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자화상 1 - 나도 보편적인 사람이오!

Posted at 2011/02/23 15:41// Posted in 문화예술방 Posted by 고향바다

예술가의 자화상 1 - 나도 보편적인 사람이오!

사람은 자신을 인식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물론 오랑우탄이나 침팬지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볼 줄 알지만, 사람처럼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고 자신이 사는 세상을 연동해내지는 못한다. ‘나’를 객관화 해내고, ‘나’를 드러내고, ‘나’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의 능력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빨리 달릴 수 있는 근육이 없이도 자연과 세계 속에서 사람의 지위를 높였다. 수많은 화가들이 자신을 그려서 남기는 것도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일일 게다.

하지만 자화상이 독자적인 예술로 보편화 된 것은 서양화의 경우 15세기 말부터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18세기 이후 문인 출신 화가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보편적인 사람의 지위를 갖고 나서야 자화상이 생겨난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자화상이 ‘내 보일만한 지위’를 얻게 되어서일까? 자화상을 보다보면 화가가 예술가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과 한 시대의 예술가로서 품은 철학, 예술가이면서 하나의 보편적인 사람으로 살아냈던 세상을 엿볼 수 있다.

자화상에 실어 보내온 망명자의 타전

펠릭스 누스바움 _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

그림1> Felix Nussbaum 펠릭스 누스바움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 1943

그림2> Felix Nussbaum 펠리스 누스바움 <수용소에서> 1940 / 누스바움은 수용소에서 나와 은신처에서 머물면서 수용소에 지냈던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담요를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인 포로는 누스바움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펠릭스 누스바움은 나치가 지배하던 시절의 유대인 화가다. 독일에서 공부하다가 로마로 유학을 간 사이에 나치가 지배를 하게 되면서 독일로 돌아갈 수 없던 누스바움은 벨기에로 망명을 한다. 그러나 1940년 벨기에가 나치 점령 하에 들면서 두 달간 수용소에 갇힌다. 어렵게 수용소에서 벗어났지만 시민권은 박탈당한 채 언제든 잡혀가고 처형당할 권리만을 입증하는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야간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을 따라 은신처에서 은신처로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연합군이 벨기에를 함락하기 한 달 전 은신처에서 발각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처형되기 전까지, 누스바움은 극도의 긴장과 불안이 담긴 눈으로 거리에 나섰으리라.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은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어두운 길을 얼굴을 가리느라 고개도 못 들고 잰 걸음으로 걷던 망명자가 막다른 길목에서 느닷없이 불심검문에 걸린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검문하는 경찰이 호루라기라도 분다면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 사람을 끌고 가 처형할 준비를 갖춘 수용소의 담장은 서슬 퍼렇다. 하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누스바움은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 짜내듯 경찰을 똑바로 쏘아본다. “난 너희의 사냥감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가진 사람이야.” 꽉 다문 입은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그의 눈빛이 쏟아내는 소리는 밤하늘을 가르고도 남을 것 같다.

누스바움의 자화상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열망한 윤동주 시인의 눈빛도 보이고, 못 사는 나라에서 일하러 왔다는 이유로 말 안 되는 냉대를 겪는 이주노동자의 항변도 보인다.

나는 빨갱이도 아니고, 미치지도 않았소 __ 이중섭의 자화상

그림 3> 이중섭 <구상네 가족> 1955 / 대구 왜관의 구상의 집에 머물며 단란한 구상의 가족과 함께 있는 이중섭이 그림 가운데 있다. <구상네 가족>은 이중섭이 가족에 품은 그리움을 담은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그림 4> 이중섭 <자화상> 1955 / 이중섭의 다른 그림들과 달리 세밀하게 그렸다. 자신의 그림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보일 요량으로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세밀하게 그렸을 작가의 애절함이 느껴진다.

펠릭스 누스바움이 이국땅을 떠돌던 망명자라면, 이중섭은 자신의 나라를 떠돌던 망명자다. 이북이 고향이던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에 폭격을 피해 남하한 이남 땅에서 보이지 않는 검열을 항상 의식하며 살았다. 부산으로 제주도로 전쟁을 피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도 따뜻함은 느낄 수 없었다. (노동세상 10월호 그림이야기 참조) 피난민이 모여 살던 제주도에서 병이 들고 만 아내와 아이들을 치료할 길이 없어 밀항선에 아내와 아이들을 태워 아내의 고향인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일본으로 건너갈 배편을 찾아봤지만 가족을 만나러 갈 길은 열리지 않았고, ‘뒤 늦게 북에서 내려온 수상한 사람’ 취급하는 시선은 그의 궁핍한 삶을 조여 왔다.

전쟁이 끝나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구 왜관의 지인 구상의 집에 머물며 그린 그림들을 서울과 대구에서 전시를 했지만, 경제적인 성과는 없이 낙담만 심해졌다. 그러던 중 전시회를 본 한 장교가 그림에 붉은 색깔이 지나치게 많은 걸 보니 빨갱이가 아니냐고 한 말에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는다. 경찰서를 찾아가서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달라며 경찰에게 집요하게 매달렸다.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만드는 재주는 있어도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재주는 당시 경찰에겐 없었나 보다. 경찰은 이중섭에게 살 곳을 내주었던 구상에게 ‘이 이상한 사람 좀 데려가 달라.’고 청을 넣었고, 구상은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이중섭을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가족을 그리며 정신병원을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던 이중섭은 자신은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자화상을 그린다.

누스바움과 이중섭의 자화상은 나희덕의 시 ‘귀뚜라미’의 울음처럼 가슴을 찌른다.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토하는 울음’을 울어야 했던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그들이 살아야 했던 숨 막히는 시대와 예술가의 초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