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를 만났다.
여름 해변에서의 며칠, 방을 빌려 산 시절의 이야기다.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앵무새가 날아 들어왔다. 책상 앞에서 졸고 있던 나는 앵무새가 다시 밖으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창문을 닫았다. 앉을 공간을 찾느라 한동안 부산을 떨던 앵무새가 자리를 잡은 곳은 욕실 커튼을 매달아놓은 봉이었다.

나는 내 방을 방문한 앵무새에게 다짜고짜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앵무새는 요구를 따르는 대신 슬픈 표정만 지어 보였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걸 끊임없이 자신에게 요구한다는 눈빛으로 어디서 그 말을 배운 건지 ‘싫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다음 날, 청소를 하던 주인 아주머니가 복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앵무새가 주인집 거실에서 기르던 새라는 사실을 알았다.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이 망할 놈의 앵무새.
뜨끔했지만 자수하지 않았다. 대신 마당에 나가 앵무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안주인은 앵무새를 기른 지 6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코가 자주 막히는 동물이어서 코를 뚫어주려고 잠시 새장 밖으로 꺼낸 것인데 날지 못할 거라 생각한 앵무새가 그만 집을 떠난 것이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앵무새는 욕실 커튼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인사라도 하듯 연신 고개를 숙였다, 폈다를 반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앵무새가 새장을 빠져나오려고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수도 없이 시도했던 행동들이 굳어져버린, 아무 의미 없는 습관이었다.
나는 앵무새와 목욕을 할 참이었다. 하지만 목욕을 하기로 맘 먹은 것이 만 이틀 만에 앵무새와 헤어진 이유가 되었다. 같이 목욕을 하자고 물을 끼얹은 것뿐인데 나는 앵무새의 반사적인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얼굴이 급소라는 판단을 했는지 눈두덩이를 공격해왔다. 나는 공격을 피하는 대신 바닷가로 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그를 날려보낸 뒤 소리 나게 창문을 닫았다. 나는 단지 내가 아닌 내 외로움이 앵무새와 목욕을 하자는 것뿐이었다.
앵무새와 헤어지고 난 후에야 나는 그의 온몸이 초록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아도 되었다. 앵무새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앵무새의 발에 주인은 쇠사슬을 채워놓았다. 딱한 노릇이었다.
내가 잘해줄 수도 있었어. 네가 내 옆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 있었다면 난 너를 위해 좁쌀이나 해바라기 씨앗을 구해왔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앵무새에게 멀리로 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말하는 법을 배울 것을 종용했다. 내가 뭘 모르는 것 같아 앵무새에게, 세상에 미안했다. 사실 난 많은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 모르고 산 것은, 모른 채로 남에게 종용되어진다. 세상이 이렇게밖에 매끈하지 못한 것도 다 모르면서 그 방식을 고집하는 억지 때문인지 모른다. 왜 앵무새는 말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앵무새와 헤어졌다. 슬퍼할 줄만 알던. 무성영화 속에 머무르고자 했던. 날아갔으나 멀리 날지 못했던.
우리의 삶은 가끔 새장 안에 갇힌 새에 비유되곤 한다. 갇힌 채로 물과 곡식 낱알을 번갈아 쪼아가며 갈증과 허기를 채우는 새와 우리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비교는, 우리에게 그만큼 세상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간절함은 내장을 파고드는 간절함인가.
나는 봄이 오면 초록을 앓는다. 초록을 보러 재래시장을 어슬렁거리며, 새벽 기찻길에 나서기도 하며, 그 어떤 간절함으로 방랑을 떠올린다. 특히 이 무렵의 방랑은 앵무새처럼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 없이 참담하고 슬픈 것이다. 눈부신 초록으로의 방랑, 내 안에 회로처럼 엉켜 있는 밀림으로의 방랑. 그 간절함마저 없다면 나는 살고 있지 않은 게 된다.

앵무새와 헤어진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여행길에서 어깨 위에 초록 앵무새를 올려놓고 엽서를 파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의하면 앵무새와 함께 산 지 6년이 지났는데 앵무새가 자신처럼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했다. 늙으면 늙을수록 자신도 앵무새에게 기대고 앵무새도 자신에게 기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밀착이라고 이해했다. 밀착하지 않으면 허전하며, 밀착하지 않으면 어깨 밑 낭떠러지로 떨어져 절명하고 마는 두 생명의 관계 앞에서 초록과 이별해야 하는 황혼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되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이 우화 같은 이야기는 더 그렇다.
한 사람은 친구에게 장담한다. 너는 곧 새를 키우게 될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콧방귀를 뀐다. 그러자 제안한 사람은 친구에게 값비싼 새장을 선물한다. 친구의 집에 방문한 사람들은 덩그렇게 걸어놓은 빈 새장을 보고 이구동성 기르던 새가 죽었냐고 물어왔다. 새를 키운 적이 없었던 친구는 사람들이 물어올 때마다 그 사정을 설명하는 일이 힘에 부치자 끝내 새를 사게 된다. 결국 그 사람의 장담대로 새를 키우게 된 것이다.
마음 속에 빈 새장을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안에 뭔가를 담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사시사철 푸르른 초록을 가진 다음 가끔 그것을 꺼내 기운을 얻고 싶다면 우리도 초록을 채울 빈 액자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 빈 액자를 가진 사람만이 숲을 만들 수 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숲을 꺼내줄 수도 있다.
내가 초록 이야기를 하려 하면서 새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초록을 떠올리면 언제나 새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새라는 말과 동시에 두 눈 가득 푸른 대지를 한껏 넣고 날아다니는 새의 입장이 되어보기 때문이다. 초록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묻히지 않는, 묻을 수 없는 인연의 다른 이름이다. 초록은 신열을 앓고 난 뒤 기운이 되는 색이다. 상속된 색이다.
어디건 가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의 색깔이다. 눈부시며, 매끈한 광택이 흐르며, 결연한 한 방향을 가진다.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색. 그 초록 위를 날아오르는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또 경이로울 것인가. 그렇게 날아오르는 당신에게 초록은 조용히 말을 걸어올 것이다. 나는 편이 훨씬 낫지 않느냐며,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은 단지 이 순간만을 위한 준비였다고, 날카로운 이빨에 물린 당신과 당신의 어리석은 행동들까지도 괜찮다, 괜찮다며 초록은 당신을 힘껏 껴안아줄 것이다.


이병률충북 제천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여행사진 산문집 『끌림』을 펴냈다. 어딘가로 떠나 있거나 아니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 상태로 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