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의 맛따라기] 양평 ‘혜림원’의 과일·채소

김주진 혜림원 대표(오른쪽)와 이문웅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가 대풍을 이룬 복숭아를 살펴보고 있다. 혜림원은 땅을 갈지 않고 비료와 농약을 안 쓰는 자연농법으로 작물을 키운다. 신인섭 기자
『기적의 사과』 읽고 관심 갖게 돼
무역회사 접고 산 일군 지 8년
생태계 순환 믿고 기다리며 길러
축구장 29개 넓이에도 예초기뿐
과일나무 사이 산나물·약초 지천
농장을 둘러보았다. 평지 밭에는 고추·토마토·고구마부터 아스파라거스까지 각종 채소류가 잡초들과 키를 다투며 자라고, 산비탈은 나무를 베어 내고 심은 과수들이 차지했다. 나무도 자라기 어려운 바위 비탈에는 바위솔(와송)이 저절로 난 것처럼 틈마다 뿌리를 내렸다. 숲으로 보이는 산지 2만6000㎡에는 산양삼을 심었다. 한 골짜기에는 닭 100마리를 키우는 양계장이 있다. 닭은 낮엔 산을 헤매며 먹이활동을 하고 밤엔 알아서 돌아온다.
비료·거름·약 한 방울 안 줘도 잘 익어

자연농법으로 키운 각종 채소. 신인섭 기자
여기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상망길에 자리 잡고 8년째 자연농법을 고집스레 실천하는 국내 최대 자연농업 농장인 혜림원(농업회사법인)이다.

원추리 꽃대에 하얗게 진딧물이 붙어 있지만 바로 옆 복숭아나무에는 없다. 신인섭 기자
농장주 김주진(69) 박사는 이런 원칙으로 2011년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 바닥을 덮고 과수 묘목을 심었다. 과일이 열릴 때까지 사람이 해준 일은 ▶주위에서 썩은 낙엽을 긁어모아 묘목 아래 깔아주고 ▶작은 묘목이 주변 풀에 치이지 않도록 둘레 풀을 깎고 ▶쓸데없이 자라는 가지(徒長枝)를 잘라준 게 전부다. 그가 2009년 일본 기무라 아키노리의기적의 사과를 읽고 자연농에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에 과수에 주력했다. 첫해부터 사과 2000주, 복숭아 600주, 매실·블루베리 각 1500주, 아로니아 200주, 오미자 1000주, 포도 100여 주를 심었다.
농장 입구에 들어서자 산비탈에 기대 주렁주렁 빨갛게 익어가는 복숭아가 반겼다. 너무 많이 열어 가지가 땅에 닿을 만큼 늘어진 것도 많다. 나무 밑엔 떨어진 복숭아가 가지에 달린 것만큼이나 나뒹굴고 있다. 벌레 먹거나 새들이 쪼아 떨어진 것이라 한다.

자연농법으로 키운 양파. 크기가 제각각이고 볼품은 없지만, 맛은 강하다. 신인섭 기자
김 박사가 8년 만에 대풍을 이룬 복숭아에 감격해 지난달 6일 SNS에 올린 글이 떠올랐다. “복숭아가 익어가고 있다. 비료도 거름도 주지 않고 약 한 방울 도움 없이 자연 그대로 익어가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복숭아 자연농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는데 이제 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솎아주지도 않고, 봉지도 싸지 않고…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보다 가슴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응원하고 애정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이문웅 교수님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바른 농사, 자연농은 맛으로 보답할 것으로 믿는다.”
취재에 동행한 이문웅(78)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20년 가까이 자연농 현장을 찾아다녔고, 정년퇴임 후 13년 동안은 자연농업 사례연구와 전파에 주력하고 있다.
“기적의 사과보다 내 과일이 더 기적”

무농약과 제초작업을 하지 않자 약재로도 사용되는 바위솔이 혜림원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신인섭 기자
섬유공학과 출신 사업가로 한 해 1500만 달러의 섬유무역을 하던 농장주는 2009년 임원에게 회사를 맡기고 주주로 물러앉았다. 『기적의 사과』 책을 2시간 만에 다 읽고, 다음날 회사에 나가서 내린 결단이다. 그리고 건국대 대학원에 진학해 자연농의 이론과 철학을 다진 ‘관행농업·유기농업·자연농업으로 재배된 배추 및 김치의 성분분석 및 기능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2014년 8월 생명자원식품공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농사에 대해 “먹는 것이 몸이 되고, 그걸로 생명을 지탱한다. 몸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몸에 좋은 걸 생각한다면 자연농업이 최선이다. 맛도 훨씬 좋다. 요즘 밥 못 먹고 사는 사람은 없다. 어떤 밥을 먹고 사느냐가 문제다. 산삼과 인삼의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설명했다.
지난 8년의 성과에 대해서는 “일본 기무라의 ‘기적의 사과’에서 착안했지만 기적의 사과를 뛰어넘었다. 그는 과수에 식초 희석액을 한 해 10~13회 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친다. 그러니 내 과일이 더 기적이다. 이런 먹거리야말로 최고의 약이고 최고의 병원”이라고 자평했다.
혜림원은 지금까지 블루베리·계란·과일잼·된장 등을 조금씩 판매했다. 내년에는 수확 작목도, 양도 훨씬 늘 것으로 기대한다.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만 있다면 생산을 늘릴 준비는 충분히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