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만한 세상] “천사 같던 803호 할아버지, 잘 계시나요?”

입력 2020-06-18 00:10
기사와 무관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베스트’ 게시판에 있는 윗집 이상한 할아버지 글을 보고 적어봐요. 저는 좋은 분을 만나서 참 감사했던 기억이 있어서요. 아직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이 많다는 것을 나누고 싶어요.”

그 글은 이렇듯 덤덤한 문체로 시작됐습니다. 자신을 “40대 후반 아줌마”라고 소개한 글쓴이는 11년 전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며 윗집에 살던 ‘803호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죠. 화려한 미사여구 하나 없이 소박했던 글은 사연이 가진 따스함만으로도 강력했습니다. 게시된 지 이틀 만에 4600개 이상의 ‘추천’을 받은 걸 보면요. 지난 15일 온라인 커뮤니티 ‘네이트판’에 올라온 글입니다.

 
11년 전의 어느 날, 글쓴이는 지금 살고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당시 떡 만드는 걸 좋아했던 그는 직접 ‘콩가루떡’과 ‘시루떡’을 쪄서 이웃들에게 이사 기념으로 선물했죠. 당연히 윗집 803호의 문도 두드렸는데, 한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떡을 건네자 “요새는 이런 집이 잘 없는데”라는 말과 함께 감사 인사가 돌아왔습니다.

다른 이웃에게까지 ‘떡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와보니 현관문 손잡이에 검은색 비닐봉지가 걸려있었습니다. 그 속에 들어있던 것은 작은 호박 2개와 호박잎, 그리고 정성 들여 쓴 듯한 쪽지 하나. 글쓴이는 ‘반가워요’라는 그 인사말을 보니 803호 할아버지가 두고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글쓴이는 며칠 뒤 부인과 산책 중이던 할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확인 결과 그의 추측대로 쪽지 작성자는 할아버지였죠. 서로 고마운 마음을 주고받는데, 휠체어에 탄 할머니의 모습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4년 전쯤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도 잘할 수 없었고, 홀로 거동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글쓴이는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지극 정성으로 매일 아침저녁 두 번씩 꼬박꼬박 산책하시고, 할머니 옷도 정성껏 색색으로 입혀서 챙겨주셨다”며 “저도 뵐 때마다 항상 반갑게 인사드리고 음식도 종종 가져다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이후에도 글쓴이와 할아버지는 온정을 나눴습니다. 글쓴이가 손수 한 음식을 건네면, 할아버지가 ‘김부각’ ‘깻잎’ ‘콩잎’ ‘귤’ ‘사과’ 등 온갖 것이 든 검은색 비닐봉지를 글쓴이의 집 문고리에 걸어두는 식이었죠.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려도 할아버지는 꼭 답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두 사람이 더욱 ‘가족’같은 사이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글쓴이가 어느 오후 홀로 집에 있는데, 위에서 ‘쿵’ 소리가 들린 겁니다. 불안한 마음에 문을 두드려봤는데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글쓴이는 곧장 119에 신고했고, 구급대원과 함께 문을 뜯어내고 들어간 집에서 쓰러진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할아버지.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했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덜덜 떨며 글쓴이의 손만 꼭 붙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부터 할아버지에게는 오전 5시30분마다 꼭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글쓴이 남편의 차를 몰래 세차해두는 겁니다. 어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글쓴이가 깜짝 놀라 말리고, 남편이 차를 주차장 구석에 숨겨놔도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찾아내 세차를 해뒀습니다. 글쓴이 남편이 “주말마다 세차하는 게 제 취미인데 할아버지가 해두시면 제가 심심하다”고 떼를 쓴 뒤에야 할아버지의 세차는 멈췄습니다. 대신 글쓴이 집의 문고리에 더 자주 검은색 비닐봉지가 걸리게 됐죠. 글쓴이는 이에 질세라 더 열심히 반찬을 만들어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3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로 남은 할아버지는 자녀들과 함께 살게 됐고요. 글쓴이가 예상치 못한 이별에 아쉬워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옥가락지’와 ‘은가락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내가 아들만 둘인데, 막내딸 생긴 기분이어서 좋았어. 집 정리 하느라고 붙박이장을 치우는데, 서랍 틈에 딱 이거 2개가 남았더라고. 할망구가 막내딸 생겨서 주라고 남겨둔 것 같아서 들고 내려왔어.”

못 받는다, 받아라, 절대 안 된다…. 치열한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이러다 나 기운 빠져서 쓰러지면 책임질 거냐”는 할아버지의 협박에 글쓴이가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별. 하루, 이틀이 흘러 803호 할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고, 윗집 부부의 아기는 어느덧 다섯 살 배기가 됐습니다.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글쓴이는 아직 할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이렇게요.

“가끔씩 엘레베이터에서 이웃들과 인사할 때 할아버지가 떠올라요. 엘레베이터만 타면 누군지 몰라도 고개 숙여 인사하시고, 별일 없냐고 물어봐 주시던 할아버지 덕분에 저희 동은 아직도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꼭 인사를 나누거든요. 803호 할아버지, 잘 계시지요? 덕분에 많이 행복했어요.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