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6) 이태준 ‘달밤’ - 上
ㆍ미친년과 바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부분

전쟁과 남북 분단은 우리 문학사를 두 동강이로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의 인생과 문학을 ‘실종’시켰다.

남북 양측의 독재체제에서 내쫓겼던 그들의 문학과 삶은 다행이도 남한의 민주화 과정이 진전되면서 복원할 수 있었고, 이는 북측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서 분단의 극복이란 ‘좌빨 타령’이나 ‘북에 가서 살라’는 폭언과 편향된 생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의 올바른 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태준에 대하여 쓰면서 백석의 마지막 시를 인용한 것은, 이 시가 어쩌면 월북한 이태준의 말년을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방되던 무렵에 신의주에 홀로 살던 백석의 흔적이 나중에 알려진 이 시로 남아 있다. 시 쓰기를 집어치우고 생계를 위하여 측량기사가 되었던 백석의 이 시에는, 시를 쓰지 않는 기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나 있다. 이후 월북이 아니라 재북하고 있던 초기에 그가 행사시나 선동시 몇 편을 남겼다고 하여, 백석이 시인으로 되돌아갔다고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간절한 시인의 노래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 이태준의 급진적인 변화와 월북한 뒤의 처절한 몰락은 ‘인생파’로서의 그의 소설보다 더욱 소설적인 것이었다.

이태준은 1904년 철원에서 태어나 개화당이던 부친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부모가 차례로 사망하자 고아가 되어 친척 집을 전전하며 성장한다. 철원에서 소학교를 나오고 원산에서 객줏집 사환도 하다가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상급반에 정지용 김영랑 박종화 등이 있었으며 가람 이병기가 스승이었다. 동맹휴교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일본에서 신문·우유 배달을 하며 상지대학을 다녔고 나도향과 교유했는데 이때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며 등단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개벽’지의 기자로 취직했으며 1930년 그의 나이 27세 때에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한다.

그는 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하면서 이상의 시 ‘오감도’를 신문에 발표하여 등단시켰다. 박태원 김기림 정지용 이상 등과 9인회를 구성했는데 이는 프로문학의 퇴조에 따른 것이었다. 카프의 검거 해산 뒤에 이들의 모임은 자연스레 순문학 또는 모더니즘 계열로 문단의 주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태준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원들이 일제 말기로 가면서 거의 절필한 것으로 미루어 문학의 독자적 자율성이나 예술주의가 현실에 대응할 만한 방법론으로는 무력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태준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좀 덜했을지는 몰라도 일제에 협력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황군위문작가단과 조선문인보국회에 이름을 올렸으며 몇 편의 친일적인 글줄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고향인 철원 안협에 돌아가 은거했다.

이태준이 해방이 되자마자 ‘관념적인 사회주의자’로 급진화했던 것은 아마도 무기력했던 일제말의 자신에 대한 반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6년 3월에 발표한 ‘해방 전후’는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의 자전적이고 사소설적인 계열의 작품으로 친일에 대한 자아비판과 치열한 사상적 전환에 대한 심경이 그려져 있다.

프로문학과 모더니즘문학 운동은 출발점이 달랐지만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 프로젝트였으며, 결국 모더니즘 계열의 많은 문인들이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월북하게 된다. 이태준은 근대주의자이면서도 왜곡되고 타락한 식민지근대를 비판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면서 처사로서 보신을 했던 것인데, 이후 근대의 주요한 동력인 사회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기도 했다. 다만 그 전환이 ‘인민’과의 생활적 실천 속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해방의 감격과 반성 속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어서 ‘관념적’인 한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준은 해방공간에서 조선문학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이 되었고 예술동맹과 합쳐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위원장 홍명희, 부위원장 이기영·한설야 등과 함께 공동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7월에 이태준은 정리할 것이 있어 삼팔선 이북이었던 고향 안협에 다녀온다며 잠적했다가 모스크바 통신에 의하여 북조선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연이어 평양에 체류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그해 말에 이태준의 평양에서 보낸 소련 방문 메시지가 남한 신문에 실린다.

내가 1989년 방북했을 때 이기영 박태원 홍명희 등의 가족과 면담한 적이 있다고 썼는데, 그 외에도 월북문인들의 후일담에 대해서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남측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궁금증이었다. 나는 초대소에 묵었으며 지도원이 교대로 배치되었고 평양작가실에서 나온 최승칠 소설가가 동반자 겸 중간 조정자로 나와 있었다. 최승칠은 나보다 열 살쯤 연상이었고 함흥 사람으로 김일성대를 나와 노동신문 기자를 거쳐 소설가가 된 사람이었다. 내가 단언하건대 사상과 원칙의 유무를 불문하고 문인은 동업자에게 동정적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조심하였지만 기간이 오래되면서 친해지고 속내를 털어놓게 되어서 나는 제법 많은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인 이용악이 평안도 수로공사에 대한 행사시를 쓰고 별반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과 그의 아들이 화가로서 인민예술가가 되었다는 것, 백석이 아동물을 몇 편 쓴 일, 소설가 한설야가 집안에 외제 카펫을 깔고 보드카를 마시며 소련 사람들과 주말마다 파티를 했다는 둥 하는 소문이 숙청 이후에 알려졌다거나, 무용가 최승희가 남편 안막이 처형되고 벽지로 유배된 몇 해 뒤에 김일성이 보내준 쌀가마를 붙들고 통곡했다거나, 연안파 김두봉이 농장원으로 하방된 지 일년 만에 고된 노역을 못 견디고 작고하거나, 그가 박산운 시인에게서 들었다는데 정지용 시인이 경기도 북쪽 지역에서 미군기에 폭사했다는 이야기, 이태준의 말년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이태준이 1964년에 가까스로 복권되어 당 중앙 문화부 창작실에 배치된 이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몇 년 뒤 다시 지방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최승칠 소설가의 설명에 의하면 ‘소설가나 시인이 국가로부터 집과 급료를 받는데 몇 해 동안 작품을 내지 못하면 당에서 주의를 주고, 그래도 생산을 하지 못하면 전업 배치를 하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