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초상 | 종이 위에 채색 | 50.9×31.5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은 뛰어난 글씨와 그림을 남긴 화가로서, 좋은 글을 남긴 문장가로서, 한성판윤을 지낸 관리로서도 유명한 18세기 예단의 총수였다. 현재 강세황의 초상화는 모두 여덟 점이 전한다. 그의 초상화는 얼굴의 분명한 주름살, 음영법을 쓴 입체 묘사, 명암법으로 처리된 옷 주름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작품도 그러하다

단원 김홍도 뒤에 ‘숨은’ 스승 강세황

안산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의 도시로 통한다. 2002년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단원의 정신을 발전시켜 안산문화예술의 꽃을 피우려는 의미’에서 단원구가 설치되었고, 매년 열리는 단원미술제는 안산시의 대표적인 축제가 되었다.

단원 말고도 안산 관련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김여물(金汝., 1548~1592), 조선시대 중농주의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 일제시대 농촌계몽운동을 펼쳐 소설 <상록수(심훈 저)>의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이 된 최용신(崔容信, 1909~1935) 등이 있지만 1991년 문화관광부에서 안산을 ‘단원의 도시’로 명명한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비단 위에 먹


표암 강세황이 쓴 시구 글씨 | 비단 위에 먹 | 31.5×20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서화 삼절이자 비평가였던 강세황의 작품이다. 연분홍 바탕에 행서로 쓴 이 글씨는 조선 중기의 문인 최전(崔澱, 1567~1588)이 지은 <봄날(春日)>이다. 봄의 정경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한 시와 그의 날카로 우면서도 변화가 큰 필치와 윤필과 갈필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렇듯 안산시가 단원을 시의 상징 인물로 부각시키는 것은 조선 후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 단원이 안산 사람이라는데 기인한다. 그런데 그가 안산 출신이라는 뚜렷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다만, 젖니를 갈 때부터 안산의 강세황(姜世晃, 1712~1791)한테서 그림을 배웠다는 데서 단원이 안산 태생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강세황은 단원의 스승이라는 고리로 겨우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대 예술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예원藝苑의 총수總帥’였다.

안산에서 30년 생활한 안산인이자 경기인

강세황은 서울 남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광지光之이며, 호는 여러 가지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쓴 표암 豹菴은 그의 등에 있던 흰 얼룩무늬가 표범과 비슷하다고 하여 스스로 지은 것이다. 표암은 여섯 살 때 시를 지었으며, 열두세 살 때 그의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미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후 표암의 일생은 크게 안산 시절 (32~61세)과 서울 시절(61~79세)로 나뉜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강백년(姜栢年, 1603~1681)이 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아버지 강현(姜鋧, 1650~1733)은 판서를 지내는 등 명문가였다. 그러나 표암은 맏형 강세윤(姜世胤, 1684~?)이 이인좌의 난에 연계되어 모함을 받고 유배되는 과정에서 환멸을 느낀 나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오직 시.서.화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가 부모상을 마치고 32세 때 처가가 있는 안산 부곡동의 청문당淸聞堂 근처로 이사한 뒤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상경하게 되기까지 30년 동안 그는 안산에서 생활한다.

표암의 안산 이주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두고 2가지 주장이 맞서고 있다. 즉,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청백리에 오를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벼슬이 없는 그로서는 서울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는 견해와 대대로 국가에서 받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가난’의 이유로는 안산 이주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특히 후자는 표암이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예술에만 정진할 것을 결심한 상황에서 학문과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많은 인물들이 안산으로 이주했다고 본다.

안산에는 처남 유경종柳慶種을 비롯하여 이용휴李用休, 임희성任希聖, 허필許佖, 유중임柳重臨, 조중보趙重普, 엄경응嚴慶膺, 이수봉李壽鳳, 최인우崔仁祐, 이맹휴李孟休, 이광환李匡煥, 채제공蔡濟恭, 박도맹朴道孟, 신택권申宅權 등 훗날 ‘안산 15학사’로 지칭되는 인사들이 살고 있었다. 표암은 안산 시절을 통해 이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다져나갈 수 있었다.


처음 서양화법을 도입한 선구자

표암은 끊임없는 실험 정신과 항상 노력하는 자세로 일관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선구자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초상화, 풍속인물화, 산수인물화, 사의산수화(寫意山水畵, 자연에 인간의 이상을 담아 관념적으로 표출한 그림), 진경산수화, 화조화, 정물화, 괴석화, 사군자화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다룬 점, 당시까지 따로따로 그리던 사군자를 처음으로 한 벌로 맞추어 그린 점, 대나무 8폭을 판화로 제작한 점, 서양 거문고를 그려본 점, 새로 접하게 된 안경의 유래, 재료, 종류, 용도를 소상히 기록한 점 등은 그의 진취적인 성향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산수화에 처음으로 서양화법을 도입한 것이다. 그는 평소 어떻게 하면 실제 산수를 보듯이 현실감 나는 산수를 그려낼까 궁리하던 차에 당시로서는 새롭기만 한 서양화법의 요소를 채택했다. 표암의 대 표작인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는 송도의 명승고적을 그린 <송도 기행첩(松都紀行帖, 1757, 개성과 북쪽 지역을 여행하고 그린 16개 의 작품으로 구성된 화첩)> 중의 한 점으로 서양적인 명암법을 이 용하여 입체감을 적절히 구현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청문당 강세황은 부모상을 마친 32세 때 처가가 있는 안산 부곡동의 청문당 근처로 이사한 뒤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30년 동안 안산에서 생활한다. 강세황은 안산에 거주하는 동안 안산 15학사와 폭넓게 교유하며 예술 세계를 풍부하게 다져나갔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4호

최상의 평론은 제자 김홍도에게

표암은 51세 때 갑자기 붓을 꺾기도 했다.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영조를 만났을 때 영조는 표암의 근황을 물으면서 “화가를 천하다고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소식을 들은 표암은 감격하여 3일 동안 눈이 부어오를 정도로 눈물을 흘렸으며, 붓을 태워버리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이 결심은 영조가 살아 있는 동안 변치 않았고, 다시 붓을 잡기까지 20년 동안 창작 대신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가 당대 제일의 평론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해박한 지식과 높은 안목은 물론 시서화에 능했기에 가능했고, 문예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에서 온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글씨나 그림에 대해 논평을 쓰는 데 처음부터 구상한 일이 없이 손 가는 대로 써내려갔지만 한 구절 한 어구라도 새롭지 않거나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표암은 윤순(尹淳, 1680~1741,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 정선(鄭敾, 1676~1759),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등 내로라하는 서화가들의 작품에 방대한 양의 평을 남겼는데, 특히 제자 김홍도에 대해서는 신필神筆, 신품神品, 입신入神 등으로 극찬했고, “화가는 각각 한 가지에 장점이 있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하는데, 단원은 못 그리는 그림이 없고,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 그려 이것만으로도 일세를 울리고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하다”고 평했다.

강세황의 생가 터.


시서화에 두루 능했던 삼절

표암은 평론과 그림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명필로도 이름을 떨쳤다. 표암에 대한 연구가 미술사에서 먼저 이루어진 탓에 상대적으로 그의 시와 글씨가 가려진 느낌이다. 표암의 시와 글 씨에 대한 주변의 평을 들어보자.

강세황은 시가 글씨보다 낫고, 그의 시적 견해 또한 남을 앞지르며 시문에는 깊은 경지까지 나아간 바 있어 홀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 최성대崔成大

우리나라 100년 이래에 이만한 시가 없었다. - 임정任珽

우리는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지만 훗날 누군가 (강세황의 글씨를) 한 자만 얻어도 그것을 무덤에 넣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 임정

어디 그뿐인가. 최성대는 표암이 쓴 글을 보고 “중국 사람의 글씨는 이처럼 따를 수 없다”고 하더니 그것이 표암의 글씨인 줄 알고서 “중국 사람도 이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러한 표암에 대한 평을 종합하듯 정조는 다음의 제문을 지어 그를 칭송했다.

소탈함과 고상함으로 필묵의 흔적을 남기고 많은 종이에 휘호하여 병풍과 서첩을 남겼네 벼슬도 낮지 않았으며 시서화 삼절은 정건(鄭虔, 당의 서화가)을 닮았네 중국에 사절로 다녀왔고 기로소에 들어 선대를 이었네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술잔을 올리네 - 정조의 제문

이처럼 표암 강세황은 시서화에 두루 능한 문인 화가인 동시에 김홍도, 신위(申緯, 1769~1847, 조선 후기 문신 겸 시인이자 서화가) 등을 가르친 교육자였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서화가들의 작품에 수많은 비평을 남긴 평론가로서 18세기 예술계를 이끈 ‘큰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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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과거와 미래의 나를 들여다보다

자화상은 그림으로 쓴 자서전이다. 한 사람이 살아온 내력이 자화상에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자화상은 화가의 마음을 보여주는 리트머스시험지다. 제작 당시의 심리상태가 지문처럼 배어 있다.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타인에게는 가혹하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럽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그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보기 좋게 수정을 하게 된다. 추한 면을 감추어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 ‘꽃미남’이 많은 이유도 이런 심리에 있다.

반면에 노년기에 그린 자화상에는 꾸밈이 없다. 정직하다. 늙어서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 흔치 않지만 자화상을 남긴 화가들도 적지 않다. 렘브란트, 세잔, 피카소, 마티스, 샤갈 등. 사실 이미 살 만큼 산 나이에 거울 속의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 화가의 모습은 섬뜩하다. 생각해보라. 주름진 노인이 거울 속의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을.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에게 정직해지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허세와 달리 노년기의 자화상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며 남은 생을 알차게 살려는 마음의 표현에 가깝다. 자화상은 과거의 자신이 만든 현재의 모습을 통해 미래를 그리는 작업이다.

■일흔 살에 그린 ‘튀는’ 자화상

표암 강세황(1713∼91)이 일흔 살에 그린 ‘자화상’에는 강한 자의식이 아낌없이 드러나 있다. 얼굴의 주름과 광대뼈까지 묘사가 아주 치밀하다. 수염과 눈썹이 눈처럼 희다. 검은 관모에 옷은 흰 도포 차림이다.

그림이 왠지 어색하다. 그것은 흰 도포를 입은 채 검은 관모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관모는 벼슬아치들이 쓰는 모자이고 도포는 벼슬에 나가지 않는 선비들의 평상복이다. 삿갓 쓰고 양복 입은 꼴이다. 표암은 자신을 왜 이렇게 그렸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림 좌우에 나누어 쓴 글에 당시 표암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머리에는 관리가 쓰는 검은 모자를 쓰고 몸에는 야인의 옷을 걸쳤다. 마음은 산수간에 있고 이름은 조정에 오른 걸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마음은 한적한 산수간에 있지만 몸은 관직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표현기법도 특이하다. 전통적인 초상화는 평면적인데 표암의 자화상에는 입체감이 살아 있다. 홀쭉한 볼이며 미간의 주름살까지 입체감이 생생하다. 도포의 묘사도 그렇다. 옥색의 도포에 옥색으로 선을 짙게 그은 다음 그 주위에 선염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이른바 ‘태서법’이라고 하는 음영법을 사용한 것이다. 서양화법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또 다른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입체감 있는 표현 속에 표암의 위엄과 깐깐한 성미가 형형하기 그지없다. 그는 이들 외에도 6폭의 자화상을 더 그렸다. 호산관 이명기가 그린 일흔한 살 때 표암의 초상화도 있다. 이 초상화에서 표암은 관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있다. ‘자화상’과 달리 모자와 옷의 차림새가 자연스럽다.

■모자와 옷으로 표현한 마음의 풍경

표암의 ‘자화상’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는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통해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시서화 삼절’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오로지 홀로 공부에 전념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곧은 자세를 잃지 않았다. 불운도 겹쳤다. 1756년에 아내를 잃었다. 슬픔을 달래기 위해 표암은 송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때 그린 그림들이 송도의 명승지 12곳을 그린 ‘송도기행첩’이다. 이 여행 후 표암의 예술세계는 변화를 겪는다. 그는 자신을 배려해준 영조의 은혜에 감동하여 10년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이 시기에 화가로서의 경험과 탁월한 식견으로 다른 화가의 그림에 대한 평론을 많이 남긴다.

그러다가 예순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간다. 영조의 특별한 배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임을 한다. 나이가 많아서 관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듬해에 다시 벼슬을 받는다. 한적한 시골 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달리 바쁜 관직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자화상’은 관직 생활을 할 당시의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도 ‘튀는 차림새’의 모자와 옷으로 표나게 처리되어 있다.

표암은 오랫동안 쌓아온 내공으로 한 사람의 문인화가이자 서화 감식가로서 18세기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벼슬이 정2품까지 오른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혹한 인물이었다. 고령임에도 부단히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존을 벼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