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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꿈을 이뤄준 건축가 프랭크 게리
1997년 스페인 북부의 쇠락해가던 산업 도시 빌바오에 구겐하임 뮤지엄이 들어섰다. 그리고 빌바오는 멋지게 부활했다. 그 중심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있다. 요즘 한국이 따라 그리는 빌바오의 꿈을 실현해준 인물이다. 그의 건축은 자유롭고, 모든 구조가 해체된 미완의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건축을 예술이라 한다. |
건축으로 빌바오 시의 꿈을 이루다 프랭크 게리는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20세기 말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가 되었다. ‘빌바오 효과 Bilbao Effect’(빌바오 시가 구겐하임 뮤지엄을 통해 도시 부활에 성공한 데서 비롯된 표현)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 도시가 건축을 통한 도시 부활의 꿈을 키우며 그 표본으로 삼는 것이 바로 빌바오의 사례이다.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 통영시에서 프랭크 게리와 함께 건립을 검토 중인 ‘윤이상 음악당’도 그런 맥락의 하나다.
스스로를 ‘구속받기 싫어하는 유대교 자유주의파’라고 말하는 프랭크 게리. 그는 1929년 캐나다 토론토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0년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미국으로 건너와 LA에 정착했다. 20대 초반 트럭 운전사로 돈을 벌며 LA 시립대학의 야간 과정을 다니던 중 사우스캘리포니아 대학(U.S.C.)에 입학, 건축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5년 프랭크 게리는 가구 디자인에 몰입했다. 함석 골판, 베니어판 같은 저렴한 재료를 이용해 가구를 만들었는데, 1970년대 건축에서 그 느낌이 다시 살아났다. 1956년에는 하버드 대학 디자인대학원에 들어갔고, 통계 사회과학을 기반으로 한 건축을 연구했다. 1962년 LA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프랭크 게리가 세계적 건축가가 되는 데 그의 유년 시절은 중요하게 작용했다. 철물점을 운영하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그는 톱, 망치, 파이프, 울타리, 함석판, 쇠사슬, 볼트, 나사 같은 금속 자재들을 가지고 놀았다. 또 프랭크 게리의 할머니는 늘 가방 안에 나무 블록을 갖고 다니며 손자와 함께 바닥에 앉아 도시도 만들고 빌딩도 만들며 놀아주었다. 또 한 가지, 프랭크 게리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물고기 역시 그의 유년 시절을 담고 있다. 할머니가 어시장에서 사 온 물고기를 욕조에 풀어놓으면 프랭크 게리는 그 안에 들어가 물고기와 함께 놀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물고기는 요리가 되어 식탁에 올라왔고 그의 뇌리에 결코 잊지 못할 충격을 남겼다. 프랭크 게리가 물고기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80년대 건축에서 과거의 ‘재탕’이 유행하던 시절, 프랭크 게리의 동료들은 그리스 신전을 재현해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게리는 “그리스 신전은 의인화한 건축이다. 사람은 3만 년 전에 물고기였다. 앞서가는 것이 불안하다면 더 뒤로, 3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라. 왜 그리스 시대에서 멈추려고 하는가?”라며 자신의 스케치북에 물고기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물고기에서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고 한다.
유명 건축 평론가 찰스 젱크스는 저서 <괴상망측한 건축>에서 프랭크 게리를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너무 다양한 꼬리표가 붙기 때문이다. 찰스 젱크스가 붙인 프랭크 게리의 별명만 해도 ‘함석 골판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산타모니카의 고결한 야만인’ ‘최초의 해체주의자’ 등이 있다. 독특한 사고와 연상 체계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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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 |프랭크 게리_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어느날 KBS_TV에서는 이런 보도가 있었다. 특파원 현장 보고였다_ 그 유명한 구겐하임 빌바오 뮤지엄_ 도시건축의 건물하나가 빌바오 시민에게 행복과 경제적 부유까지 가져다 준_ 아름다운 환상_ 사진과 기사를 재구성하여본다_ justinKIM <앵커 멘트> 태양과 투우의 나라,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이 문화도시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국가와 자치단체가 문화 도시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요. 서울시를 비롯한 여러 자치단체들이 문화 도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요즘 과연 21세기 문화 도시의 조건은 무엇인지 스페인 사례를 통해 알아봤습니다. 김건우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세계 2위의 관광대국 스페인, 가톨릭과 이슬람이 뒤섞인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는 도시들은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관광도시 명단에 신예가 나타났습니다.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빌바오! 97년 구겐하임 미술관이 문을 연 뒤부터 빌바오는 일약 세계적인 '미술관의 도시'로 도약했습니다.
빌바오_ 구겐하임 미술관_ 무엇이 그토록 아름다울까? 강변에 자리잡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우선 건물 자체가 걸작입니다. 티타늄판 3만 여 개로 빚어낸 이 미술관은 보는 각도와 시간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고, 햇빛에 반사될 때 특히 장관입니다. 이 훌륭한 미술관을 둘러보기 위해 해마다 90여만 명이 빌바오시를 찾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과 또 구겐하임이라는 브랜드 효과가 경기 침체에 빠져들던 빌바오시를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탈바꿈시킨 것입니다. 경제유발효과는 엄청납니다. 지난 한해에 빌바오 시에 가져다준 돈만 2천8백 여 억 원, 그러나 이 미술관이 특별한 가장 큰 이유는 빌바오 시를 문화도시로 거듭나게 했다는 점입니다.
<인터뷰> 후안 익나시오(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장) : "미술관 건립은 도시 전체가 변화하는 촉매였습니다. 빌바오시 변환 계획의 주요한 부분이었는데 전체 계획의 엔진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80년대 말, 주요산업인 조선업과 철강산업의 몰락이라는 위기를 맞은 빌바오는 마침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유럽 진출을 모색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치에 나섰습니다. 미술관 유치와 건립에 1600억 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며 주민의 90% 이상이 반대했지만 주 정부는 문화 산업만이 살길이라고 설득했고, 결국 91년,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인터뷰> 이본 아레소(빌바오시 부시장) : "앞으로는 경제력뿐만 아니라 문화력까지 갖춘도시가 경쟁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산업에 투자하는 것은 미래에 대비하는 올바른 길입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시내 중심의 프라도 미술관에는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화가 고야와 벨라스께스, 엘 그레꼬 등의 작품을 보러 온 이들이 항상 길게 줄을 섭니다. 프라도 미술관이 19세기 초부터 스페인의 문화를 이끌었다면 '마타데로 마드리드'는 21세기 문화예술의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곳입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중인 이곳은 과거 시영도살장이었습니다. 새로 만든 미디어 아트 전시공간은 도살장이던 내부를 거의 그대로 살렸습니다. 공사가 한창인 이 건물들은 연극 극장으로 개조될 예정입니다. 이렇게 2011년까지 모두 10개의 건물이 문학관과 음악관, 건축관 등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용은 모두 무료입니다. <인터뷰> 마리아 벨라(미디어아트관 담당자) : "시민들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창작 아이디어와 각종 자원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마드리드시의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스페인 제 2의 도시 바르셀로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에는 바닷가재 모양의 익살스런 공공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고, 바로 옆에도 타일로 꾸민 야외 조각품이 서 있습니다. 이곳 바르셀로나에서는 도시 곳곳에서 이 같은 공공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조형물들은 시민들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물론 도시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80년대부터 예술가들에게 거액을 지원하며 공공미술에 투자한 결과 바르셀로나는 문화도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터뷰> 오리올 보히가스(건축가) : "공공미술은 도시의 문화화에 있어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합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해 시민 전체를 교육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바르셀로나 하면 떠오르는 건축가 가우디, 그가 100년 전에 설계한 구엘 공원은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된 밀라 저택과 바뜨요 저택 등 가우디의 작품은 대로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공공미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현장입니다. 120여 년 된 재래식 시장이었던 산타 까테리나 시장 역시 공공미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90년대말 바르셀로나시가 재개발한 이 시장은독특한 곡선 구조에 20만 개의 타일로 장식된 예술적인 지붕으로 유명합니다. <인터뷰> 에스테브 까라메스(바르셀로나시 문화연구소) : "산타 까테리나 시장은 (도시의 일상생활 공간에)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개입을 해서 주변 지역 전체를 변화시키는 좋은 예입니다." 1884년에 착공돼 123년째 공사중인 성 가족 성당, 완공까지는 앞으로도 2백 년이 더 걸린다는 가우디의 이 위대한 작품은 문화에 대한 자세가 어때야 하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눈 앞에 보이는 반짝 효과가 아닌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투자, 또 예술의 힘을 믿고 인내하는 사회 분위기, 여기에 행정 당국의 과감한 결단과 끈질긴 실행력이 어우러질 때 우리가 바라는 문화도시의 꿈은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에 도착하여 처음 대하는 작품은 입구 플라자에 세워놓은 제프 쿤즈(Jeff Koons)의 설치조각작품으로서 꽃과 풀로 덮힌 약 4미터 키의 강아지이다. 이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한 작품이다. 헤프닝예술과 'Big Sculpture'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쿤즈의 사이트 스페시픽 작품은 단번에 관람객들을 난쟁이로 만들어버리면서 그들의 정체성에 약간의 동요를 일으키지만, 그 일상성으로 친근감을 주고 더 나아가 이 거대한 미지의 건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요나나 알리스가 되버릴 것같은 기대로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 완만한 램프식 넓은 층계를 미끄러지듯 내려가 50미터 높이의 아트리움으로 발을 들여놓고 3층 발코니에 걸쳐 내려오는 클라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대형 헝겊 꽃을 올려다보면 그 상상이 현실화되는 듯하다. 이러한 사이트 스페시픽한 작품들의 건축 조각적 설치는 이 미술관 전체를 통해 일어나며, 건축가 게리와 구겐하임 미술관이 건물과 예술작품의 내밀한 관계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게리의 미술관 건축은 그러한 큐레이팅 컨셉트를 디자인 초기부터 예상, 전제하고 있으며 그는 실제로 올덴버그, 리차드 쎄라(Richard Serra)등과 같은 예술가와는 오랜 친구로서 많은 프로젝트를 같이 해왔다. 즉, 게리의 건축은 그 창조과정에서 사용자와 예술가의 적극적인 동참을 요구하고, 정신적인 유대와 예술적 공감을 중요시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게리는 강한 클라이언트가 건축가의 최상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구겐하임의 톰 크랜스관장을 지금까지 만난 최상의 클라이언트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 쿠 히멜블라우(Coop Himmelbrau)와 프랑크 게리 3인이 초대된 1991년 7월의 디자인 콤피티숀에서 게리를 뽑은 이후 수년간 톰 크랜스는 뉴욕에서부터 게리의 LA사무실을 최소 2주에 한번, 공사동안은 빌바오현장을 거의 같은 횟수로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역설적으로 게리의 건물은 파리의 「아메리칸 센터」의 경우처럼 클라이언트와 사용자를 잘못 만나면 그 예술성과 유효성을 박탈당해버릴 수도 있는 위험을 ? 활?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 게리의 작품들 중 지난 10년간 가장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이다. "철근과 모르타르의 유토피아에 최종적으로 파산 선고를 내린 유리와 티타늄의 네오-바로크적 스펙터클," "촉수 같은 곡면이 끝없이 펼쳐지는 유기적인 조각 오브제", "금색 뱀 머리의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입체적인 추상 조각." 1997년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가 완공되었을 때 쏟아진 찬사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투시도의 고정된 시선이 포착해내기 어려운 이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은 중력의 굴레를 벗어던지려 몸부림을 치는 듯 보인다. 곡면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도 하고, 제 멋대로 꿈틀거리며 서로 부딪치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을 응시하는 시선은 이내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린다. 다만 추상적 형태가 제공하는 연상의 흐름만이 보는 이의 마음속에서 가늘게 이어질 뿐이다.
지표면에 불시착한 UFO처럼 보이는 이 건축물의 조형 언어는 어디에서 연원한 것일까? 게리의 시각적 상상력?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1929년에 태어난 이 백전노장의 건축가는 90년대 초반까지 구겐하임 빌바오와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변신의 비결은 그가 사용한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있었다. 프랑스의 항공 우주 기업, 닷소(Dassault) 시스템이 개발한 3D 모델링 소프트웨어, 카티아(CATIA)가 그것이다. 카티아를 활용한 게리의 디자인 초기 단계는 일반적인 디자인 프로세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게리는 간단한 섬네일 스케치나 종이 스터디 모델로 자신의 조형적 아이디어를 전개한다. 그러나 게리의 예술적 감수성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딱 여기까지다. 이후 작업은 수십 명의 구조 역학 엔지니어와 카티아 전문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전담해서 수행한다. 그들은 먼저 스터디 모델의 좌표 데이터를 삼차원 스캐너로 입력하고, 이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구조 역학적 계산을 행한다. 그 후 설계의 적합성을 고려해 본래의 모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그리고는 쾌속 조형 공정(RP; rapid prototyping)을 거쳐 삼차원의 축소 모델을 만들어 낸다. 마치 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서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들이 감독의 구상에 따라 화면에 각종 특수 효과를 입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
출처 : Tong - justinKIM님의 | 생각의길통 건축 | 프랭크 게리와 해체주의 월트디즈니 컨서트홀 Walt Disney Concert Hall architecture & culture justinKIM 내가 좋아하는 시드니 폴락 감독이 별로 흥행이 되지 않았던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4년 만에 마무리한 <스케치 오브 프랭크 게리>가 그 작품. 다큐멘타리 주인공으로 직접 출연한 프랭크 게리는_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등 많은 건축물을 세운 최고의 건축가로 꼽힌다. 요란한 그의 작품이 들어 설때 마다 환상과 비평이 쏟아지는 중심에 언제나 들먹이는 것이_ 프랭크 게리_ 그리고 해체 주의다. 프랭크 게리_우선 그가 가장 최근에 완성한_ 로스엔젤레스의 뱅커힐에 있는_ 월트 디즈니 극장을 가본다.
막이 오르기 전의 파이프 올갠과 무대모습이다_ Before a concert - view of the stage and organ
디즈니 콘서트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뱅커힐에 작년 가을 완공됐다. 월트 디즈니의 미망인이 500만 달러의 기부하며 건설이 시작됐지만, 그 후 경기침체, LA폭동, 지진 발생으로 인한 2년 동안의 공백 후 1999년이 되어서야 착공하게 됐다. 로스앤젤레스 교향악단이 이 홀을 홈그라운드로 하고 있다. 평면에 비춰보면 특유의 곡면구성 공간은 동측에 집중되어 있다. 내방자를 위한 퍼블릭 스페이스를 그쪽으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쪽의 백스터이지 측에는 사용자를 중시해 직선으로 구성된 공간이 주가 되어 있다. 최초의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_ Frank O. Gehry 1929~, 캐나다 토론토 출생한 프랭크 게리는 20세기 건축을 해체한 해체주의 건축가이다. 연결 사슬망, 주름 접힌 메탈 패널, 물고기를 키워드로 삼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디즈니 콘서트홀 등을 건축했다. 자유분방한 크리에이티브발상의 근원 19세기 건축계의 파격을 이끌었던 이가 가우디였다면, 프랭크 게리는 모더니즘으로 점철되던 20세기 건축을 해체한 장본인이다. 자유롭게 춤추는 금속 외관,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형태 등 프랭크 게리만의 건축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어린 시절.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외할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네 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외할아버지가 일하던 철물점에서 망치, 톱, 쇠사슬 등을 접하면서 금속 재료의 본성을 깨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 프랭크 게리가 자신의 작품에서 즐겨 표현하는 ‘연결 사슬망’이나 ‘주름 접힌 금속 외관’은 이 때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그만의 독특한 건축 소재 ‘물고기’ 형태는 외할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물고기를 특히 좋아했던 할머니가 주말마다 시장에서 사오던 물고기는 주요 모티브로 자리 잡았다. 이민자 출신의 가난한 삶도 그의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부분. 스무 살의 프랭크 게리는 궁핍한 살림 때문에 아침식사를 배달하는 트럭 운전사로 일해서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그에게 대학 진학의 길을 열어준 것은 당시 고객이었던 첫 번째 부인 ‘아니타’. 법률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던 그녀는 1950년대 젊은 부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편의 대학 학비를 조달했고, 프랭크 게리는 남가주대(USC)와 하버드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생계를 고민해야 했던 프랭크 게리에게는 항상 건물의 경제학이 최대의 관심사였고, 때문에 그의 건축은 ‘값싼 건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프라하에 서있는_ 춤추는 건물 건축에서 기계적인 기능성을 찾던 모더니스트와 달리 프랭크 게리는 건축을 순수 예술로 간주한다. 대학을 마친 후 그는 유럽에서 2년 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예술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건축은 본질적으로 3차원의 오브제인 까닭에 조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때문에 그의 디자인 과정은 건축 모델 작업에 근거를 두고 구조적 문제 해결, 디테일 등의 모든 작업이 이루어질 정도. 단, “건축과 조각이 다른 점이 있다면 건축은 내부 기능을 만족시켜야 하고, 예산과 건축 규정과 중력의 문제를 안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난해한 해체주의를 지향하지만 그의 건축이 낯설지 않은 것은 주변의 문맥이나 건축 부지가 가지는 문화를 고스란히 드러내 대중적인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시아트 데이 빌딩’. 이 건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것이 주요한 업무인 광고 회사의 특성을 살려 망원경 형태로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사색 룸(Thinking Room)을 배치했다. 유희적이면서도 솔직한 프랭크 게리의 가치가 가장 돋보인 작품은 1997년에 완공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날로 증가하는 현대미술 컬렉션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추가로 분관을 증축한 것으로,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티타늄의 금속 패널들이 꽃잎처럼 자유로운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메탈 플라워’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빌바오는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가 1930년 「정오의 죽음」에서 ‘무덥고 추한 광산 도시’라고 묘사했던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프랭크 게리는 쇠락한 도시 빌바오를 문화의 요람으로 탈바꿈시켜, 개관 후 1년간 전 세계에서 1백36만 명이 방문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뉴욕 타임스』가 ‘빌바오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고 영화 007 시리즈에 등장했을 만큼, 소장품보다 미술관 건물 자체가 더 화제가 되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은 그가 건축에서 추구하는 바대로 ‘시적이고, 실용적이고, 역사적이고, 영웅적’이다. ![]() Size of this preview: 450 × 600 pixels Full resolution (960 × 1,280 pixels, file size: 149 KB, MIME type: image/jpeg) ![]() Size of this preview: 564 × 599 pixels Full resolution (1,506 × 1,600 pixels, file size: 561 KB, MIME type: image/jpe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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