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저더러 젊게 산다고 하지만, 저 스스로는 거울에서 얼굴을 볼 때마다 세월을 실감합니다.” 방송인 황인용(71)씨는 이렇게 말하며 특유의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누가 ‘발라드 음색’이라고 평한 목소리가 여전히 듣기 좋았다. 그의 얼굴은 자신의 말대로 세월의 흔적인 주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왠지 젊은 분위기를 풍겼다. “저는 웬만한 공식석상이 아니라면 대체로 블루진을 입습니다. 스티브 잡스 흉내 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웃음)…. 늘 음악의 세계에 정신을 두고 사는 것이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요. 이 나이가 됐지만 성인질환을 겪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음악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지난 7일, 경기 파주시 헤이리예술마을의 카페 ‘카메라타(Camerata)’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다.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베스트셀러로 인기가 높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소개된 덕분에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곡이다.
관악기가 주도하는 앞부분이 행진곡풍이기 때문에 황씨와 나누는 대화를 음악이 압도했다. 그는 방송에서처럼
리드미컬한 어조로 나긋나긋 말을 했기 때문에 제대로 들으려면 몸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도 스피커의 볼륨을 줄여 달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10여명의 손님이 음악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곡은 저기 계신 초로의 신사 두 분이 신청했어요. 두 분은 친구 사이인데 예전에 음악다방 ‘
르네상스’ 다닐 때의 향수를 여기서 달랜다고 해요. 저런 모습을 보면 이 카페를 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모임에서 이름을 딴 ‘카메라타’는 황씨가 7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는 고전음악
감상 카페다. 방송 진행을 쉬게 됐을 무렵에 우연히 신문을 통해 헤이리마을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참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카페에서 신청 음악이 없을 때는 직접 곡을 고른다고 했다.
―방송에서는 주로 팝 음악을 소개하는 진행자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고전 음악만 틀어줍니까.
“때로 재즈와 팝송 명곡도 들려주는데 80~90%는 클래식을 위주로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신이 없어요. 젊어서 팝 음악을 너무 들어서인지 음반을 모을 때 클래식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잘 모르는 분야를 배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다 보니 팝 앨범이 별로 없어서 지금은 약간 후회가 됩니다.”
그가 음반 컬렉터이자 오디오 마니아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980년대부터 1만5000장 정도의 앨범을 수집했다.
“저는 음반을 수집한 지 30년밖에 안 됐으니 사실 일천한 셈입니다. 1960, 70년대부터 모아서 반세기가 넘은 분들도 많습니다. 몇 분께서는 소중한 앨범을 수 백장씩 저에게 기증해 주시기도 했지요.”
카페의 DJ룸에서 앨범 일부에 ‘김경원(전 주미대사) 박사’, ‘삶과꿈(대표 김용원) 컬렉션’ 등 기증자와
단체들의 이름을 쓴 라벨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희귀한 LP판도 흥미롭지만, 이 카페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전면 벽을 채우고 있는 거대한 스피커들이다.
―오디오 수집도 1980년대부터인가요.
“제가 1970년대까지는 너무 가난했어요(당시 방송사 아나운서 월급이 많지 않았던 탓에 종손으로 대가족의 가장이었던 그로서는 여유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80년대에 프리랜서를 하면서 돈을 벌게 되니까 평소 관심이 있던 오디오를 살 수가 있었지요. 그래서 60년대부터 음반 컬렉션을 하고, 70년대부터 오디오를 (수집)했다는 사람 앞에 가면 저는 완전히 꼬리를 내립니다.(웃음)”
―그렇게 말씀하셔도 국내에서 드문 명품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카메라타’에는 1930년대 미국의 극장에서 쓰던 웨스턴일렉트릭과 독일 히틀러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클랑필름 제품이 설치돼 있다.)
“저는
과학의 힘으로 만든 최신 오디오보다 소리의 물리적 본성에 충실한 앤티크 오디오에 관심을 뒀어요. 지금 소리가 나고 있는 것은 히틀러 정권 때 만들어진 것이에요. 1990년대 중반에 독일에 가서 사 왔습니다. 그때는 값이 견딜 만했는데 지금은 아마 수억원에 달할 거에요. 투자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웃음) 과거엔 일본인들이 빈티지 오디오를 많이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중국 부자들이 오디오에 관심을 두면서 시장의 값을 올리는 상황입니다.”
(그는 인터뷰 중에 카페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좌석에 있는 손님들에게 찾아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왔다. 그의 얼굴엔 웃음이 넘쳤다.)
―고향인 파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음악과 더불어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럽다는 이들이 있더군요.
“저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임진각 근처의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가난한 선비였기 때문에 여유 있는 형편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났던 탓에 그 시절엔 음악을 접할 환경이 되지 못했지요. 중학교 때 서울에 와서야 성악가인 선생님 덕분에 음악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런데도 생활이 궁핍하니 음악
공부를 정식으로 해 보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대학생 때 ‘르네상스’도 가 보고, ‘쎄시봉’도 한 번인가 가 봤지만, 클래식은 전혀 접하지 못했지요.”
(그는 이 대목에서 LP 앨범 한 장을 가져와 속 알맹이를 꺼내 들었다.)
“제가 대학생 때 LP 때문에 열등의식을 엄청나게 느낀 적이 있어요. 당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집의 큰아들이 LP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몰라서 마구 만졌어요. 그랬더니 큰아들이 LP 가운데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서 드는 것이라며 망신을 주더군요. 집에 LP는커녕
라디오도 없을 때이니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세월이 흘러도 그 장면이 잊히지가 않았어요.”
―그런 분이 음악방송 진행자로 이름을 떨쳤군요.(웃음) 1970년대 중반에 TBC 라디오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제가 팝송 DJ를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정부에서 방송국에 심야 프로그램을 아나운서에게 맡기라는 지시를 내려서 제가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당시 이장희, 윤형주 등 인기 가수들이 음악방송 진행을 하니까 청소년들이 너무 몰입을 했어요. 생방송 전화 연결이 폭주해서 시내 전화선 마비 사태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점잖고 재미가 덜한 아나운서들을
동원한 것이지요.”
재미가 덜한 아나운서로 꼽혔던 그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통해 팝 음악의 전도사로 거듭나며 스타 진행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80년 방송 통폐합으로 TBC가
KBS로 넘어갈 때, 그의 고별 방송은 청취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오늘 자정을 기해 여러분 곁을 떠나려 합니다. (중략)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울먹임) 여러분이 아끼던 동양방송은 사라져도, 동양방송의 기억을 묻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끝으로… 여기는 639킬로헤르츠, HLKC 동, 양, 방, 송, 입니다.’
―당시 신군부가 철권을 휘두를 때인데,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는 않았습니까.
“지인이 청와대에 있었는데, 집으로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 방송을 왜 그렇게 하시죠?’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15년 가까이 일했던 방송국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인간의 감정이 북받쳐서 즉흥적으로 그런 멘트가 나간 것이지요.”
―KBS 라디오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는 전설적인 방송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부자씨와 15년이나 호흡을 맞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지금 생각해 봐도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강부자씨는 편지를 읽을 때 발군이었습니다. 서민들의 사연이 담긴 편지인데, 강씨가 반듯한 생활인이니까 그 내용들을 너무 잘 이해했지요. 저는 그것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 역할이었는데 강씨와 격의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했지요.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TV 아침프로그램을 진행한 적도 있지요.
“아침에 생활정보 프로그램을 하면서 경쟁 프로와의 시청률 경쟁 때문에 몹시 지쳤습니다. 그런 참에 외환위기가 터져서 제작비가 많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라고 폐지가 됐지요. 그렇게 지상파 방송에서 물러났습니다. 14년이 됐지요. 저는 방송을 그만둘 때 고별쇼 비슷한 것을 하고 싶었어요. 제 프로그램을 거쳐간 각계 인사들을 초대하고 노래와 이야기가 섞인 고별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없이 흐지부지…. 이제 세월이 너무 지나가버렸지요.”
(황씨는 이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는 이후 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2005년 그만뒀다.)
―앞으로의 꿈은.
“대단한 꿈은 없습니다. 인생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지요. 여태껏 저는 무슨 꿈을 갖고 거기에 매진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쳇말로 시크하게 답했으나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방송인으로서, 일상인으로서 그의 현재 소망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하나.
“방송을 다시 시작한다면, ‘장수만세’를 시대에 맞게 변형시킨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요. 60세 이후의 사람들이 가족들을 모아놓고
노래자랑도 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하는 프로그램.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가치와 인간의 심성을 전달하는….”
그 둘.
“사진작가인 아들이 30대 후반입니다. 딸은 미술사를 공부해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데, 올해 마흔입니다. 둘 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부모 일도 잘 도와주는데,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 미치겠어요. 제가 11대 종손이거든요.”
인터뷰 = 장재선 차장(문화부)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