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표현한 항일, 친일, 해방

근대 이야기 2011/01/14 14:35 이충렬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선택은 항일(반일)과 친일 그리고 침묵과 순종 중 한가지였다. 우리의 근대에서 일본의 강제 병탄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친일파들은 1905년 을사늑약 때 정체를 드러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당시 일본 편에 서서 고종에게 조약체결을 강요했던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고 하는데,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 그들이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해서 개인의 영달은 꾀는 하는 친일파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1910년 9월 28일 병탄 때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당시 각료들 뿐 아니라 황후가 치마 속에 감췄던 옥새를 빼앗아낸 윤덕영과 같은 황실 외척 그리고 많은 지식인도 친일파 대열에 합류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일본은 지식인들을 향해 유화와 포섭정책을 펼쳤고, 조선을 대표하던 문인이던 춘원 이광수와 독립선언서 작성을 기초한 육당 최남선이 친일대열에 합류했다. 두 사람의 변절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허탈감에 젖어들게 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화가 중에 반일과 친일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다. 향당(香塘) 백윤문(白潤文, 1906~1979)이다. 20세 때 이당 김은호의 문하생이 되었고, 1927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던 화가였다. 그의 누이가 운보 김기창의 어머니와 친구여서 1930년에 운보를 이당에게 소개했고, 운보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판상도무(널뛰기)>를 출품해서 입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백윤문의 숙부는 인사동에서 한남서림을 운영하면서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에 큰 영향을 준 심재 백두용이다. 붓과 먹을 가까이 하는 집안 내력 때문이었을까, 그는 당시 김은호의 제자 중 가장 걸출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화풍은 스승과 달리 조선의 고유색을 고집했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류화가 나혜석도 <삼천리> 1932년 9월호에 기고한 '조선미술전람회총평‘에서 ’白潤文(백윤문)씨의 「蜀葵」가 뛰여나게 조왓다. 화필과 색채의 특색이 잇고 朝鮮味(조선미)가 잇섯다.‘라며 호평을 했다.

이렇게 1930년대 화단에서 두각을 나태내던 백윤문이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분노>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림의 주제가 '반일'이라 크게 문제가 되었다.

백윤문 <분노>, 비단에 채색, 191 x 151cm, 1935년

<분노>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장기를 두다가 싸움을 하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화가 난 조선인이 일본인을 밀치자, 탕건을 쓴 조선인이 일본인이 뒤로 넘어지지 않게 붙잡으며 밀친 조선인을 바라보며 뭐라고 한마디 할 기세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에 보이는 두둑한 돈주머니와 술병은 당시 친일파가 양심을 팔아 부를 챙기고 일본인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고 있음을 상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누가 봐도 반일(反日)적인 작품이었지만, 백윤문은 개의치 않는 듯 작품에다 서명과 낙관을 한 후 1935년의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백윤문은 그림을 구상하면서 이당화숙 후배인 규당 한유동과 심원 조중현에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1981년 유족에 의해 발행된 <향당 백윤문 작품과 생애>에 기록되어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창작과정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이 점점 강화되던 1934년 어느 날, 돈화문 앞에 있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창소리가 들려나왔다.(앞의 '이왕직 아악부' 참조) 당시 이왕직 아악부에서는 매월 한차례씩 2시간 정도의 연주발표회를 했는데, 미리 신청한 일반인들은 입장할 수 있었다. 주로 제례악을 연주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창도 하고, 피아노와 합주를 하거나 소프라노 독창도 함께 발표했다.

수양산 백이 숙제 고사리 캐자 날 찾나 / 기경선자 이태백이가 풍월 짓자고 날 찾나/ 상산사호 네 노인이 바둑 두자고 날 찾나 / 차산중 운심한데 부지쳐 오신손님 날 찾을리 없건마는 그 누구라 나를 찾나 / 얼시구나 절시구나 지화자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

경기민요 ‘창부타령’이 시작되자 뒷자리에 앉아있던 백윤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췄다. 그는 "상산사호 네 노인이 바둑 두자고 날 찾나"라는 대목에서는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상산사호(商山四皓)는 중국 진시왕(秦始王) 말기의 난세(亂世)를 피하여 상산에 은거하고 있던 네 명의 노인인데, 옛 화가들은 이 노인들이 이야기 하거나 바둑 두는 모습을 '상산한담도(常山閑談圖)' 혹은 '상산위기도(常山圍基圖) 라는 화제로 많이 그렸다. 조선시대 작품 중에서는 단원 김홍도의 '산상한담도'가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왕직 아악부에서 집으로 돌아온 백윤문은,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숙부인 백두용의 집을 드나들며 본 '상산위기도'를 떠올렸다. '분서갱유'를 하는 등 포악하게 정치를 하며 백성을 힘들고 무섭게 하던 진시왕 시대와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시대가 다를바없는데, 옛화가들은 어떻게 한가롭게 바둑을 두거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렸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자신의 가슴 속에서 터져 오르는 반일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백윤문은 영감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부친의 한약방에 찾아오는 노인들을 모델로 바둑 두는 모습 대신 장기 두는 모습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일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 너무 조심하면 작품이 힘이 없었고, 좀 과감하게 표현하면 너무 자극적인 그림이 되었다. 그렇게 그렸다가 버리기를 반복하면서 몇 달이 지났을 때,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붓을 거두고 낙관을 찍었다.

누가 봐도 반일(反日)적인 작품이었지만, 백윤문은 개의치 않는 듯 1935년의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조선인 심사위원들은 특선으로 추천 했지만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입선조차 시킬 수 없다며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가 조선인과 일본인이 장기 두다 싸움하는 것도 친해지는 과정이라며 얼버무렸을까? 논란 끝에 입선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건 심사위원들의 결정이었을 뿐, 경무부(경찰서)에서 그를 끌고 가 문초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특선 화가’를 대단하게 인정해주던 시절이라 다행히 구속은 면했다.

이때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백윤문은 1942년 기억상실증을 일으켜 다시 기억을 찾은 1977년까지 35년 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1978년 36년 만에 전시회를 하며 재기했지만 이미 세월이 너무 흘러 다음해인 1979년에 타계했다.

그러나 그가 고심 끝에 그린 <분노>는 일제강점기 때 반일과 친일을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근대미술사에 자랑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이쾌대 <해방고지> 캔버스에 유채 181 x 222.5cm, 1944년 5월 ~ 1948년 사이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이 항복을 하고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다.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광복은 아니었지만, 나라를 뺏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빼앗긴 후에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의 숫자는 너무도 많았다.

1907년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해산군인 중 많은 숫자가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면서 목숨을 잃었다. 국가보훈처 기록에 의하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항일 의병으로 나선 사람은 무려 14만여명이었다.

3.1 만세운동 때도 일본의 총칼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고문으로 죽어나갔다. 만주 벌판에서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숨진 독립군의 숫자가 상당하다.

그 모진 세월의 투쟁을 1934년부터1939년까지 일본 제국미술대학(현재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그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이쾌대(1913~1965)가 대형화폭에 옮겼다. 경상북도 칠곡면 대지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1928년 서울의 휘문고보로 '유학'을 왔다. 당시 휘문고보에는 서양화가 장발(훗날 서울대 미대 학장 역임)이 미술교사로 있었는데 그가 이쾌대의 그림솜씨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미술을 권유했다.

장발로부터 집중적인 미술지도를 받은 이쾌대는 고보 5학년때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 <정물>을 출품해 입선을 했고, 같은 효자동에 살던 진명여고 학생 유갑봉과 자유연애 끝에 결혼한다. 그리고 다음해 졸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고, 1934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서 화가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이쾌대의 작품을 발굴하고 세상에 소개하는데 큰 역활을 한 미술사가 김복기의 연구에 의하면, '해방고지'는 해방 전인 1944년 5월 경부터 그린 작품이다. 대지주의 아들인 이쾌대가 광복 전부터 이런 '위험한 그림'을 그려 1948년에 다른 대형작품과 함께 '군상' 연작을 완성한 동기는 그의 형 이여성(1901~ ?)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이여성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화가, 정치가, 언론인이었다. 독립운동 자금 만드는 사건에 연류되어 3년동안 복역했고, 중국과 일본 유학 후 동아일보에 근무했다. 1935년에는 당시 동아일보에 함께 근무하던 청전 이상범과 2인전을 열어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1938년에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풍속을 그린 열 두폭의 대형 '역사화'를 완성했다. 따라서 이쾌대는 이런 작업을 한 형의 영향을 받아, 훗날을 기약하며 일제 강점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는 투쟁의 모습을 대형화폭에 그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해방고지>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고, 화폭 속에는 죽음도 있고 분노도 있고 감격도 있다. 물론 작품의 구도와 등장인물의 신체 묘사가 르네상스 이후 나타난 신고전주의 화풍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흰색 한복을 통해 우리 민족성을 강조했다.

<해방고지>는 해방이 결코 쉽게 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역동적인 몸동작과 눈빛에서는 일제를 향한 우리 민족의 분노와 저항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해방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열했는지를 잘 표현했다. 너무나 큰 민족의 희생을 치루는 가운데 힘들게 찾아온 해방이기에, 아니 우리 민죽 민족이 이루고 싶어 했어했던 높은 목표이기에, 이쾌대는 제목에다 '고지(高地)'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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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월초 김영사에서 출판될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근대>(가제목)의 초고입니다. 역사적 오류나 어색한 부분을 검증받기 위해 올리는 글이니, 그런 부분이 보이면 가차없이 지적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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