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반항으로 사회 통념에 도전한 최북
[명화로 보는 논술] 최북 ‘풍설야귀인도’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경희대 강사
한국의 반 고흐, 최북

아마 고흐는 잘 알아도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를 살다간 우리나라 화가 중 최고의 기인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1786?)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스스로를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범상치 않았던 최북은 또한 자신의 이름 ‘북(北)’자를 반으로 쪼개어 ‘칠칠(七七)’이라고 불렀다. 당시 중인계급의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그림을 잘 그려 명성을 얻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 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 산수(崔山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그는 엄격한 신분제에 대한 반항심과 화가로서의 자존심, 술과 기행으로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이런 파란만장한 최북의 삶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림은 자기가 그리고 싶을 때만 그리고, 그려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그려주었다. 그림을 그려준 사람이 맘에 안 들어 하거나 요구사항이 계속되면 받은 돈을 도로 돌려주고 그림을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작품이 지금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 ▲ 최북,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 종이에 수묵담채, 66.3×42.9㎝, 조선시대(18세기), 개인소장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칠칠이’

어느 날 별로 탐탐치 않은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찾아와 그의 솜씨를 트집을 잡자 화가 난 최북은 급기야 자기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버렸다. 애꾸가 된 최북은 그 후로 전국을 유랑하며 그림을 팔아 얻은 동전 몇 닢으로 자신을 천대하는 세상을 원망하며 술에 취해 지냈다. 결국 어느 추운 날 한밤중에 그림 한 점을 팔고는 열흘을 굶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곽 모퉁이에 쓰러져 얼어 죽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속의 뜨거운 열정

여기 그의 삶을 대변해 주는 작품이 있다. 최북이 보여준 기인의 면모는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에 잘 나타난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귀가하는 나그네를 그렸다. 그림 속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에서 최북의 거침없는 성격과 그의 고달픈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지두화(指頭畵)’로 알려져 있다.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으로 그의 손놀림에 불 같은 성격과 광기가 더해져 있다.

최북의 그림은 세상에 대한 불만과 쓸쓸한 인생의 회한을 받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최북은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정으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한 화가였다. 그의 삶은 늘 불만스러움과 고독이 함께 했다. 쓸쓸한 그의 최후를 보면 그가 그린 그림 속에 그의 불편한 심사가 그대로 묻어난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인생

다음은 그의 지인이 남긴 최북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다.



‘그대는 최북이가 눈 속에 죽은 것을 보지 못했는가?

담비 가죽 옷에 백마를 탄 이는 어느 집 자손이냐?

너희들은 어찌 그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자신에 차있는가?

최북은 비천하고 미약했으니 진실로 애달프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심히 굳세었다.

스스로를 칭하여 붓으로 먹고 사는 화사(畵師)라고 했다.

체구는 단구에 작았으며 눈은 애꾸였지만 술 석잔 만 들어가면 두려울 것이 없고 거칠 것 없었다.’

▲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경희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