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대, 식물이 육지로 진출한 비밀

탈수 상태 견디는 ANR 유전자 발견

2016.06.02 09:27 이성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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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5억년 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의 지구 육상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었다. 세균은 물론이고 나무나 가녀린 풀잎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세상이었다. 연못은 있었지만 심지어 그 위엔 수초도 자라지 않았다.

대신 물속은 시아노박테리아나 녹조류, 갈조류 같은 생물들로 가득했다. 태양의 강한 자외선을 막아주고, 온도 변화도 크지 않아 생존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또 물속은 부력으로 인해 중력을 거슬러서 이동하거나 성장하기 쉬울 뿐더러 무엇보다 생명체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을 얻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에 비해 육상은 물속의 장점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황무지였다. 강한 자외선이 그대로 내리쬐고, 물을 구하기 힘든 건조한 환경에다 심한 일교차까지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야말로 생명체가 존재하기 힘든 황량한 외계 행성 같은 세상이었다.

이끼의 일종으로 실험에 흔히 사용되는 육상 식물인 ‘피스코미트렐라 파텐스’. 이 식물이 극단적인 탈수 상태를 견디는 데 꼭 필요한 유전자가 ANR이다. ⓒ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4억2500만년 전의 고생대 실루리아기 때는 ‘쿡소니아’라는 식물이 번성하고 있었다. 1937년 영국 웨일스 지방의 지층에서 발견된 이 식물은 양치류의 일종으로서 최초의 육상 관다발 식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쿡소니아는 육상에 진출한 최초의 식물은 아니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오르도비스기 말 육상에 이미 선태류(이끼류)가 존재했음이 밝혀진 것. 따라서 태고의 물속 식물인 녹조류가 최초로 육상에 진출한 후 선태류로 분화되었다가 양치류로 진화해 왔다는 가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생명 탄생 이후 가장 위대한 사건

원시양치류는 솔잎란류와 석송류, 고사리류 등으로 진화를 거듭해 데본기 중기(약 3억9000만년 전)에는 식물의 뿌리와 잎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석탄기에는 약 50m에 달하는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아직 나무를 썩힐 미생물이 등장하지 않았던 때라 쓰러져 죽은 나무들은 첩첩히 쌓여 석탄층을 이루었다.

육상에 식물이 이처럼 번성함에 따라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동물들도 육지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식물의 육상 진출은 지구상의 생명 탄생 이후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불린다.

물속에서만 살던 녹조류가 육상으로 진출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했다. 우선 강한 자외선 문제다. 이는 물속의 다양한 조류들이 해결해주었다. 풍부해진 조류들이 광합성 활동을 열심히 한 결과 산소가 거의 없었던 지구 대기의 약 10% 이상이 산소로 채워지게 되었던 것. 그 산소의 일부가 번개의 방전 등에 의해 오존이 되어 오존층을 형성함으로써 강한 자외선을 막아주었다.

식물이 육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뿌리와 잎, 줄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런 구조로 분화된 것처럼 보이는 갈조류가 육상 진출에 더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육상 진출에 성공한 건 구조가 단순한 녹조류였다. 그 이유는 녹조류의 표면에 발달한 큐티클층 때문이었다. 큐티클층은 체내의 수분 증발을 막아 육상의 건조한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하나, 물속에서만 살던 식물이 육상이라는 생소한 곳에 진출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돌연변이라는 유전자의 변화다. 유전자의 변화 없이 생소한 육상에 진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의 의미하기 때문이다.

식물 육상 진출 도와준 핵심 유전자 발견

그런데 식물이 물속에서 육상으로 올라올 수 있게끔 도와준 핵심적인 유전자가 최근에 발견됐다. 영국 리즈대학 식물과학센터의 앤드류 커밍 박사팀은 오래된 육상 식물의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ANR 유전자가 바로 그 핵심 유전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 이 연구결과는 미국 식물학회의 학술지인 ‘식물세포(The Plant Cell)’에 게재됐다.

‘사이언스데일리’ 지에 게재된 커밍 박사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제껏 이 유전자가 확인되지 않았던 이유는 기존 연구의 대부분이 현생 속씨식물(꽃을 피운다고 해서 현화식물이라고도 함)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ANR 유전자는 속씨식물의 진화과정에서 사라졌던 것.

커밍 박사팀은 이번 연구에서 ANR 유전자가 처음 육상으로 올라온 식물처럼 해부학적으로 단순한 식물이 탈수 상태를 견뎌낼 수 있게 해준 분자 경로의 일부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탈수 상태를 견디는 능력은 물가에 떠밀려 올라온 최초의 식물이 육상에서 생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이끼의 일종으로 실험에 흔히 사용되는 육상 식물인 ‘피스코미트렐라 파텐스’가 극단적인 탈수 상태를 견디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ANR 유전자다.

연구진의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ANR 유전자는 식물의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브시스산(ABA)이 보내는 신호를 전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브시스산은 식물의 5대 호르몬 중 하나로서 식물의 건조, 염분, 추위 등의 환경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제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식물 내 수분이 모자라면 합성량이 증가해 기공을 닫고 수분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현재의 속씨식물은 이와 비교해 훨씬 복잡한 해부학적 구조들을 진화시켜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올려 식물 전체에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더 빠르게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