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5> 전북 임실군 운암면 옥정호 주변

섬진강댐이 담수되기 전 임실군 운암면은 넓은 농토와 꽤 큰 마을이 여럿 있던 동네였다.1965년 댐이 준공되어 마을 대부분이 수몰되고 고향을 떠나지 못한 주민들은 물에 잠기지 않은 골짜기로 들어가 화전을 이루며 궁벽한 삶을 살고 있다. 지난 24일 군청에서 얻은 지도를 한 장 들고 옥정호 순환도로를 따라 물가 마을을 찾아갈 때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장맛비를 한바탕 쏟아 부을 기세다. 낮은 먹구름이 호수를 덮고 있었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혹시나 마을 입구를 지나칠까 작은 이정표까지 놓치지 않고 천천히 굽이길을 돌아가니 ‘용운리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물길 옆에 서 있다. 물가에 폐선(廢船)만 한가하게 흔들리던 마을에 요란한 차소리가 나자 이진연(46)씨가 문 밖으로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나왔다. 방문 이유를 설명하니 뚱한 표정으로 두 딸과 부인과 함께 집 뒤편에 있는 우사로 발길을 돌린다. 어제 낳은 송아지를 돌보기에 바쁘단다. 경운기를 타고 밭에 가던 김인수(44)씨는 볼멘소리로 정부에 불만을 쏟아 낸다.“상수원보호도 좋지만 주민에 대한 대책도 없이 갑자기 무조건 고기도 못잡게 하고 골짜기에 남아 있는 조그만 땅뙈기에 목숨을 걸라니 죽으란 얘기지 뭐야.”하며 얼굴을 붉힌다.

삼면이 물로 막혀 있는 마을 현실에선 공감이 가는 얘기다.

내마촌 앞에 그림 같은 섬이 하나 있다. 담수 전 용운리 불암동 뒷산이 물에 잠기고 일부만 남아 외안날이라 불리는 섬이다. 그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국사봉은 이미 이름난 촬영장소이다.

세 가구가 살던 외안날에 지금은 자연으로부터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출을 얻고 절제된 소비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이정연씨가 부인, 두 자녀와 함께 고구마, 참깨 농사를 지으며 지키고 있다.

용운리 끝자락에 있는 용동마을에서 만난 김종섭(74)씨는 명문대에 수석합격한 손자 자랑과 얼마 전 막내아들과 결혼한 베트남 며느리 자랑에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예빛수련원으로 새단장한 용운분교에 가니 수련원에 온 학생들의 점심을 마련하느라 바쁜 호치탄란(23)씨를 만날 수 있었다. 물 선 타국에 시집와 마을일에 톡톡히 한몫을 하는 외국인 며느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칭찬은 끊일 줄 모른다.

옥정호 상류에 있는 학암리에서 쪽배를 타고 붕어를 잡고 있는 손홍구(68)씨. 수위가 올라가면 붕어를 잡고 내려가 물이 상류까지 차지 않으면 농사를 짓는다.

동네가 물에 잠겨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노인들이 석달에 한번씩 만난다는 구암산장으로 갔다.

물가에 있는 식당이지만 담수 전에는 산중턱이었다는 이유로 이름 끝에 산장이 붙는다.

백발의 노인들의 옛추억을 듣고 있자니 지난 거친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사진 글 강성남기자snk@seoul.co.kr


[피플]무공해 수제 전통차 만드는 정소암 씨

정소암씨(41).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주차장에서 오르는 맨 꼭대기 집에 살면서 전통차를 덖는 여인이다. 철저히 무농약을 고집하고 차 나뭇가지 전지를 일일이 손으로 하는 고집쟁이이기도 하다.

오로지 땅심과 손맛에 의지해 농사를 짓는다. 그가 만드는 차는 무공해, 100% 수제차다. 녹차의 상품화, 대량생산의 길이 열리면서 수제차는 힘만 들뿐 돈이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정씨는 수제차만을 생산한다.

“딸 하나 공부만 시킬 수 있으면 돼요. 특별히 수제차에 대한 철학이나 고집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부모님이 해 오신 대로 하다보니 그렇다”며 웃음을 지었다.

말이 그렇지 주변에서 모두 손쉬운 기계차를 만들고 농약과 비료를 뿌려대면 흔들릴 법도 할 텐데…. 더군다나 “남들 다 기계차 하는데 뭐 그리 잘났다고 혼자만 수제차야!”하는 질시와 비난도 적지 않았을 텐데.

“‘세상이 술에 취해 돌아가면 술찌끼라도 먹고 취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나중에 보자 하는 오기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땅심을 믿고 무공해 수제 농법만을 고집해 온 정씨의 믿음이 최근 결실을 맺고 있다.

“곡우(穀雨) 무렵에 따는 우전이 최고인데 올해는 날씨가 쌀쌀해서 곡우가 지나도 다른 차밭에는 움조차 트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 차 밭에는 곡우 1주일 전부터 잎을 따기 시작해 그 후에도 웃자란 잎들을 몇 차례나 걷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동네사람들이 어떻게 된 거냐고 궁금해하며 구경하러 몰려들 정도였어요. 그게 바로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땅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수제차는 농사만 아니라 제다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400도의 고온에서 손으로 차를 덖어야 하니까 손톱 밑이 헐고 벌어지기 일쑤. 또 차를 덖을 때는 화장실도 못가고 비누 세수는 물론 고기, 마늘 등 강한 향이나 음식은 피해야 한다. 차의 맛과 향을 가늠하는 후각을 지키기 위해서다. 어디 그뿐인가. 여러차례 차를 덖어 나쁜 기운을 빼내면서도 잎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솜털 날리듯 조심스럽게 덖어야 한다. 한번 작업장에 들어가면 20시간 이상 서 있어야 하고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정씨에게 작업장은 구도의 장처럼 경건하고 송곳처럼 날카롭게 정신을 세워야 하는 곳이다.

정씨는 12년 전 남편을 암으로 잃고 두 돌이 지난 딸아이 손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차농사를 거들고 구경해서 차라면 지긋지긋했는데 차농사에 인생을 걸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때인가 차농사가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만드는 차는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씨는 차(茶)의 한자를 가만히 뜯어 보았다. ‘艸+人+木’. 풀과 사람과 나무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까 차나무에 주는 손길이 아이에게 주는 손길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는 “차는 마음으로 가는 음식”이라고 주장한다. 정씨는 차가 정말 좋은 것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며 차를 통해 화를 삭이고 분노를 다스린 이야기 하나를 소개했다.

“예전에 신용카드로 냉장고를 할부로 구입했다가 대금을 갚지 못해 독촉을 받은 적이 있어요. 카드사 직원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어요. 빚을 진 건 잘못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본사로 전화를 해 항의를 했어요. 그날 밤, 자정이 되어갈 무렵에 제게 욕설을 퍼부었던 그 직원이 서울에서 하동까지 사과하겠다며 찾아왔어요. 정말이지 그 사람의 얼굴을 대한다는 것 자체가 소름끼치고 싫었어요. 잠깐 기다리시라면서 찻물을 올려놓고 차를 끓이는데 그 사이 나도 모르게 분노가 가라앉더군요.”

정씨가 수제차를 고집하는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해오던 수제차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고 싶어서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의 차문화는 주로 향유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되어 왔으나 생산자의 측면에서도 지키고 계승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수제로 하다보니 소량 생산을 할 수밖에 없어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차를 공급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욕심내지 않을 생각이다. 사시사철 밭두렁에서 차나무를 보살피고, 인대가 늘어날 정도로 육체를 쓰지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정씨의 모습에서 깊고 은은한 차의 향기가 배어났다. 어쩌면 세상은 정씨처럼 우직하고 묵묵하게 자기 길을 걷는 사람들 때문에 변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화개|글 김후남기자 khn@kyunghyang.com〉

속리산 자락 산방(山房)에서 느릿느릿 안분지족하는 도종환 시인

“빠른 삶은 병든 삶이요, 느린 삶은 건강한 삶, 조용한 삶은 거룩한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에게서 섬세하게 흔들리는 여린 감성을 보았다면 아마 맞을 것이다. 그에게서 굽힐 줄 모르는 지사적 면모를 발견했다면 그 역시 맞을 것이다. 시인 자신이 노래했던 ‘부드러운 직선’은 마치 자화상과도 같은 표현이다. 도종환은 부드럽고도 올곧은 시인. 성품이 그러하고 삶이 그러했다. 볕 좋고 바람 선선한 날, 속리산 자락 그림 같은 산방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첩첩 산중에 그림처럼 서 있는 외딴 황토방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골길을 달렸다. 서울 밖으로 고작 두어 시간 나왔을 뿐인데 코끝에 와 닿는 공기의 감촉이 다르다. 순도 높은 바람이 가붓하게 불었다. 기분 좋은 세기로 뺨도 살짝 간질인다. 더 이상 차로 들어가기엔 길이 너무 좁아 보이는 지점에서 차를 내려 걷기로 한다. 마중 나온 도종환(52) 선생이 특유의 착한 미소로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선생의 집은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들어온 다음에도 또 한 번 산속에 폭 파묻혀 있었다. 첩첩산중에 버섯 모양으로 자리 잡은 외딴 황토방.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오래오래 살라’는 뜻에서 구구산방(龜龜山房)이란다.

앞마당에는 담요를 덮어놓은 듯 정갈하게 잔디가 깔려 있다. 마당 한켠엔 멋스럽게 기운 넓적 바위 사이로 어여쁜 연못이 고여 있다. 일부러 만들어 꾸민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니 더욱 어여쁘게 보인다. 집 앞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계곡이 흐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라니가 물을 마시러 오고 오소리, 너구리가 먹을거리를 찾아 찾아든다고 한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에 마음 뺏기기 십상이다.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후배가 암 판정을 받고 요양 차 지은 집이에요. 집 위쪽으로 법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 스님이 후배에게 이 집터를 소개했다고 하더군요. 3년 전 후배가 저 세상으로 가 내가 여기 들어와 살게 됐지요.”

시인이 충북 보은의 이곳 산방에 머문 지도 어느새 3년이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 어렵사리 복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병이 들어 이곳으로 피신했다. 자율신경실조증. 이름조차 낯선 이 병은 특히 워커홀릭들을 노리는 병이라 한다. 몸의 균형이 깨져 심신이 무기력에 빠지는 상태로, 이 병에 걸렸을 땐 잔병이 들어도 잘 낫질 않는다. 감기라도 한번 걸리면 주사, 약 다 써봐도 1년 넘게 낫질 않을 정도란다. 발병 당시 그는 전교조, 민예총, 지역 운동에 학교 일, 원고 마감, 방송 일까지 한꺼번에 너무 여러 가지 일을, 그것도 너무 잘하려고 애쓰며 살았다.

“심신이 무기력하니 제자들에게 활기찬 수업을 해주지 못하겠더군요. 몇 번의 휴직 끝에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이 집에 있다 보면 온종일 새소리를 들으며 사는데 한번은 새 한 마리가 처마 끝을 빙그르르 날면서 ‘선생님, 선생님’하더라구요. 영락없이 그 소리예요. 그러면 ‘아 왜 자꾸 불러 임마’ 하고 대꾸를 하지요. 아마 제자들 생각이 나서 그렇게 들리는 건지….”

시인은 자연 치유의 힘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건강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 있었다는 에피소드로 답을 대신한다. 하루는 장미농원을 하는 친구가 장미꽃을 갖다가 산방 거실에 꽂아놓았단다. 한 열흘이 지나도 꽃이 시들지 않아 기특하다 싶었다. 그렇게 20일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나도 그 모양 그대로 있더란다.

거기서 또 한 달이 지나니까 이번엔 잎이 다 지더니 새잎이 돋더라는 것이다. 해준 것이라곤 물 준 것밖에 없는데 뿌리도 없는 장미꽃대는 그렇게 석 달을 살았다. 그런 걸 보면서 ‘이 집 안에 생명을 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한다. 황토와 숲, 맑은 공기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치유’의 힘이 내재돼 있음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큰 위안을 받았단다.

“여긴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으니 하루 종일 조용한 가운데 새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가 없어요. 이곳에서 내 삶의 패턴도 바뀌었지요. 몸의 균형을 되찾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어요. 그전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평온한 속도, ‘느림’을 실천한다고 할까요. 이곳에서 지내면서 무엇보다 많이 변한 것은 마음의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입니다. 빠른 속도의 삶은 병든 삶이요, 느린 속도의 삶은 건강한 삶, 조용한 삶은 거룩한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산방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찬사일색인 손님에게 시인은 산방에서 겨울을 나는 혹독함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봄, 여름, 가을은 더없이 아름답고 평온하지만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한다.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심야전기만 들어오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나무를 직접 해다가 벽난로에 불을 지펴야 한다. 한파가 몰아치면 수도가 꽁꽁 얼기 일쑤지만 산길이 얼어버리면 수리하는 사람도 들어오질 못하니 꼼짝없이 며칠씩 물도 없이 지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눈을 퍼다가 녹여서 끼니를 끓여먹곤 한단다. 겨울엔 그 혹독한 추위에 정신이 다 가팔라지지만 그런 것도 작가에게는 필요한 시간이라 여기고 견딘다.

“식구들도 종종 다녀갑니다. 큰아이는 군대 가 있고 작은 아이는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있어요. 또 한 분(아내)은 직장 다니시고….(웃음)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외롭게 보내는 시간도 작가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초여름 산방의 햇살을 즐기고 있자니 어느덧 점심때가 다 됐다. 시인은 늘상 먹는 대로 텃밭에서 나물 뜯어다가 비빔밥 정도 대접할 수 있다고 일어선다. 연못 위로 난 비탈길을 따라 몇 발자국 올라가니 소담스럽게 가꾼 자그마한 텃밭이 나온다. 쑥갓이며 아욱이며 상추며 고추며 하는 푸성귀들이 옹기종기 자라고 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마냥 여리고 부드러운 푸성귀들을 따다 열무김치며 오이무침 따위와 함께 섞어 커다란 양푼에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볐다. 시내에선 맛볼 수 없는 무공해 비빔밥은 소박하지만 한편 호사롭다. 밥값하겠다고 텃밭에 나가 잡풀을 뽑고 설거지도 뚝딱 하고 나니 손님에게도 산방은 내집처럼 친근하다.

마음속의 풍랑이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로 가는 길
시인은 듣던 대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기야 1백만 명의 심금을 울린 ‘접시꽃 당신’의 시인이 아닌가. 결혼 3년 만에 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내고 가슴 저릿한 사부곡을 시로 노래한 것이 벌써 20년 전 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은 후 자신마저 병마와 싸우면서 시인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가 아파서 이를 하나 뺀다고 할 때 처음에는 빼기가 싫죠. 빼고 나면 별거 아니에요. 아, 이게 내 것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내 몸의 하나하나가 다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주신 분이 달라고 하면 다시 드려야 되는 것…. 그것이 다리 한 쪽이 됐든 몸통이 됐든 내놓으라고 하면 그때는 전체라도 다 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그 집착을 풀고 죽음 앞에서 언제든지 ‘네’하고 대답하려면 수양하고 훈련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큰 고통입니다. 하지만 의미 없이 오는 고통은 없지요. ‘죽음’에서 뭔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무엇에서도 깨닫지 못할 겁니다. 내 몸이 아플 때도 이것을 통해 내가 또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무엇을 깨달아야 하나… 그 고민들이 이번 시집으로 묶여진 거구요.”

그의 신작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은 그가 산방에서 머물며 텃밭을 가꾸고 장작을 패고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완성했다. 지난해 2월부터 올 1월까지 ‘아름다운 가게’ 홈페이지에 매주 한 편꼴로 기증했던 60여 편의 시를 묶은 것이다. 시인은 시집 인세를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기로 했다. 수익금은 충북 민예총을 통해 베트남 평화학교 짓기 사업에 쓰일 예정이다.

시집의 제목인 ‘해인으로 가는 길’은 곧 그의 산방 생활을 의미한다. ‘해인’은 풍랑이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불교 용어다. 말하자면 번뇌의 물결, 탐욕의 물결이 가라앉은 상태에 대한 시적 비유인 셈이다. 한편 ‘화엄’이라는 것은 조화, 어울림, 나눔, 평등의 추구를 말한다. 화엄을 추구하면 참여적인 삶으로 발현되기 쉽다.

“여기 오기 전에는 화엄의 삶을 지향하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해인과 화엄, 이 두 개의 삶은 별개의 것인가, 하나가 될 수 없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다가 불경을 보니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라고 써 있더군요. 두 개가 하나 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맞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성찰이 부족한 채 행동이 앞선 삶을 산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더군요.”

시인은 최근 시를 배달하는 집배원으로 나섰다.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www.for-munhak.or.kr)에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도종환의 시 배달’을 시작한 것이다. 매주 월요일 그가 직접 고른 시 한 편을 메일로 받을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좋은 시 한 편 읽으며 한 주를 아름다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시를 배달 받고 싶은 독자는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된다.

“우리 동네에 착한 집배원이 한 명 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마을 집집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데 우편물만 던져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집안 사정, 건강 상태까지 관심을 가지고 살핍니다. 바쁘게 오가는 길에 산이나 언덕에 올라 몸에 좋다는 산도라지, 칡꽃 등을 뜯어서 연로하신 어르신들 드시라고 갖다 드리기도 하구요. 산삼 뿌리 캐다가 마을 어르신 갖다 드린 것만 해도 70뿌리가 넘어요. 그걸 갖다 팔면 돈도 꽤 될 텐데 그렇게 하질 않더군요. 누군가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멈춰 서서 그 사람을 위해 나물을 뜯고 산삼을 캐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시인은 자신도 그 집배원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으로 한 편 한 편 시를 골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리라. 바쁜 세상에 내 갈 길 가기도 바쁜데 나물 뜯을 시간, 산삼 캘 시간이 어디 있냐고 혀를 차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구구산방의 느린 기운 속에서 마음 안으로 작은 깨달음이 조용히 스며들어왔다.


글 / 박연정 사진 / 김준수(프리랜서)
200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