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션엔 설이 없네
[매거진 Esc] 교통정체를 피해 수도권 근처 여행지에서 명절 보내기
한겨레 남종영 기자
» 태안 곰섬 앞의 한 펜션. 명절 펜션의 예약률은 주말보다 떨어지는 편이다.
설날 국내여행 최대의 적은 교통정체다. 이럴 땐 수도권 근처 여행지를 찾아 온가족이 함께 보내는 펜션 여행을 추천한다. 교통정체를 피할 수 있고, 대형 평수를 빌리면 명절 차례를 지내기에도 손색이 없다. 우정훈 휴펜션 온라인팀 과장은 “가족이 펜션에 모여 휴양형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펜션으로 가라=제부도 등 경기 남부와 강화도, 그리고 가평·양평 등 경기 동부 등은 펜션 밀집 지역이다. 펜션 예약사이트 ‘저스트고’ 가맹업체 기준으로 양평·가평에는 50~60곳, 강화도에는 20~25곳 등이 운영된다. 이 지역도 설날 당일에는 길이 막히므로 이동을 피한다. 대신 설날 전후로 이동하도록 하고, 2박3일~3박4일 동안 펜션에서 휴양형 명절을 지낸다.

교통정체를 완벽히 피하려면 인천공항 고속도로로 연결된 영종도와 신도·시도·모도, 장봉도, 무의도 등을 목적지로 삼는다. 일단 공항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설날 당일에도 막히는 일이 없다. 신도·시도·모도와 장봉도는 삼목항에서 세종호(032-884-4155)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며, 무의도(muuido.co.kr)는 무의도해운이 잠진도 선착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항한다. 영종도 주변에도 펜션들이 많다.

⊙설날에도 문을 연다=걱정하지 마시길. 설날에도 대부분의 펜션은 문을 연다. 휴펜션의 우정훈 과장은 “지난해 추석의 경우, 가맹업소 399곳 가운데 문을 닫은 곳을 열 손가락으로 꼽았을 정도”라며 “미리 예약을 하고 가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명절 펜션의 예약률이 주말보다 떨어지는 편. 스키장 근처의 펜션을 제외하고는 성수기 요금을 적용하지 않는 곳도 많아 경제적이다. 반면 강원·경기 동부의 스키장 주변 펜션은 최소 2주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펜션 예약사이트에서 비교하라=인터넷 펜션 예약사이트에서 여행지역을 선택한 뒤 찾으면 편리하다. 가격과 위치 등 기본 정보 외에 펜션 내·외부 시설이 사진으로 소개된다. 휴펜션(huepension.com), 저스트고(justgo.kr), 우리펜션(wooripension.com) 등이 많이 찾는 사이트다.

남종영 기자

[일상탈출] 겨울방학 생태학습지 남해 나비생태공원 진주 진양호동물원
교과서 속 나비… 나도 한번 만져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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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나서기 싫다면 '부산 아쿠아리움'에도 있어요
겨울방학이 막바지로 달려간다. 덩달아 바깥 나들이를 보채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커진다.

기왕 아이들을 동반한 나들이라면 교육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장소를 찾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 책 속에서 배웠던 것들을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지만, 막상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 성지곡동물원이 새 단장을 위해 문을 닫은 것은 더욱 아쉽다.

그러나 접혀있던 지도를 조금만 크게 펼치고 거기에 시간을 보탠다면, 고민은 줄고 선택의 폭은 늘어난다. 남해 나비생태공원과 진주 진양호동물원도 그중 하나. 그곳에 가면 다양한 곤충, 동물들이 그림책 밖으로 나와 우리를 맞는다.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부산에서 넉넉잡아 3시간 거리. 생각하기에 따라 다소 멀어보이기도 하지만 이참에 얘들 핑계로 겨울 남도를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남해 나비생태공원

회색빛 겨울바다 위로 뜨문뜨문 섬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남해다. 겨울바다를 끼고 남해섬을 돌다 편백자연휴양림 이정표를 따라 산으로 들어가면 생뚱맞은 둥근 지붕의 온실이 보인다. 문을 열고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겨울은 사라진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에 위치한 남해 나비생태공원. 2006년 10월 개원했다. 240평 규모의 크지 않은 온실 속에는 늘 10여종 1천500마리의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오히려 크지 않은 규모 덕분에 온실 안은 나비 천국이다. 배추흰나비, 남방노랑나비, 암끝검은표범나비…. 종(種)별로 다른 색깔의 점(點)들이 열대식물 사이를 떠다닌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잎사귀라도 젖히면 그 속에는 어김없이 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는 나비들을 볼 수 있다. 무섭지도 않은 듯 제 할 일만 열중이다. 잎줄기를 심하게 흔들면 그제서야 오색의 분가루처럼 하늘로 퍼져 날아간다.

얘들 생각에 찾아왔다가 어른이 먼저 '호접지몽'의 별세계에 빠져버릴지도 모르겠다.

온실을 나서면 체험학습실. 이곳에서는 나비가 알에서 애벌레로 부화하는 모습부터, 애벌레가 자라 번데기로 변하는 모습들을 과정별로 직접 살펴볼 수 있다. 번데기가 성충으로 '환골탈태'하는 모습도 볼 수 있지만, 매일 그 시간대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한다.

먹그림나비의 번데기는 낙엽을 닮았다. 아이들과 함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이파리 중 번데기를 찾는 '숨은 그림찾기'를 해보자. 어지간해선 한 번에 맞추기가 쉽지 않을 듯하니, 그럴싸한 상품을 내걸어 오래간만에 선심을 쓰는 척해도 무방할 듯하다.

알에서부터 번데기 껍질을 벗기까지 30여일간의 과정을 거쳐 이곳에서 태어나는 나비는 평균잡아 매일 200여마리. 이들은 모두 온실로 옮겨져 10여일간의 짧은 삶을 살아간다.

체험학습실을 나와 바로 옆 표본전시실에 가면 세계 각국 279종의 나비를 구경할 수 있다. 날갯짓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 많은 나비들을 다 키울 수도 없을 뿐더러 식물방역법상 살아있는 나비를 수입하는 것도 어려우니, 표본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그 외 제2전시실에서는 나비뿐만 아니라 다양한 곤충들의 습성도 소개하고 있으니, 꼭 들러볼 것.

관람시간은 동절기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니 참고하길 바란다. 나비 습성상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활동량이 많다고 하니 그 시간을 맞춰 방문하는 것도 노하우다. 요금은 어른 1천원, 어린이 600원을 받는다.

나비만 보고 돌아가기에 모처럼 나선 길이 아쉽다면 주변 볼거리도 다양하다. 인근 해오름예술촌과 바람흔적미술관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고, 아기자기한 집들로 유럽의 전원을 연상케 하는 독일인마을도 10분 이내 거리에 있다.

# 진주 진양호동물원

진주 진양호공원 속에 자리잡고 있는 진양호동물원에는 현재 54종 300여마리의 동물들이 합숙(?)하고 있다. 부산 성지곡동물원이 재개장을 위해 당분간 문을 닫은 지금, 부산·경남지역에서는 유일한 '제대로 된' 동물원.

경남수목원과 울산대공원에서도 작은 동물들을 볼 수 있기는 하나, 뭐야, 호랑이 한 마리 없다. '동물원'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호랑이나 사자, 기린 등등. 동물원 간다고 밤잠을 설친 아이들이 정작 호랑이 한 마리 구경하지 못한다면? 실망한 아이들을 달래느라 뒷감당이 힘들지도 모른다. 부산·경남지역에서 이들을 보려면 진양호동물원뿐이다. 단, 코끼리는 지난 2002년 노령으로 죽은 까닭에, '코끼리아저씨는 코가 손'인지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긴 하다.

막상 도착하면 겨울이라 찾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다소 썰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의치 마라. 동물 구경 간 게지, 사람 구경 간 것은 아니니까. 호랑이, 곰 등 포유류 27종과 타조와 공작 등 조류 26종을 둘러보다 보면, 정작 구경하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한 종이 모자라다고? 그건 비단잉어 30마리. 물고기도 있다. 이 중 반달곰, 수리부엉이 등 천연기념물도 9종이나 된다.

염소와 양, 미니호스(말), 공작 등 10여종 50마리가 함께 어울려 생활하는 동물가족농장에서는 어린이들이 우리 속으로 들어가 동물들과 스킨십도 할 수 있다. '프리허그'를 사람들끼리만 하란 법 있나? 염소랑 '프리허그' 하다 보면 그 숨소리 속에서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동물원을 찾을 땐 카메라는 필수.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자, 낙타 앞에서 사진이라도 한 컷 찍으면, 그 한 장이 소중한 추억이다. 물개 1쌍도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이곳의 스타이니 이 또한 참고하자.

관람시간은 동절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관람료는 어른 1천원, 어린이 500원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 강아지나 고양이, 심지어 원숭이를 사달라고 조를지 모르니 당분간 부작용(?)에 주의할 것.

글=김종열 기자 bell10@busanilbo.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


# 교통편

남해 나비생태공원에 가려면 일단 남해고속도로 사천IC에서 내린 후 3번 국도를 따라 창선·삼천포대교을 건너 남해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창선교를 지나 해오름예술촌, 독일인마을 이정표를 따라 해변도로를 가다가 독일인마을을 얼마 못 가 편백자연휴양림 표지판과 함께 우회전하면 된다. 오전 8시께 부산을 출발하면 나비 활동이 왕성한 오전 11시 이전에 도착할 듯.

진주 진양호동물원은 남해고속도로 진주IC와 사천IC 사이에 위치한 진주JC에서 중부고속도로 대전 방면으로 옮겨탄 후 서진주IC에서 차를 내리면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남해 나비공원에서 조금만 일찍 발길을 되돌려 돌아오는 길에 들러봐도 좋을 듯하다.


/ 입력시간: 2008. 01.24.

[Let’s Go] 겨울에 만난 창녕 ‘우포늪’

우포늪에 오실 땐 맨발로 오세요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되는

우포에 오실 땐 맨발로 오세요

사시절 모양 색깔 모두 다른

우포에 오실 땐 맨발로 오세요

수초에 뒤덮인 퇴적늪의 단단함을

때론 살얼음 차가움을

자분자분 맨발로 느껴보세요

(하략)

-송미령의 시

‘우포늪에 오실 땐 맨발로 오세요´ 중.

# 늪마다 독특한 풍경

철저히 준비하고 떠난 여행에서는 많은 배움을 얻고, 준비 없이 떠난 여행에서는 많은 것을 느끼고 온다 했다. 전자를 여행자라 한다면, 후자는 방랑자쯤 될까. 경남 창녕의 우포를 찾아가는 길은 후자에 속했다.

우포늪은 창녕군 대합면과 대지면, 이방면, 유어면 등에 걸쳐 있는 국내 최대의 자연 습지다. 소의 머리를 닮은 우항산이 늪에서 물을 마시는 듯하다고 해서 우포(牛浦)늪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늪 전체의 넓이는 서울 여의도와 비슷하다. 가장 큰 우포를 비롯해 인근의 목포와 사지포, 쪽지벌 등 4개의 늪을 아울러 우포늪이라 부른다. 나이는 한반도와 동년배다. 대략 1억 4000만 살 정도 됐다. 면적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2.3㎢쯤 되는 담수면적에 1000여종의 생명체가 올망졸망 살아가고 있다.

창녕 사람들은 우포를 굳이 ‘소벌’이라 부른다. 소벌이란 순 우리말 표현을 두고 일제강점기에 우격다짐으로 바뀐 ‘우포’로 부르기가 썩 내키지 않아서인 듯하다. 다른 늪의 경우도 마찬가지. 공식 문건에 표기되지는 않지만, 각각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우리말 이름을 갖고 있다.

주민들이 ‘소벌’로 부르는 우포는 ‘소(牛)를 먹이거나, 소 모양의 넓은 벌판’이라는 뜻이다.‘나무벌’ 목포는 ‘왕버들 나무(木)가 많은 벌’이고,‘모래벌’ 사지포는 ‘모래(砂) 섞인 땅(地)으로 된 벌’이다.‘쪽지처럼 작은 벌’이라는 뜻의 쪽지벌은 다행히 예쁜 순 우리말 이름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작다는 의미를 가진 ‘쪽’이란 표현을 일제가 자기네 식으로 바꾸기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 석빙고(위)·용선대(아래)
# 우포, 겨울을 말하다

소목 제방에 올라 바라본 소벌. 넉넉하고 포근한 모습이다. 그 너른 품안에서 싱싱한 아침을 맞은 겨울철새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큰고니(백조) 무리는 차가운 얼음 위로 제 모습을 비춰보며 ‘나르시시즘 놀이’를 즐기는 듯하고, 물닭들은 물고기를 잡느라 자맥질에 바쁘다. 생기를 잃은 채 숨을 죽이고 있을 거란 예상에 쨍∼하고 금이 가는 순간이다. 오래 전 딱딱하게 얼어버린 늪에서 희망을 본 이가 송미령(51) 시인이다.

“얼굴이 베일 만큼 차가운 겨울바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요. 얼어붙은 나뭇가지에서 움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면 가슴이 설레죠. 겨울엔 모든 것이 정지해 있을 듯하지만, 새벽과 저녁 무렵이면 생기가 넘쳐 흘러요. 겨울철새들이 먹잇감을 구하느라 물속에 머리를 처박기도 하고, 때론 먹이를 두고 싸우기도 하죠.”

소목 제방 왼쪽으로 난 길은 반드시 걸어봐야 한다. 나뭇잎 무성한 계절엔 보이지 않고, 겨울과 초봄에만 잠깐 드러나는 길이다. 개구리덤 주변의 겨울 철새들과 원시적인 풍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자박자박 걷다 보면 모래벌과 만난다. 소벌의 광활한 풍경에 비하면 아기자기한 호수의 느낌을 주는 곳이다. 얼지 않은 물가 가장자리에 수백 마리 철새들이 부리가 닿을 만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은 호젓함을 더한다. 예쁜 그림이 담긴 우편엽서를 보는 듯하다.

모래벌을 지나 나무벌로 향했다. 수심이 깊어 많은 수중식물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꽁꽁 언 얼음 위엔 왕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왕버들 뿌리 위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쪽배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낡고 초라한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뱃머리 너머로 예전 많은 창녕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력을 나눠주던 우포늪의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 시인, 늪에 빠지다

우포늪 끝자락의 쪽지벌은 크기가 가장 작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진입로가 잘 닦여 있어 탐방객들이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 십상이다.

쪽지벌 사초군락지는 송미령씨가 우포늪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다.‘우포늪에 오실 땐 맨발로 오세요’란 시도 이곳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단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자분자분 걷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에요. 바람에 살랑대는 사초 위에 누워 보세요.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거예요.”

창녕에 둥지를 튼 지 벌써 27년.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았으니, 사초 위에 얼마나 많은 추억을 맺어 놓았을까. 그 중 몇몇은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을 게다.

시나브로 해거름이 찾아왔다. 늪은 어제처럼, 억만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저녁 노을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창포물로 감은 머릿결 같은 사초 위에 잠시 쉼을 청했다. 포근하고 부드럽다. 우포의 정취를 오롯이 느끼려면 맨발이 아닌 ‘맨살’로 찾을 일이다.

글 사진 창녕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여주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창녕 나들목→우회전→우포늪생태학습원→우포늪전망대

맛집 우포의 가장 큰 먹거리는 토종붕어. 겨울철에 특히 큰 씨알의 붕어가 많이 난다.‘우포붕어찜’은 붕어찜 요리로 근동에서 명성이 자자한 집.1인분에 공기밥 포함 1만 1000원을 받는다. 붕어 매운탕은 3만원.(055)532-2088.

가볼 만한 곳

창녕고분군 ‘제2의 경주’라고 불리는 창녕은 신석기에서 근세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의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특히 비화가야의 수도였던 만큼 가야시대 무덤 형태를 한 고분이 1만기나 남아 있다. 그 중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 볼 만하다.

석빙고 공기의 대류현상을 이용해 얼음을 천천히 녹게 한 시설물. 송현동에 있다. 겨울철 저장해 놓은 얼음이 7∼8월 한여름까지 녹지 않았다고 한다. 공기를 식히는 역할을 담당한 원통형의 ‘홍예’ 등 건축물 자체가 아름답다. 미리 군청에 연락하면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관룡사와 용선대 화왕산군립공원에 자리한 관룡사는 신라시대 고찰. 관룡사에서 20분 남짓 떨어진 용선대도 잊지 말고 찾아볼 것.

산토끼 노래비 동요의 대명사 ‘산토끼’는 1930년 이방면 이방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이일래 선생이 작사·작곡했다. 이방초등학교 교정에 산토끼 노래비가 있다. 창녕군청 (055)530-2520, 창녕환경운동연합 532-7856.

기사일자 : 2008-01-24
사람은 빛으로부터 왔다
강제윤의 '섬을 걷다' <1> 덕우도
2008-01-24 오전 12:10:40
연재를 시작하며

이 나라에는 사람의 길이 없다. 사람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다. 길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란 사실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나서면 질주하는 자동차의 위협으로 사람들은 늘 위태롭다.

사람의 길을 찾아 다녔다. 섬에서 그 길을 발견했다. 섬의 길은 사람이 주인이다. 자동차의 위협이 섬이라고 비껴가지 않겠지만 섬의 길들은 아직 안전하다. 이제 사람들은 자동차를 버리고 섬으로 가야 한다. 걷기 위해 섬으로 가야 한다.

행자부에 따르면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다. 그 섬들 중 사람이 사는 섬은 대략 500여개다. 한국은 '섬나라'다. 나는 섬에서 태어났고 오랫동안 섬에서 살았다. 섬을 떠난 뒤에도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2006년 가을부터 한국의 섬들을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을 걸어갈 것이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는 "교토에 있어도 나는 교토가 그립다."고 노래한 바 있다. 나는 섬을 걸으면서도 섬이 그립다.


완도, 폭풍주의보

"나는 인간은 '동물'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다시 말하자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 이일훈, '모형 속을 걷다')


'동물'이란 '짐승'이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다. 건축가 이일훈의 일깨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내 그 단순한 사실을 잊고 살았을 것이다. 동물(動物)이란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존재인가. 동물, 동물.... 동물인 내가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걷지 않았다. 유랑자로 몇 년을 떠돌았으나 나는 늘 탈 것에 실려 다녔다. 부끄럽게도 유랑자가 움직이는 일보다 움직이지 않는 일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차를 버리고도 버린 보람이 없었다. 나의 차를 버린들 남의 차를 타고 다닌다면 진정으로 차를 버린 것이 아니다. 몇 해 전까지 나는 남해 바다의 어떤 섬에서 8년을 살았다. 섬에 사는 동안 내가 섬을 떠난 것은 오로지 뭍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섬을 꿈꾸면서도 섬에 붙들려 섬으로 가지 못했다. 한 섬을 버린 뒤에야 나는 비로소 모든 섬으로 간다. 내가 섬으로 가는 것은 걷기 위해서다. 움직이기 위해서다. 움직이는 존재, 동물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다.
▲ 다시 뱃길이 열렸다. 생일도에 잠시 정박했던 배가 덕우도를 향해 간다. ⓒ강제윤

완도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황제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서둘러 여객 터미널에 도착했으나 배는 뜨지 않는다. 그렇게 오래 섬에 살았으면서도 폭풍주의보 생각을 왜 못했던 것일까. 결국 나를 묶은 것은 바람이 아니다. 파도가 아니다. 나를 묶은 것은 나다. 폭풍주의보가 내려도 평수 구역의 섬들로는 배가 다닌다. 뱃길이라고 다 같은 길이 아니다. 평온한 날씨에는 무관하지만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거세지면 배의 등급에 따라, 섬의 위치에 따라 항해 할 수 있는 바다가 달라진다.

항로는 난이도에 따라 평수구역, 연해 구역, 근해 구역, 원양 구역 등으로 나뉜다. 평수 구역은 '호수, 항만이나 만 안의 수면으로서 법령으로 지정한 항해 구역'인데 쉽게 말하면 섬이나 만으로 둘려 쌓여 있어서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크게 일지 않는 바다를 말한다. 완도에서는 약산도, 금일도,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등의 섬들이 평수 구역 안에 있다. 폭풍 치는 날, 나는 평수 구역의 섬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먼 바다 뱃길이 열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바다는 섬의 희망이고 절망이다. 육지로 가는 뱃길을 열어주는 통로인 동시에 단절이다. 우주까지 가는 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섬은 여전히 원시 바다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틀째 배가 뜨지 못한다. 여객 터미널 매표원 여자는 무심하다. 거센 풍랑에 배 못 뜨는 일이 그녀에게는 일상이다. 어차피 폭풍주의보가 해제 되더라도 오늘 황제도 배는 없다고 여자는 잘라 말한다. 배 시간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도는 홀수 날에만 간다.
▲ 덕우도 선창가에서 당숲이 보인다. 숲은 섬의 지붕이다. 그 아래서 사람들은 비바람을 피하고 편안히 잠든다. ⓒ강제윤

폭풍주의보가 아니라도 뱃길은 하루 걸러 하루씩 묶이는 것이다. 이틀에 한번 뱃길은 그나마 다행이다. 황제도 뱃길의 최종 기항지인 원도는 매주 일요일 한번만 배가 뜬다. 섬에서 20년을 살았으면서도 한 주에 한번 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 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제 눈높이에서만 세상을 본다. 뭍에 사는 이는 절대 섬에 사는 이의 고독을 알 수가 없다. 큰 섬에 사는 이들 또한 작은 섬에 사는 이들의 고통을 알 수 없다. 일주일에 한 번씩 뱃길이 열리는 섬사람들에게는 이틀에 한 번씩 배가 다니는 섬도 대처다.

덕우도

오후가 되자 풍속이 줄고 배들이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황제도행은 미루자. 오늘은 덕우도까지만 가자. 섬사랑 5호가 출항 한다. 1층 선실에는 세 분의 할머니가 벌써 자리를 잡고 누웠다. 고단했을 것이다. 섬사람에게는 고작 한 시간 반의 뱃길을 위해 이틀쯤 기다리는 일도 예사다. 섬에 사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배를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비를 기다리고, 물때를 기다린다. 몰려오는 멸치 떼를 기다리고, 커서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린다. 내리는 사람이 없어 모황도에는 서지 않고 배는 생일도에 잠시 들렀다가 내처 달린다. 생일도에서 제법 여럿이 탄다. 면소재지에 다녀오는 덕우도 사람들. 덕우도에 도착한 배가 승객들을 부려 놓고 급하게 뱃머리를 돌린다. 무정하다.
▲ 덕우도 선창가. 주민들은 양식 어구들을 손질한 뒤 바다 밭으로 나가 삶을 일군다. ⓒ강제윤

섬은 위태로워 보인다. 가장 높은 땅이 130미터에 불과 하다. 섬의 허리, 선착장에서 반대편 해변까지는 50미터가 넘지 않는다. 큰 태풍이라도 불어 파도가 치면 넘치고도 남을 거리다. 어떻게 섬은, 섬사람들은 수 천, 수 백 년을 무사했을까. 덕우도는 완도항에서 동남쪽으로 26킬로미터 해역에 있다. 같은 자를 쓰더라도 바다와 육지는 거리 감각이 전혀 다르다. 바다의 26킬로는 육지의 260킬로만큼이나 먼 거리다.

덕우도에 사람이 터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은 350여 년 전부터다. 한국 섬들의 거주 역사가 대부분 3, 4백년에 불과한 것은 그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섬들 또한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유사 이래 섬들은 해적의 침탈이나 육지 권력의 군사적 목적으로 자주 소개되곤 했다. 섬들이 비워진 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들의 약탈이 극심했던 때문이다. 군사력이 미약한 이 땅의 왕조들은 왜구들에게 식량이나 거점을 내주지 않기 위해 손쉬운 공도(空島)정책을 썼다. 섬들에서 본격적으로 사람살이가 다시 시작 된 것은 임진 병자 양대 전란을 전후한 시기였다.

선창가 민박집에 짐을 풀고 섬을 걷는다. 섬의 중심에 당산이 있다. 특이하게 덕우도의 당신은 해신이나 산신이 아니다. 당집에는 덕우도에 처음 들어온 입도조(入島祖)를 신으로 모셨다. 많은 섬에서 당제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 섬에서는 아직껏 당제를 정성껏 모신다. 외래신의 유입으로 해신과 산신 등 수많은 토착 신들이 쫓겨났지만 조상신만은 여전히 우리 삶의 중심에 거처하는 까닭일 것이다. 교회가 생긴 지 20년이 지났어도 신자는 고작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 섬에서만큼은 조상신이 주신이다. 수백 그루의 크고 작은 상록수들이 작은 당집을 신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당산. 조상신은 나무 신장들을 부려 자손들을 돌본다.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녹나무, 감탕나무 등 상록 활엽수가 무성한 숲. 나무들은 덕우도에서만 수 백 년을 살아온 고목들이다. 이 섬의 사람살이 역사보다 오래된 나무들. 당숲이 바람과 접신하며 몸을 부르르 떤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은 만물이 서로 소통한다. 쥐가 해일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제비가 태풍과 교신하고 피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문화에서는 태초의 인간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지금의 인간은 음성으로 소통 하지만 최초의 인간은 빛으로 만물과 소통 했다. 최초의 인간은 광음천에서 빛으로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은 스스로 빛이 나는 존재였다. 온몸이 광명을 발하고 입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빛으로 소통 했다. 바람과 구름처럼 자유롭게 날아 다녔다. 그때 사람들은 생각만으로도 배가 불러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땅의 곡식들을 먹기 시작 하면서 살이 찌고, 몸은 거칠어졌다. 탐욕이 생겨 곡식들을 저장하고 소유하게 되었고 몸은 빛을 잃었으며 더 이상 날아다닐 수 없었다. 땅에 붙들려 땅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됐다. 인간은 마침내 우주와 소통 할 능력을 상실했다. 불교 초기 경전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에 전하는 이야기다.

인간이 빛으로부터 왔다는 이야기는 세계의 생명들이 다 빛에서 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풀 한 포기마저도 그 근원은 태양이다. 정령의 '빛'을 상실한 인간들은 매개자의 도움을 받을 때만 우주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덕우도의 영매는 당산나무의 정령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초부터 나무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믿어졌다. 우주목, 신목들은 바람을 부리고 구름과 비를 불렀다.

이 섬사람들은 조상신과 당산나무들의 도움으로 살아 왔다. 나무의 부림을 받는 바람이 유독 덕우도 사람들의 뱃길만은 피해 갔다고 섬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풍선(돛단배)을 타고 다니던 시절, 평일도, 생일도 배들과 나란히 가도 덕우도 배는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한다. '우주'의 주재자인 조상신에 대한 신앙이 깊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은 섬의 신이 세계를 지배하는 큰 신들의 침입을 물리친 것은 순전히 섬사람들의 지극한 신앙심 덕이다. 신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신들의 힘이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깊이다.

"머 하러 왔답디야. 학생이랍디야"
"아뇨, 뭔 절을 찾아 댕기는지 절이 있는가 물어 봅디다."

마실 나온 동네 사람이 민박집 주인 여자에게 묻는다. 관광지도 아닌 작은 섬에 젊은 사내 혼자 오는 것이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낚시꾼도 아니고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이 외딴 섬까지 온 것일까 의아했을 것이다.

어째서 나는 섬으로만 떠도는 것일까. 외로움을 찾아다니는 것일까. 밤새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바람의 매질에 대숲이 운다. 길 떠나 한데 잠을 자는 날들이 많다. 추운 잠이 마음은 편하다. 어머니는 한 겨울에도 따뜻한 잠을 자지 않는다. 보일러는 동파의 위험이 있거나 길 떠났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잠시 틀 뿐이다. 죄 많은 아들은 때때로 추운 잠을 자는 것으로 속죄한다. 민박집 주인은 전기 판넬의 불을 켜는 법을 일러 주고 갔으나 아들은 끝내 난방을 켤 수가 없다. 어머니는 한 밤 중 화장실에 갈 때도 불을 켜지 않는다. 가난하여 단지 돈을 아끼려는 뜻만이 아니다. 낭비는 털끝만큼도 하지 않는 검약의 삶을 평생 몸으로 실천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참된 자발적 가난의 자세를 배웠다. 나의 잠을 방해 하는 것은 추위가 아니라 생각이다.

삶과 죽음은 늘 등 기대고 서 있다

아침이 와도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오늘도 배는 뜰까. 섬의 동쪽에 대부분의 집들이 터를 잡았다. 볕이 잘 드는 방향이다. 서쪽은 당산과 몇 채의 집뿐이다. 섬의 허리를 가로지른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섬의 남쪽 바다에는 황제도, 장도, 원도 등의 섬이 열을 지어 덕우도를 감싸준다. 큰 바람으로부터도 덕우도가 무사한 까닭이다. 섬의 동쪽 뒷산을 5분 남짓 오르니 포장도로가 끝난다. 도로의 끝은 쓰레기 매립장이다. 산길을 2~3분 더 오르니 공동묘지다. 섬 주민 전체의 선산이다. 섬이 작아 집안마다 선산을 따로 가질 수 없었겠지. 섬의 동쪽 앞뒷면에 양택과 음택이 등 맞대고 앉았다. 삶과 죽음은 늘 이렇게 등 기대고 있다. 350여 년 동안 이 섬에서 살다간 사람이 수천, 수만은 될 텐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 묻혔을까. 그 전 시대 사람들의 흔적은 또 어디로 간 것일까. 무덤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 섬에서 매장의 풍습이 시작 된 것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닐지도 모른다.
▲ 땅의 밭은 멸치 건조장이 되었다. ⓒ강제윤

섬의 허리께에 폐교 건물이 있다. 금일초등학교 덕우 분교장은 2006년 9월 1일자로 문을 닫았다. 옛 학교 마당에는 어구들만 가득하다. 해안선 둘레 5.6킬로미터, 면적 1.2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작은 섬에 한때 5백여 명이 살았던 적도 있다. 그때는 학생 수만 100명이 넘었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완도나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부모들은 육지와 섬 사이를 오가며 '반살이'를 한다. 반반씩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까지 학교 때문에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은 가혹하다. 도시의 아이들은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고 섬의 아이들은 뭍으로 조기 유학을 떠난다. 어린아이들을 유민으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국가일까, 부모들일까, 욕망일까.

섬사람의 숫자는 줄었어도 소득은 높다. 젊은 사람들도 여전히 외딴 섬에 사는 이유다. 완도 여느 섬처럼 이곳 또한 전복 양식이 주업이다. 완도에서 처음으로 전복 양식을 시작된 곳이 덕우도다. 문어 통발과 낭장망(고정식 그물) 멸치잡이 등도 소득원이다. 많은 섬들이 그렇듯이 덕우도의 농토는 더 이상 경작 되지 않는다. 밭들은 온통 검은 비닐로 덮여 있다. 미역이나 멸치 등을 말리는 건조장이 된 것이다. 바다 일의 노동 강도는 때로 초인적이지만 섬 주민들의 수입은 상당하다.

하지만 소득이 늘어도 일의 양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소득의 증가와 비례해 일의 양이 늘어만 간다. 재산의 증가에도 삶은 여유로워지지 못한다. 더 큰 텔레비전과 신형 세탁기, 대형 김치 냉장고와 고급 가전제품들만 고단한 삶의 보상이다. 어민들은 돈을 벌어 재벌 기업의 성장에 기여한다. 아이들을 뭍으로 내보내 아파트를 사주고, 학원에 보낸다. 그렇게 건설업자들의 배를 불리고 사교육 시장을 먹여 살리는 데 일조한다. 더러 증권 투자로 망한 자식들의 빚을 갚아주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 주는 데 보탬을 준다. 물질의 풍요와 삶의 여유는 크게 관계가 없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일만 하다가 늙어간다. 나이 들어서 남는 것은 골병뿐이다.

연정이

섬은 천천히 돌아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제 섬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배 시간 보다 일찍 민박집을 나선다. 선창가 상점 앞에서 여자 아이 하나가 빵을 뜯고 있다.
▲ 제가 살아 헤엄치던 바다를 바라보며 말라가는 물고기들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일까. ⓒ강제윤

"맛있니?"

"맛 있어요."

아이는 빵 맛에 취해 빵에서 입을 떼지 못하고 대답한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이일훈의 책을 읽는다.

"아저씨, 여기 있었구나."

"빵은 다 먹었니."

아이가 옆에 와 앉는다.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이 간다. '경험은 짧을수록 오해가 많다.' 섬에 대한 육지 사람들의 오해 또한 그렇다.

"아저씨, 책 나 줘."

아이가 책을 나꿔채려 든다.

"안 돼 네가 볼 책이 아니야."

"그래도 줘."

아이는 고집이 세다.

"아저씨 돼지."

"왜 내가 돼지니, 아저씨는 아침도 안 먹었는걸. 너는 아침밥 먹고 빵까지 또 먹었잖아. 그러니 네가 돼지지."

"그래도 아저씨가 돼지야."

"몇 살이니?"

"말 안 듣는 여섯 살."

"미운 여섯 살이구나."

"그래, 나 아저씨 말 안 들을거야. 어서 책 줘."

"안돼"

"이름이 뭐니?"

"연정이. 이연정"

"근데 아저씨, 정말 밥 안 먹었어."

"응"

"우리 집에 오지 그랬어."

"니 네 집을 몰랐잖아."

"바보, 저기 보이지. 파란 지붕. 거기가 우리 집이야. 다음에는 밥 굶지 말고 거기로 와. 알았지."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삼촌, 책 보지 마."

책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구나. 같이 놀자는 것이었구나. 눈치 없는 어른이었다. 어느새 호칭이 삼촌으로 바뀌고 말았다. 연정이랑 한참을 놀았다. 황제도에 갔던 배가 돌아 나온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연정이가 가방을 잡는다.

"삼촌, 가방 내가 들어줄께."

"안돼, 너보다 무거워."

"그래도 이리 줘."

연정이는 배낭을 어깨에 메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쓴다. 배낭은 꿈쩍도 않는다. 내가 다시 배낭을 붙들고 일어선다.

"안 돼, 삼촌 가지마."

"가야돼. 연정아, 삼촌 나중에 또 놀러 올게."

"안돼, 그래도 가지마."

"연정아, 배 떠나잖아."

"그럼 나도 데려가."

"엄마, 아빠는 어쩌고."

"그래도 데려가."

"연정아 삼촌 가야돼. 배 떠나려 하잖아."

연정이는 내 옷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온 힘껏 붙든다.

"에이, 배야 떠나 버려라."

배낭을 들쳐메고 연정이를 안아서 달랜다.

"삼촌 가지마."

연정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흐른다.

"잘 있어. 연정아, 또 올께."

잠깐 사이에 깊은 정이 들었다.

"삼촌, 그럼 한번만 더 안아 주고가."

연정이를 번쩍 들어서 안아준다.

"잘 있어. 건강하구."

연정이를 내려놓는다. 연정이는 다시 내 소매를 붙든다. 배가 떠날 태세다.

"연정아, 안녕."

나는 연정이를 뿌리치고 서둘러 배에 오른다. 배가 떠난 뒤에도 선창가에 앉아 손을 흔든다. 아이가 얼마나 외로웠던 것일까. 나도 그랬었지. 어린 날, 해변에 서서 지나가는 배만 보면 손을 흔들곤 했었지. 연정이는 그렇게 한참을 손 흔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정이는 배가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내 존재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말 것이다.

필자 소개

남해 보길도 돈방골에서 태어났다. 1988년 <문학과 비평>을 통해 시인의 길로 들어섰으며, 「문화일보」의 '평화인물 100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인권활동가로 살다가 고향인 보길도로 귀향해 8년 동안 '보길도 시인'으로 살았다. 보길도의 자연하천을 시멘트 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막아 내는 등 고향의 자연을 지키는 일에 힘썼으며 33일간의 단식으로 보길도의 문화유산 파괴를 막아 내기도 했다.

2005년 가을 홀연히 보길도를 떠나 청도 한옥학교 한옥 목수 과정을 졸업한 뒤 지금껏 거처 없는 유랑자로 살고 있다. 2006년 가을, 완도군 덕우도를 시작으로 섬 순례에 나섰으며, 10년 계획으로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 5백여 곳을 걸어서 순례할 예정이다.

자동차와 손전화를 갖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3무'의 삶을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 강제윤 티베트 로드에세이> 등이 있다.

필자 홈페이지: http://www.pogildo.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