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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사유하기]다시 날기 위한 침잠, 명상 | ||
| 입력: 2007년 07월 13일 15:07:03 | ||
책 읽고 생각하며 글 쓰고 수업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하루의 대부분 시간은 책상가에 앉아 보내게 된다. e메일로 무엇에 답변하거나 원고 문제로 이런저런 연락도 한다. 학기 말인 요즘엔 성적처리 같은 사무적인 일도 있지만 대체로 큰일은 없다. 아니 잘 만들지 않는다. 그러다가 방학이 시작되면 이것도 잦아지고, 오늘처럼 금요일이면 좀 한가해진다. 해야 할 일은 줄지어 날 기다리지만, 그 일에 부려질 정도는 아니 되도록 한다. 이즈음 나는 가끔 나를 되돌아본다. 이 돌아봄이 누구에겐 반성이 될 것이고, 누구에겐 명상이 될 것이며, 또 누구에겐 회고의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늘로 이 글의 연재도 끝나니 잠시 돌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므로 되돌아봄은 지혜와 여유를 가르치는 교리문답서나 처세술 책자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삶을 조금 다른 차원에서 채우는 일이기에 필요하다. 이 한가를 누리며 나는 내 주변을 잠시 돌아본다. 이 주변이 ‘빈 자리’ 또는 ‘꽃 진 자리’일 수도 있다고 한 시인은 말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빈 자리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자리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문태준 ‘꽃 진 자리에’) 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있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없는 상태-“빈 자리”를 떠올린다. 무엇인가가 이울었거나 누군가가 떠나간 자리, 그 부재의 자리를 반추하는 것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피고 지는 꽃잎처럼 스스로 “앉았다 차마 비워 두는 일”과 같다. 되돌아봄은 그것이 부재에 닿아 있을 때 진실하게 된다. 이런 진실 속에서 우리는 사람의 생애도 이 시인이 적었듯이 ‘한 호흡’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한 호흡’ 중에서) 꽃잎이 피고 지는 것도 시인의 눈에는 한 호흡과 같다. 숨을 들이켜듯 꽃이 피어나고, 숨을 내쉬듯 그 잎은 지고 만다. 세상의 많은 일이 들숨처럼 일어나고, 날숨처럼 사그라진다. 이런 깨달음도 그저 오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현실 안에 살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 거주하는 한 요지부동일 수가 없다. 돌아봄은 언제 어느 때고 끊기거나 방해받거나 어지럽혀질 수 있다. 삶의 휴식은 각 개인이 만드는 것이면서 이 개인을 에워싼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개인의 의지와 외적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 잠시의 휴식도, 휴식 속의 명상도 생겨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땅에선 아직도 버거운 일이다. 가령 878만명(전체 노동자의 55.8%, 2007년 3월 현재)에 이르는 우리의 동료시민들-비정규직 종사자는 정신없이 살지 않으면 안되는 생계조건 속에 있다. 이들에게 휴식이나 명상, 정관(靜觀)이나 하루의 기쁨은 사치에 가깝다. 현실은 더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불법을 합법인 양 자행하고 개발의 이름으로 전 국토를 투기 삼는 이 거짓 시대에 현실은 더 이상 연속적으로가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그리하여 변화와 단절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철학은커녕 부패하며 거짓을 일삼는 이들이 이 땅을 대표하게 해선 안된다. 지배적 담론은 지배하는 자의 언어이지 지배당한 자의 언어는 아닌 까닭이다. ‘진보’나 ‘발전’을 믿는 사람들에게 흔히 그러하듯 역사는 동질적이거나 직선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단절적이고 이질적이며 균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문화사를 ‘야만의 역사’로 규정한 발터 벤저민(W. Benjamin)의 생각이지만, 우리는 삶의 현실을 더 복합적이고 다각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단절이 꼭 파편적일 필요는 없다. 논리의 일관성은 ‘숨은 체계’로 있으면 된다. 그래서 비체계적 체계의 사유로 우리는 지속적 모순의 역사를 어떤 식으로든 간섭할 수 있다. 적어도 이런 의식이 있다면 이때의 명상은 정태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침잠 속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오늘의 세계는 분명 광고와 환몽, 자기선전과 공시(公示)의 세계다. 여기에는 순간의 즉흥과 변덕이 있지 현재에 대한 경외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더 긴 시간적 차원은 잘 고려되지 않고, 하루의 기쁨은 자주 잊혀진다. 휴식과 돌아봄은 이래서 필요하다. 시인의 못다 부른 찬가를 듣고, 주위에 남아 있는 고통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이 무렵이다. 현재의 순간 속에서 영원을 예감하며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시간의 근원적 기쁨’ 속에서 나는 꽃잎 떠난 내 빈 자리를 돌아본다. 〈문광훈/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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