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목면 화폭에 유채,236×1 72㎝)는 1970년 6월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 이다. 침체된 한국미술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한 신문사가 마 련한 공모전에 젊은 작가들과 옛 제자들의 틈에 끼어서 출품한 작 품이다. 고국을 떠난 지 7년,쉰여덟의 나이에 아무런 구애됨이 없 이 보내 온 이 한 점의 작품 앞에서 모두 경탄했다.
예전의 문학 성 짙은 산 달 구름 새 항아리 등의 형상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그 냥 점들의 얼룩일 뿐인 완벽한 추상으로 변모될 줄 아무도 몰랐다 . 미련없이 일체를 벗어버린 그 허심탄회한 마음의 경지에 경의를 보내면서,70년대를 풍미할 한국회화의 또다른 '가능성의 바다'를 본 것이다.
200호나 되는 큰 화폭의 뒷면에 적은 김광섭(金珖燮)의 시 '저녁 에',그리고 그 마지막 구절을 따서 제명으로 삼은 이 작품의 시적 인 함축과 여운. 오랜만에 영혼의 풍요로운 숨결이 흘러 나오는 명작을 만난 것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 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무한과 영원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순한 생명의 고동소리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고나 할까. 화폭은 종전에 보아오던 것과 달리 순 목면의 흰 바탕을 그대로 온전히 살렸다.
송진유(松津油)에 청색 유채를 묽게 풀어서 병에 담아두고 그것을 붓끝에 묻혀 점을 찍고 네모로 둘러싸고 또 그렇게 되풀이해 나갔다. 마치 화선지 위에 올려지는 수묵화의 선염처럼. 한 점의 물감은 목면의 바탕으로 스 며들거나 번져서 그 얼룩의 표정이 제 각각 하나도 같은 것이 없 다. 예상할 수도 없는 얼룩의 점이 한없이 나열되고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그야말로 무심(無心)한 자연 의 성품에 모든 걸 맡기며 그저 점을 찍어 나갈 따름이다. 이러한 무심한 행위의 결과,화면은 일체의 작위성을 벗고 무위성( 無爲性)을 얻어 더 없는 자연스러움을 지니게 되었다.
이 담백하 고 편안한 푸름의 바다. 영롱한 별,푸른 점들의 화음. 화면 전체 를 채우고 있는 푸른 단색조의 점화(點畵)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 도 되는 자유로운 평면이 되어 그림의 시원에 가 닿는다. 하염없이 점을 찍어 가면서,때로는 고국에 있는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과 떠오르는 산천들,밤하늘의 별들을 생각하며 한 점 한 점의 필획을 찍었다. 그러다가 "일하다 내가 종신수임을 깨닫곤 한다" 고 술회했다.
그리하여 "미술은 미학도 철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본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라고 일기에 적었 다.
지난해 연말,'김환기 30주기 추모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부암동 의 환기미술관을 모처럼 찾았다. 35년 전에 받았던 감명을 되새기 면서 이 작품은 물론 뉴욕시절의 작품들을 두루 살펴보면서,그가 도달한 회화의 경지를 음미하는 가운데,가슴 속으로 밀려오는 감 동의 근원을 짚어 보았다.
이 작품이 지닌 내밀한 영혼의 울림은 우리 조상들이 아껴왔던 우 주생명의 이치인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많음 안에 하나 있어,하 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一中一切 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라는 '화엄(華嚴)'의 아름다운 지혜가 그대로 화폭으로 이어져 숨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보다 우리 전통미술의 멋에 매료 되었고,백자항아리에 심취하여 방과 마루가 비좁도록 수집해서 마 당에까지 내다 두고 보았던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 른다.
온갖 흐르는 것은 흐르고 흘러서 마침내 바다에 이르고,바다가 되 어서는 '한 가지 맛'을 지닌 무차별의 광대무변한 성품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비유하여 '바다'는 만물과 진리의 고 향이라고 했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