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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발로리스 평화사원에 소장된 피카소의 작품 '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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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피카소가 그린 그림을 보면 놀랍다. 어린 아이가 어쩌면 이리 잘 그렸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몸과 마음의 건강 상태가 아주 좋았고, 아버지는 미술 교사였다.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인지 비상하게 그림을 잘 그렸다.
그런데 그렇게 잘 그리던 그림풍을 접고 이상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배 화가 세잔을 따라서 원통형, 구, 육면체로 대상을 파악하여 그렸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처럼 그리다가 아예 아프리카 미술을 쫓아갔다.
우리는 피카소의 이름이나 그림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종 보게 된다. 원화를 보기는 힘들지만 출판물이나 전파를 통해 피카소는 우리 곁에 넘쳐나다시피 하다. 1881년에 태어난 피카소는 세기 전환기에 20대의 청년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전혀 다른 종류의 물리학, 우주론을 이야기한지 얼마 뒤 세계를 휩쓴 전쟁이 이어졌다. 인류 역사 최대의 발명품인 비행기가 연발총을 싣고 머리 위를 날아 다니며 인간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비행기나 연발총은 '가장 진화한' 서구인의 발명품인데, 이것이 사람을 죽이는 흉기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서구 문명 자체에 대한 회의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미술 분야에서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를 넘어서 비합리적·반도덕적·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해 새로운 예술 양식을 창조하려던 사조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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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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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움직임은 수십년 전인 1839년 사진이 나오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자연이나 인물, 대상 등을 똑같이 찍어내는 사진에게 자리를 빼앗긴 미술은 사진이 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을 이루어야 했다. 이에 반 고흐는 타오르는 듯한 붓질로 마음을 담았고, 고갱은 서양을 벗어나 페루,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이집트 등에서 새로운 미술의 근원을 찾았다. 마티스는 페르시아 도자기에서, 폴 클레는 아이와 정신병자 등 거의 모든 미술에서 비서구·합리주의를 넘어서는 자신의 세계를 모색했다. 피카소를 포함한 입체파는 아프리카의 강렬한 생명력에서 합리주의에 찌든 인류를 구원할 미학을 찾았다. 거의 모든 뛰어난 화가들이 다른 것을 찾아 모험을 감행했다.
앞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유명한 민예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영국 낭만주의 이단자 윌리엄 블레이크의 미술을 거쳐 우리의 분청사기나 민화에 눈길이 간 과정도 피카소의 행적과 비슷하다. 주류 권력 중심의 미술에 대한 가치 체계를 무조건으로 받아들이다가 삶의 진실에 눈을 뜨면서 이를 거부하고 평등과 평화, 겸허한 가치가 두드러지는 풍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만 그리지 않았다. 우리와도 관계가 있는 '한국에서의 학살'은 평생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가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미군의 양민학살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전쟁에 대한 항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피카소가 '학살'에 이어 대작 벽화 '평화'와 '전쟁'을 그린 것은 덜 알려졌다. 이 그림들에서도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통해 보게 된 것들을 소재로 했다. 무엇보다 앞의 연작에서 피란민이 음식을 끓여먹는 장면을 넣은 것이 그의 휴머니즘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우리의 옛도자기 세계도 잘 알아서 '힘차게 그어진 선이 자신의 그림과 같은 세계'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