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논술시험의 위선

▣ 김창석 한겨레 교육서비스본부kimcs@hani.co.kr

“대학의 예산을 집행하는 책임자라면 도서관 책을 사는 데 예산을 더 많이 쓸 것인가, 아니면 스포츠 동아리에 쓸 예산을 더 많이 쓸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구체적인 근거와 함께 800자 안팎으로 써라.”

“다음의 각 제시문에 들어 있는 ‘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생각을 ‘욕망’과 연관시켜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라.”


△(일러스트레이션 / 조승연)

두 가지 글쓰기 문제가 있다. 앞의 것은 미국 고등학생들이 흔히 쓰는 에세이 주제 가운데 하나다. 뒤의 것은 2006년 우리나라의 한 대학이 입학시험에서 낸 논술시험 논제다. 수준 차이가 이만저만 나는 게 아니다. 문제만을 놓고 보면 한국 고등학생들은 고도로 추상화한 논의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지적으로 훈련된 학생들인 데 반해 미국 고등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내가 보기에 현행 대입 논술시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대학의 출제 교수도 알고, 시험 보는 학생도 알고, 학교에서 논술을 가르친 고등학교 교사들도 알고, 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친 학원 강사들도 다 알고 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 문제들이 고등학교 3학년생의 지적 성장 단계를 완전히 무시한 부적절한 시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일기도 제대로 써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철학과 대학원생들도 쩔쩔맬 문제를 내는 식이다. 어린 학생들에 대한 대학들의 ‘지적 횡포’라는 얘기가 출제 교수와 채점 교수들한테서 나오는 이유다.

글쓰기는 문화다. 글을 존중할 줄 아는 문화가 있어야 글쓰기 문화도 융성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글보다는 말에, 말보다는 영상에 기대는 사회인 듯싶다. 전세계 어느 인터넷에서도 한국만큼 동영상 콘텐츠가 많은 나라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글보다는 말을 좋아하고, 공적 담화보다는 사적 담화를 즐긴다. 한국은 여전히 ‘구어체 사회’다. 글쓰기가 융성하려면 우선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문자생활이 사회의 주류적인 의사소통 방식이며 정보저장 방식이고 신뢰받는 표현방식이어야 한다.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책과 글이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퇴임 뒤에 대부분 자서전을 쓴다. 자서전 내용을 뜯어보면 별로 볼 것도 없다.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 부분에 눈길이 가기는 한데 그것도 대충 얼버무렸다. 나머지는 대부분 시간의 흐름을 좇아간 대통령의 공식 일정이다. 부드러운 다큐멘터리 정도라고 할까. 그런데 그런 책이 발행되기도 전에 책을 사겠다는 이들이 수십만 명씩 되는 사회가 미국이다. 기록이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록하는 것을 사회적 책무로 받아들이는 풍토가 필요하다. 빌 클린턴은 대선운동 기간 당시 대학 시절 ROTC 교관에게 병역 문제에 대한 편지를 보냈던 기록이 들춰져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퇴임 뒤에 책을 쓰는 대신 배드민턴 라켓을 들거나, 훈수를 두거나, 골프를 치러 다닌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고 난 뒤 무엇보다 먼저 자서전을 썼으면 좋겠다. 또 몇 년 동안 한 문제를 가지고 글로 토론하는 지식인들을 봤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돼야 어린 학생들에게 높은 수준의 글쓰기를 강요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