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지닌 선입견 비워내려 색을 쓰지 않는다”
유인화 선임기자 rhew@kyunghyang.com

ㆍ‘제3의 아름다움’전 갖는 재미작가 김 신 일

갇혀있는 시간을 ‘문자’로 해제하는 작가. 2000년부터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김신일씨(40)가 자신의 브랜드인 압인(壓印) 드로잉 신작을 선보인다. 12번째 개인전 ‘제3의 아름다움’은 24일부터 7월28일까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마련된다.

압인 드로잉은 종이에 힘을 가한 부분이 도드라져 나오거나 들어가도록 한 요철감을 이용해 문자나 형상을 표현한 작업이다. 요철감을 위해 잉크가 더이상 나오지 않는 볼펜심으로 두꺼운 도화지에 꾹꾹 눌러 쓴 글자를 뒤집으면 도화지 뒤에서 누군가 글씨를 쓴 것처럼 글자가 도드라져 보인다.

전시장 1층 입구에 설치된 압인 종이 드로잉 ‘WHEN …ARE SEEN IN THE LIGHT OF EMPTINESS(공허의 빛 속에서 누군가 보일 때)’는 작가가 고민해 온 ‘공(空·EMPTINESS)’의 의미를 강조한다. ‘…’부분은 사물이나 사람 등 주어가 들어가는 자리인데, 여러 단어가 중첩 압인돼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다. ‘너’ ‘나’ ‘어떤 사물’ 등 주어의 ‘범주화’를 깨고 싶은 작가의 의지다.

컴컴한 방에서 글자조각에 조명을 준 작업 ‘시간적 연속,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생의 약동에 의한 작용, 공’에 앉은 김신일 작가.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우주와 인간이 ‘공’ ‘비움’에서 비롯됐는데, 현대인들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과도한 행복에 집착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넓혀가며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범주화하고 분별하면서 모든 갈등이 시작되죠. ‘범주화’는 사물과 사물의 경계, 사람과 공간 사이에 생기는 경계선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작품을 통해 존재 간의 경계를 풀고, 이기적으로 범주화된 사회를 ‘비움’으로 녹이고 싶습니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세계를 벗어난 또 다른 세계. 그게 바로 전시제목인 ‘제3의 아름다움’이죠.”

이 작업은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됐지만, 바탕찾기는 1980년대로 거슬러간다. 중학생 때 혼자 서울 왕십리 목재상에서 큰 나무를 사다가 조각칼로 자신의 얼굴형상을 깎으면서 오목과 볼록의 차이가 주는 경계의 냉정함과 미묘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또 “색이 지닌 선입견을 완전히 비워내기 위해 색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하얀색이다. 압인 종이 드로잉 외에 압인 빛 드로잉 작업인 ‘책상 위의 정원’ 시리즈 3점도 하얀 종이와 투명 플라스틱판을 통해 탈범주화를 꿈꾸는 ‘공’의 풍경이다. 하얀 종이 위에 글씨가 압인된 투명 플라스틱판을 덮고 조명을 비추면 종이 위에 압인된 그림자형상이 나타난다.

이외에 플라스틱 소재로 만든 의자높이의 문자 작품들은 글자끼리 붙어 있어 무슨 단어인지 읽을 수 없다. 작가는 글자설치물을 ‘문자 덩어리’로 정의한다. 글자를 읽다보면 그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므로, 글자를 붙여버려 단어의 뜻을 모르게 만들었다. “글자에 의미를 담는 건 ‘공’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로서의 문자보다 형태로서의 문자를 통해 ‘범주화’를 깨고 싶다”고 했다.

그는 관람객이 글자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해독을 못할수록 좋아한다. 읽지 못하고 형태로 봐달라는 자신의 주문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폴리스틸렌 덩어리를 열선으로 잘라가며 6개월 동안 제작한 작품 ‘EYE LEVEL DEVIDED SIGHT INDIVIDUALITY’는 글자끼리 중첩돼 읽기 어렵다.

김신일 작가는 영상, 문자조각, 압인 드로잉 등의 미디어를 시도하면서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추구한다. 미디어매체를 이용해 과잉정보화되어가는 최첨단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고,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실재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1999년 서울대 조소과 졸업 후 미국 스쿨오브 비주얼아트에서 유학한 그는 밀라노 리카르도 크레스피 갤러리 전속작가로 활동 중이다. (02)3217-6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