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못한 뭉크미술관 | 글주머니 2006/09/0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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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_Munch_-_Madonna_(1894-1895).jpg(534.90Kb)


뭉크박물관에서 도난당한 <절규>와 <마돈나>나 2년에 걸친 추적과 수사 끝에 마침내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이 지난주 전해졌다. 돌아온 뭉크의 걸작들 앞에서 한편 반갑고, 한편 아쉽다.


지난해 6월, 노르웨이 오슬로를 취재차 여행하게 되었다. 6월 초순의 오슬로는 하지를 열흘 가량 앞둔 때라, 새벽 2시가 넘어도 하늘이 훤한, 말로만 듣던 백야의 도시였다.
일 또는 여행을 핑계로 널리 이름난 곳 이곳저곳을 둘러볼 기회가 살다보니 찾아왔지만, 같은 나라를 여러 번 가게 되고 북유럽을 여행할 기회란 좀처럼 없었다. 백야와 오로라, 빙하를 만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북유럽을 향해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여정은 핀란드 헬싱키와 스웨덴 스톡홀름을 거쳐서 노르웨이 오슬로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도시마다 이삼일밖에 안되는 바쁜 일정이지만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21세기 이후 사회복지국가의 본보기로 숱하게 언급된 사회민주주의국가의 모델이기도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느 나라보다 정책적 뒷받침이 된다는 소리를 들어서이기도 하다.
자연환경이 빼어난 선진 복지국가라는 것보다 신동엽 시인이 일찍이 아래와 같이 읊은 까닭이 그 곳을 그리워하게 했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 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신동엽, 산문시)


1986년 당시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는 어느 날 스톡홀름 시내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귀가하다가 괴한의 총에 맞아 죽는다. 토요일이라 경호원들과 수행원을 모두 돌려보낸 뒤의 일이었다. 스웨덴 국가원수는 평소 경호원없이 돌아다니길 즐겨했다고 한다. 팔메 총리의 복지제도와 사회민주주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극우파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신동엽의 시가 비단 ‘시적 표현’이 아니었음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2005년 6월11일, 노르웨이가 100년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해 바닷가에 면한 오슬로시청 앞에서 기념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스웨덴 국왕 부부가 노르웨이 국왕 부부를
방문해 축하하는 행사였다. 때마침 시내에 있는 왕궁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두 나라 국왕 부부가 탄 차량이 이동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렇다 할 교통통제 없이 경호용 오토바이 몇 대가 두 나라 국왕이 탄 2대의 승용차를 앞뒤로 호위할 따름이었다. 승용차 안에 있는 왕과 왕비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 오슬로 시내에서는 엠네스티 자선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틀전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축구경기에서 노르웨이가 54년 만에 스웨덴을 꺾은 것도 노르웨이 독립을 축하하는 화려한 축포인 셈이었다.

오슬로에 사나흘 머무는 동안 ‘노르웨이 독립100돌’이라는 예기치 않은 행사를 구경하게 되었지만, 정작 여행을 계획할 때 꿈꾼 것은 이루지 못했다. 오슬로 뭉크박물관에 가보지 못한 것이다. 2005년 6월 당시 뭉크박물관은 ‘무기 휴관’중이었다. 2004년일어난 도난사건으로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뭉크박물관은 휴관중이었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작품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절규(Scream)>다. 이 작품은 <스크림>이나 <나홀로 집에>에서와 같이 영화 포스터가 차용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그림이 보여주는 깊이를 모를 우울과 공포는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뭉크 자신은 작품 <절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두 친구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 줌의 우울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고 너무나 피곤해서 난간에 기대었다. 흑청색의 피요르드와 도시 너머에는 불로 된 피와 혀가 걸려 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었으나 나는 불안에 떨며 멈춰 섰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 울리는 커다랗고 끝이 없는 비명을 느꼈다.”


뭉크의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절규>라는 유명한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그냥 유명한 작품이었나 보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뭉크의 그림을 뭉크박물관에 가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는 드라마 속 ‘미술선생님’ 때문이었다. 90년대초 김운경 작가가 이름을 날린 <서울의 달>에서 미술선생으로 연기한 백윤식이 자신을 좋아하는 윤미라에게 카페의 이름을 ‘뭉크’라고 짓도록 한 것이다. 야비한 건달 한석규와 쓸데없이 콧대만 높은 허영의 채시라도 이름을 얻었지만 인기 주말드라마를 통해서 ‘뭉크’도 한국사회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뭉크박물관을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한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서 뭉크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내 나이 열 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 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장정일,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 1992)

장정일의 성장소설에서는 뭉크화집이 턴테이블, 타자기와 함께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상징으로 묘사되었다. 스무살을 앞둔 젊음이 불안과 슬픔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뭉크의 그림을 보았다면, 그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오슬로행에서 아쉽게도 뭉크박물관을 가볼 수 없었다. 뭉크를 사랑한 사람들 중에는 미술선생님과 열아홉살 재수생뿐 아니라, 미술품강도들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