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의명인디에고리베라

멕시코의 국보적 존재, 그림으로 독재자 고발

박해받는 민중 대변

멕시칸이 몰려 사는 이스트LA에는 낙서와 벽화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왜 이 사람들은 낙서와 벽화를 그렇게나 좋아할까. 그 의문은 이들의 고향인 멕시코시에 가보면 풀린다. 멕시코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벽화의 나라다. 거리나 관공서에도 벽화가 많고 그 중에서도 독립궁인 팔라시오 나쇼날에 있는 벽화는 감탄할 만한 수준의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2층 복도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이 벽화에는 멕시코의 뼈아픈 역사가 파노라마 식으로 그려져 있다. 이 대작을 그린 사람이 바로 벽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디에고 리베라다(사진). 스페인에 피카소가 있다고 하면 멕시코에는 리베라가 있다. 그는 멕시코 미술계에 벽화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가장 멕시코적인 그림을 그렸으며, 작품에 항상 저항정신을 담고 있었고, 혁명을 사랑한 예술가였다. 그가 그린 ‘엘 게리에로’(게릴라)와 ‘혁명아 자파타와 백마’는 유명하다. 쉽게 말해 그의 그림은 가진 자를 좀 삐딱하게 다루고 있다. 항상 통치자와 부유층의 얼굴은 심술궂게 표현되어 있고 농민과 인디언은 순진하고 우아하게 그려져 있다.
리베라는 멕시코 공신당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그림은 여러 번 수난을 겪어야 했다. 록펠러재단은 록펠러센터에 벽화를 그리기로 하고 리베라와 어마어마한 액수의 계약을 했다. 그러나 일부 신문에 록펠러재단이 공산당원도 지원한다는 기사가 실리자 록펠러측이 계약을 취소해 버렸다. 또한 시카고 세계 무역박람회장 벽화도 리베라가 그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무효화되었고 GM도 계약을 재고하겠다고 연락해 와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포드자동차 건물에는 공산당 사건이 터지기 이전에 벽화를 그렸기 때문에 ‘디트로이트의 문화’라는 이 벽화는 지금도 보기 드문 명화로 남아있다.
리베라는 트로츠키의 멕시코 망명을 도왔으며 그의 집에 트로츠키 부부를 초청해 저녁을 나누기도 했다. 공산당 선호 경향 때문에 그는 멕시코 부유층의 미움을 받았으며 좀 잘 사는 사람들은 리베라를 싫어했다. 그러나 서민과 농민 그리고 인디언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받들었다. 리베라는 멕시코 역사상 가장 애증이 엇갈린 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햇볕 쨍한 날이 있었다. 끝없는 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정기를 살리자고 외치는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예술가는 어떤 후원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법이다. 신정부의 바스콘셀로스라는 교육부장관이 리베라 작품의 가치를 높이 사 그에게 멕시코 공공건물의 벽화를 의뢰하면서부터 그는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불후의 명작인 독립궁 벽화도 이렇게 해서 그리게 된 것이다. 5년 작업한 이 벽화에는 마야문명의 전성, 아즈텍문명의 멸망과 스페인 세력인 코테즈의 침공, 가톨릭의 상륙, 판초빌라와 자파타의 농민혁명. 미국의 멕시코 침공, 그리고 멕시코 독립 과정이 자세히 그려져 있어 관광명소로 꼽히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유럽에서 브로크,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입체파)에 열중했지만 멕시코에 돌아와 대중예술에 전념하면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여성편력이 심해 이혼을 네 번이나 했는데 마지막에 결혼한 프리다 칼로는 재능 있는 화가였다. 최근 유럽 화단에서는 리베라보다 프리다의 그림을 더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멕시코시에는 프리다 미술관이 세워졌을 정도다. 리베라는 1957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독립궁 벽화를 구경하고 있는 관광객들.



리베라의 대표작인 ‘개혁과 후아레스시대’. 독립궁에 들어서자마자 2층 계단쪽에 있는 벽화로 멕시코의 짓밟힌 역사가 한눈에 그려져 있다. 가로 9m 세로 13m의 대형 벽화.



‘후아스텍 문명’. 인디언 여인이 또띠야를 만들고 있다. 리베라는 항상 인디언과 농민은 우아하게 표현했다.



‘테노치티트란 시장의 여인’. 원주민 여인이 다리에 새긴 문신을 시장바닥 남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모렐로스의 농장’. 스페인 감독관이 인디언과 농부들을 채찍으로 작업을 독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