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본에 담은 추사체의 숨결

전시기간 : 2004 , 2 , 4 - 2 , 18

전시장소 : 과천시민회관

[한겨레신문]

[한겨레] 조선 말기 우리 문화사에 법고창신의 문화바람을 불러일으킨 대문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예인적 기질을 대표하는 것은 아무래도 추사체로 유명한 글씨다. 고대 중국 전한의 예서 등 옛글씨를 평생 습자하고, 광범위한 문헌을 편력하며 만든 그의 필력은 잘 되고 못 되고를 굳이 따지지 않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숱한 유배살이의 고초를 끝내고 경기도 과천의 초막에서 죽을 때까지 후학들을 가르치며 지낸 이른바 1852년부터 4년간의 과천시대는 원숙한 예술기량이 활짝 꽃을 피운 추사예술의 원숙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추사체의 명작이라고 일컫는 많은 글씨들이 바로 이 과천 은거 시절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18일 경기도 과천 시민회관 전시실에 마련되는 ‘추사체의 진수, 과천시절 추사글씨 탁본전’은 이 과천시대를 중심으로 추사체의 진수를 친필 대신 찍은 탁본이라는 색다른 매체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음미할 수 있는 기회다.

과천시민회관, 탁본만으로 70여점 전시
원숙기의 변화무쌍한 기운·조형미 물씬

행사를 주최한 과천시와 한국미술연구소 쪽은 이번 전시가 글씨 탁본만으로 여는 최초의 추사 글씨 전시라고 밝히고 있다. 친필 작업이 공개된 적은 많으나 일반인들이 훨씬 실감나게 접근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목각이나 비석 글씨의 탁본을 통해 기운과 조형미, 그리고 굴곡 많은 인생사가 함께 녹아있는 추사체의 숨결을 좀더 생생히 느끼게 하겠다는 뜻이다.

출품작은 모두 70여 점으로 전국에서 모은 현판과 주련으로 된 목각 탁본 40점을 중심으로 목판 글씨첩, 금석문 탁본 등이 나온다. 31살 때 쓴 ‘이위정기’(以威亭記)부터 제주도 유배기를 거쳐 세상을 뜨기 3일 전에 고졸한 필치로 쓴 봉은사 경판전의 현판 ‘판전’(板殿)까지 시기별로 전서, 예서, 행서 등 다양한 서체의 추사 글씨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대흥사에 남은 목각 현판 ‘소영은’(小靈隱), 강릉김씨묘비의 전면 글씨, 통도사에 있는 ‘노곡소축’(谷小築) 등은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이들 탁본 원본의 대부분이 흩어지거나 사라진데다 전각이나 누각의 현판처럼 큰 글자 위주의 작품이 많다는 것은 전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여러 서체의 장점들을 두루 취한 추사체의 매력은 전서·예서·해서·초서 등을 한데 섞어 쓰면서도 필획의 강력한 힘과 담백한 품격, 엄정한 질서를 겸비한다는 데 있다. 예서를 쓰면서도 초서 기운이 있고, 초서를 쓰면서도 예서나 전서 기운이 들어가는 추사체는 글자 자체의 아름다움을 따지기 앞서 변화무쌍한 서체의 기운생동을 무심하게 주목하는 것이 제일 좋은 감상법이라고 전시 기획자인 김영복(문우서림 대표)씨는 말한다. 주최 쪽은 이와 함께 그동안 일반인들에게 추사 글씨의 면모를 전해온, ‘판전’(板殿)을 비롯한 10여 종의 탁본첩 제작·유통자가 추사의 애제자인 소치 허련이었다는 사실도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이 사실은 소치연구회원 김상엽씨가 전시도록에 쓴 논문에 소개될 예정이다). 한편 과천시 쪽은 추사가 은거한 과천 과지초당, 우물터 등을 복원하고, 2006년에는 추사 관련 학술세미나 개최 의사도 밝히는 등 추사를 지역의 상징인물로 삼기 위해 각별히 애쓰는 눈치다.

 

 

 

[동아일보]

 

추사 탁본展 타계 사흘전 쓴 글씨 등 70점 한자리에

 

 

비석이나 현판 글씨는 예로부터 글씨의 최고 경지라 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과 통하는 ‘영매(靈媒)’적 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쓰는 사람은 온 정성을 다해 썼다. 아울러 제의적 성격도 있다보니 엄격하면서도 깊이 있는 서체가 요구되었다.

그렇다면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쓴 현판이나 비석글씨는 어떠했을까. 추사 글씨를 탁본해 모은 이색 전시회가 마련된다. 친필 전시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탁본 전시회는 드물었다.

정쟁(政爭)으로 인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 년 간의 유배생활을 끝낸 추사는 60대 후반부터 일흔한 살로 세상을 뜰 때까지의 말년을 부친의 묘소가 있던 경기도 과천에서 보냈다. 이런 인연으로 과천시는 한국미술연구소(소장 홍선표)와 공동으로 4∼18일 경기도 과천 시민회관에서 ‘추사체의 진수, 과천 시절-추사 글씨 탁본전’을 개최한다. 31세 때 쓴 최초의 비문 ‘以威亭記(이위정기)’에서부터 죽기 사흘 전에 썼다는 서울 봉은사의 현판 ‘板殿(판전)’까지 70점이 전시된다.

홍 소장은 “전각이나 누각 현판들은 폭이 3m에 이르는 대작들이 많은 데다 전시작 중 40% 정도는 글씨의 원본 자체가 없음을 감안할 때, 이번 전시회는 친필과 함께 추사체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추사 예서 중 백미로 꼽히는 ‘一爐香閣(일로향각)’은 현재 통도사 현판이지만 1847년 영천 은해사 화재로 전각들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추사가 쓴 현판 중 하나로 추정된다. 굳세고 힘차면서도, 굵고 가늘기 차이가 심한 필획으로 특유의 파격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봉은사 현판 ‘板殿’ 글씨처럼 고졸하면서도 강건한 힘이 들어 있는 ‘불광(佛光)’도 눈에 띈다. 경북 영천 은해사 내 불광각에 걸려 있던 현판 글씨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문우서림 김영복 대표는 “현대 미술에도 판화가 있듯, 잘 된 목각이나 석각의 탁본글씨는 원본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며 “추사 탁본은 대부분 만년작이 많은데 말년의 쓸쓸함과 원숙미, 천진난만함이 뒤섞여 추사체의 정수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탁본으로 만나는 완당 예술의 혼”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말이다. 명필의 대명사로 흔히 말하는 ‘추사체’가 정확히 어떤 글씨를 말하는 것인지 묻는다면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달 4일부터 18일까지 과천 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추사체의 진수, 과천 시절-추사 글씨 탁본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탁본의 대상인 비석과 현판 글씨는 서예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글씨이니만큼 추사체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에는 추사가 31세 때 쓴 최초의 비문인 ‘이위정기(以威亭記)’에서부터 71세 때의 봉은사 ‘판전(板殿)’까지 대표적 탁본 70여점이 출품된다. 특히 ‘강릉김씨묘비(江陵金氏墓碑)’, 대흥사 목각현판 ‘소영은(小靈隱)’, 통도사 ‘성담상게(聖覃像偈)’와 ‘노곡소축(老谷小築)’이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다. 또 추사의 제자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묶은 탁본첩 10여종도 함께 공개된다.

이번 전시작 중에서 원본은 소실되고 탁본만 전하는 작품이 40% 정도임을 감안할 때, 추사 탁본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했을 정도로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

추사체는 추사의 글씨를 24세까지의 습작기, 25세 연경을 다녀온 후 55세 제주 유배기까지, 마지막으로 제주 유배에서 풀렸다가 북청 유배를 거쳐 71세를 일기로 과천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3단계로 나눌 때, 보통 세번째를 말한다. 추사체의 절정은 사망 사흘전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 서울 봉은사 ‘판전(板殿)’을 드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졸박기고한 미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추사체는 괴이하고 당혹감을 주기도 한다. 일찍이 추사와 동시대 인물인 초산 유최진은 “마치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을 함부로 걸쳐 예법으로는 구속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감히 비유하면, 불가와 도가에서 세속을 바로잡고자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다고 할까”라고 평했다.

추사는 초기에는 주로 명나라 서예가 동기창의 필법을,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청의 옹방강을 따랐고, 이후 소동파를 거쳐 구양순 체를 본받았다.

그러나 제주 귀양을 가서는 이 모든 필법을 모아 자신만의 독특한 필법을 구현했다. 제주 귀양살이는 조선 후기 세도가 경주 김씨 귀공자였던 추사의 개인적 일생으로 볼 때는 몹시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예술가로서는 오히려 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가이자 미술사학자였던 이용희(1917~1997)는 “추사체의 괴(怪)한 개성은 제주 유배시절 울적한 심사를 달래고 쏟아내 버리기 위해 글씨를 쓰다가 얻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추사의 예술세계는 이처럼 ‘제주 유배시절에 피어난 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시회가 열리는 과천은 추사가 북청 유배에서 풀린 후, 1852년부터 1856년 7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머물렀던 곳. 추사, 완당을 포함한 100여개 호(號) 중에는 ‘과노(果老)’ ‘병과(病果)’처럼 과천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여인국 과천시장은 “앞으로 전시회와 서화전 등 추사와 관련된 문화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는 한편 ‘추사로’를 지정하고, ‘추사연구회’도 발족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김정희 상김정희는 1786년(정조 10년) 6월 3일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생가는 오석산(용산)의 화암사 부근으로 증조부 월성위(月城尉)와 증조모 화순옹주의 묘소도 근처에 있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딸로 조선왕조 최대 비운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이다. 훗날 그녀의 조카 정조는 화순옹주를 위하여 조선왕조 처음 나온 열녀라하여 열녀문을 세워주웠다.

추사의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무수히 많으나 추사를 비롯하여 완당(阮堂), 예당(禮堂), 노과(老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 유명하다.

추사는 아버지 병조판서 노경(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노영(魯永) 앞으로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의 추사는 무척 똑똑했던 모양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날 당시 채제공이 추사의 집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써붙인 입춘첩(立春帖)을 보았다. 그는 그 글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고 문을 두드려 물었다. 마침 김노경이 있다가 깜짝 놀라 뛰쳐나와서는 아들의 글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채제공이 말했다.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그 어린 신동의 운명은 나중에 과연 채제공의 예언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어린 시절을 주로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1800년 열다섯의 나이로 한산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혼례를 올렸다. 그렇지만 그 전후 무렵 추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니, 할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이미 죽은 데다가 결혼 이듬해인 1801년에는 생어머니마저 죽고 다시 1805년에는 부인 한산 이씨마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마디로 추사의 십대 시절은 집안의 여러 흉로 무척 쓸쓸했다고 하겠다.

추사는 1808년 스물셋의 나이로 예안 이씨와 재혼했다. 다행히 둘 사이는 금슬이 무척 좋아 나중에 추사가 귀양 갔을 때에도 언제나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추사의 생부 노경이 호조 참판을 지내던 중 1809년 중국 연경(북경)에 보내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선임되자, 그때 사마시험에 합격했던 추사는 외교관의 아우나 자식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이 일은 추사의 인생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추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도나요리는 청나라 경학과 고증학을 연구하던 중 조선과 청의 지식인 학자들이 교류하는 과정에 흥미를 갖고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는데, 그 연구 결과 이렇게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백년 역사상 보기드문 영재 완당 김정희가 출현하여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 두 경사(經師)를 알게 되고, 여러 명현들과 왕래하여 청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귀국하자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백년 내로 보지 못했던 빠른 진전을 보게 되었다." 외국인 연구자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추사는 최초의 연경행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추사는 연경에 두달 남짓 머무르지만, 그동안 당대 제일급에 속하는 학자와 예술가들을 무수히 만났다. 특히 연경학계의 원로로서 당대 제일의 금석학자로 널리 알려진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추사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일러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또 한 사람의 대학자 완원(阮元, 1764-1848)은 완당(阮堂)이라는 호까지 지어주며 애정을 보였다.

두 사람은 추사에게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무수한 금석문 자료들을 기꺼이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추사가 학문적 호기심을 보이는 모든 분야에서도 가능한 자료를 구해주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두 사람 이외에도 무수한 학자, 예술가들이 추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추사는 그들과의 만남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내 낳은 곳은 미개한 나라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있네"라고 사대주의적인 느낌마저 드는 이별시를 남길 정도였다.

어쨌거나 수레 가득히 선물을 싣고 돌아온 추사는 이제 어제의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었다. 그는 선물로 받아온 학술자료며 예술품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고증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펼쳐보였다. 1816년 북한산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새로 발견한 것이 그 첫 업적이었다. 아울러 탁본을 연구하여 황초령 순수비도 고증했다. 그런 연구 결과는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으로 집대성되었다.

추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실사구시는 흔히 실학의 캐치프레이즈로서 이해되는 "현실에 즉해서 참을 구한다"라기보다는 "사실에 의거해서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중국에서 배운 바가 있다면 철저히 사실에 의거하고자 애쓰는 학문자세였고, 그것이 이제 추사의 학문 태도에도 어느새 깊숙이 뿌리박혔던 것이다.

그는 금석문뿐만 아니라 천문, 경전 등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논저를 상대적으로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연경학계와의 교류는 연경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어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필료로 하는 자료를 요구하고 또 보내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추사는 중국에서 보내주는 금석문의 글씨체를 연구하여 마침내 저 유명한 추사체를 이루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1819년 추사는 서른넷의 나이로 과거 시험 대과에 합격하여 마침내 출세길로 접어든다. 그는 규장각 대교(待敎),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檢祥=정5품), 예조 참의(參議=정3품) 등을 거쳐 44세때에는 시강원 보덕(輔德)에 이른다. 한편 그의 부친 김노경은 연경에서 귀국한 후 20년 동안 공조판서,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평안감사에 이르기까지 요직 중의 요직만을 두루 거치는 영예를 누렸다.

1830년 김노경이 64세 되던 해 부사과(副司果) 김우명이 비인현감때 추사에게 파직당한 구원을 잊지 못하고 비열한 탄핵을 시작했다. 당시 왕이던 순조는 추사 가문을 적극 비호했지만 반대파의 공격 또한 만만치 않아 결국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위리안치되는 귀양살이를 떠나고 말았다. 김노경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노경은 1838년 세상을 드고, 추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렇지만 다시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하는가 싶던 그에게 다시 시련이 닥쳐온다.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들이 다시금 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순조는 이번에도 추사를 옹호하였으나, 당시 안동 김씨들의 세력은 왕의 그런 권위까지 무시로 넘볼 정도였다. 추사는 마침내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죽음 일보직전에서야 풀려나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추사는 귀양길에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들러 친하게 지내던 초의(草衣)선사를 만났다. 그는 침계루(枕溪樓)라는 누각의 현판과 대웅보전의 현판을 당장 떼어내라고 초의에게 말했다. 그것들은 당대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던 것이다. 하지만 추사가 보기에는 원교야말로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추사는 직접 붓을 들어 '대웅보전' 네 글자를 써주었고, 거기에 보태 '무량수각' 현판까지 새로 써주며 그것들을 걸라고 했다. 추사는 귀양에서 돌아올 때 역시 원교에게 사과했다. 이 일화는 비록 귀양을 가는 몸이지만 당시 추사가 얼마나 자신의 글씨에 대해 자신감을 지녓는지 알게 해준다.

제주도 대정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추사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붓을 쉬지 않았으니, 이제 우리가 보는 저 위대한 [세한도] 역시 이 시절의 작품이다.

유배 도중 추사는 아내를 잃는 비운을 당한다. 이때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그는 아내의 죽음에 부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어떻게 월로께 하소를하여 서로가 내승에 바꿔 태어나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那將月 訟冥司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

어쨌거나 유배 생활은 추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뜨게 해주었으니, 그의 글씨는 이제 이전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가령 그가 귀양오던 해 대둔사에서 쓴 '무량수각' 글씨와 유배중이던 1846년에 쓴 고향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유홍준 교수의 해석을 들어보자.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富)티와 자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다. 이에 반하여 귀양 와서 쓴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매마른 듯 순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박규수가 말한 바 완당 중년 글씨의 병폐라던 '쓸데없이 기름진 것'이 귀양살이 7년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어찌보면 군살을 털어낸 듯한 경쾌함도 있다.

또 어찌보면 대둔사 글씨는 중국 글씨의 냄새가 남아 있는데 귀양 와서 쓴 글씨에는 차라리 화강암의 골기(骨氣)가 느껴지니, 앞의 것이 국제적 감각이라면 나중 것은 민족적 내지 완당 개성의 체취가 느껴진다. 그래도 이런 얘기를 못 알아듣는 이를 위해서 나는 대둔사 무량수각은 중국 요리의 란자완스 같고 귀양 와서 쓴 무량수각은 굵은 국수발 같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러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뜻을 보이곤 한다."

일찍이 일본의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린(齌塚隣)은 김정희의 고증학·금석학을 일컬어 "청나라 학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는데 이는 그의 글씨에 대해서도 똑같이 대입시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추사체라고 하는 것 역시 제주 유배생활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추사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말이 많지만, "괴(怪)"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야말로 사람의 능력 밖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능력은 그저 천재성의 발로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쉬지않고 노력하는 예술가이기도 햇던 것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칠생 평생에 벼루를 열 개씩이나 밑창을 바닥내고 붓을 일천 자루나 망가뜨렸다고 하니,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는 스스로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 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 끝에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기본이며 예를 쓰는 신결(神訣)이 된다."

추사는 1848년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햇수로 9년째였다. 그는 이후 서울 용산 한강변에 집을 마련해서 지내는데, 시련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모함을 받아 1851년 함관령을 넘어 북청으로 유배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이때의 유배는 일년간이었지만, 유배에서 풀려나오는 그는 이미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 소치 허유, 소당 이재관, 대원군 이하응 등을 들 수 있다.

세한도, 부작란도(불이선란), 김정희상, 추사고택, 화암사

* 이종룡과 함께하는 우리역사 [http://dugok.x-y.net] 글 그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