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까치
400쪽, 2만원
15세기 이탈리아를 다룬 책이라면 자연스레 르네상스를 떠올리게 된다. ‘근대의 탄생’이란 제목의 문구도 르네상스를 염두에 둔 표현이겠다. 하지만 책의 제목 『1417년, 근대의 탄생』(원제 The Swerve·일탈)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1417년’은 어떤 사건과 관련된 것일까.
힌트는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라는 부제에 담겨 있다. 문제의 ‘책 사냥꾼’,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 남부의 한 수도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필사본을 발견한 것이 1417년 겨울이었다.

이 필사본의 발견 전후 과정을 추적한 저자는 “이 책의 발견이야말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가져온 출발점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대체 어떤 책인가.
지난해 국내 소개된『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아카넷, 2012)는 총 7400행에 달하는 운문 대작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가 서사시를 써 내려간 형식으로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물리학·우주론·윤리학을 종합했다. 흔히 쾌락주의로 알려진, 헬레니즘 시기 중요한 철학 사조의 하나인 에피쿠로스학파의 적자가 바로 루크레티우스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쾌락주의를 재발견한 것이 왜 문제적인가. 바로 무신론을 함축하고 있어서다.
루크레티우스 자신은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가 믿는 신은 인간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신이었다. 그가 보기에 신들이 인간의 운명에 신경을 쓰거나, 여러 종교적 제의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천박한 신성 모독에 불과하다. 이러한 특이한 무신론은 자연스럽게 물질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들의 세계란 ‘사물의 씨앗’이라는 불변체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서로 결합했다가 다시 갈라지고 재결합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세계가 ‘파괴할 수 없는 물질로 구성된 사물들의 부단한 변형’으로 생성된 것이라면 신의 창조는 개입할 여지도 없다.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으며, 신의 섭리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사물은 그 구성 입자들의 일탈로 탄생하게 되며, 이 일탈은 무작위적이기에 자유의지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사후세계란 없다고 했다. 지상에서의 삶이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것이며,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 구세주께서 채찍질을 견뎌내시지 않았던가”라고 되물으며 채찍질을 정당화했던 중세인의 생각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중세는 고통의 추구가 승리를 거둔 시대였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이 스스로에게 매질을 가했다. 구세주를 닮고 싶다면 그가 겪은 고통을 몸소 겪는 것 이상의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교황청의 필사가이자 고대 필사본 수집가였던 포조가 1000년이 넘게 망각 속에 잠들어 있던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는 새로운 방향으로 다시 일탈하는 계기를 얻는다.
저자가 보기에 다빈치·갈릴레오·베이컨·알베르티·미켈란젤로·라파엘로·몽테뉴·세르반테스의 작업을 포함하는 일련의 문화적 운동은 모두 생명을 찬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질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심과 육체의 요구에 대한 긍정이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었다면 르네상스는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을 가장 잘 체현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이어진 세계관의 끈이 15세기 초 한 책 사냥꾼에 의해 발견돼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 되고, 또 점차 널리 퍼지면서 근대 세계가 탄생하게 됐다는 게 이 책이 제시하는 근대 탄생의 서사다.

로쟈(본명 이현우) 북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