로 이곳인데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이 흙 속에 묻힐 수 없어 돌을 덮으라고 유언을 해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가야가 신라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므로 구형왕은 신라에 가야를 양위하고 만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이기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식읍을 받은 이곳에서 5년간 칩거하다 생을 여기에서 마치게 된다.
하지만 아직 구형왕릉의 정식 명칭은 전구형왕릉이다. 구형왕릉 앞에 전(傳)자가 붙은 이유는 구형왕의 능이라는 확증이 없고, 단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왕릉으로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들이 안내판의 구형왕릉 글자 앞에 써 있는 '전(傳)'자를 긁어서 훼손하여 놓았다. 전이라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다.
해설사는 이 왕릉에 전해 오는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구수하게 전해 준다. 왕릉 위로는 새도 날지 않고, 칡덩굴도 왕릉으로 뻗지 않으며, 낙엽도 능 안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낙엽이 떨어지면 곧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그 낙엽을 다른 곳으로 날려 보낸다고 한다. 또 인근 마을의 한 부자가 명당자리를 찾아 이곳에 아버지 무덤을 썼는데, 그 아들의 꿈 속에 아버지가 나타나 제발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하였단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냥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또 다시 나타나 갈비뼈가 짓눌러 너무 답답하니 제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기에 할 수 없이 이장을 하기 위해 무덤을 파니 시신의 갈비뼈가 부러져 있더라는 것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도 이야기이거니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눈앞의 펼쳐진 석총의 신비로움, 이 산 이름도 왕산(王山)이고 절 이름도 왕산사(王山寺)이니 왕이 이곳에 살았고 묻혔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닐까? 버리고 비워야 맑고 깨끗해짐을 남사 예담촌으로 돌아와 정몽주의 후손인 정구화씨의 사양정사에서 묵었다. 옛날 고가의 기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가이다. 갑자기 돌쇠에서 대감의 삶으로 올라선 기분이다.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이리 오너라"를 외치는 벗이 정겹다. 평상에 모여 모처럼 맞이한 한가로움에 벗들과 한 잔의 술로 시골의 깊어가는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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