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이 희망이다 2006-02-14 19:10
카테고리 : 논술 에세이 http://blog.paran.com/djsdjshstnf/8246384
논술이 희망이다
평준화 교육의 결과는 '표준화된 과외'
교과서 이치에 주목하는 서울대 논술, 더디 깨달아야 한다


수년전 세계 최고라는 하버드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한 한국 청년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저에게 미국법은 너무 익숙지 않았습니다. 미국친구들은 당연하게 여기고 넘어가는 것도 저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죠. 그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곰곰이 따져나가다 보니 법의 숨겨진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좋은 머리나 피나는 노력에 대한 언급은 없는 매우 겸손한 멘트였다.(역시 수석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익숙지 않은 남의 나라 법을 공부하느라고 숨겨진 뜻까지 꿰뚫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에는 중요한 보물이 묻혀있다.

무엇이든지 쉽게 이해하는 학생이 있다. 이런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좋다고 칭찬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수능과 내신에서 이런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머리 좋은 학생들에게 2008년도 서울대 정시논술은 만만치 않은 시험이 될 것 같다.

서울대는 2008년부터 논술의 비중을 60%까지 크게 늘리고 교과서 중심으로 출제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이제까지 논술은 고전이나 신문을 읽어야 한다는 억측이 가능할 만큼 제시문과 주어지는 주제가 광범위 했으나 2008년도 예제는 대부분 교과서에서 지문을 선택했고 문제도 교과단원을 넘어서지 않았다.

‘논술이 사실상 본고사 부활이고 사교육시장을 확장해 서민의 자녀들의 기회를 박탈할 것이라’는 평준화 진영의 반발을 의식한 서울대의 대답은 바로 ‘교과서’였던 것이다. ‘논술은 교과서에서 내겠다. 학원 안 가도 된다. 학교 선생님들이 교과서를 제대로 가르치고 학생들이 교과서를 깊이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교과과정을 넘어선 난해한 논술이 무조건 좋은 사교육을 받은 부잣집 자녀에게 유리하다는 측의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제가 어려울수록 유전자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서민의 자제에게도 서광이 비춘다고 보는게 과학적이다.

그렇지만, 정말 교과서를 이해하면 논술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맞다. 그러나 교과서의 이치를 꿰뚫어야 한다. 이 당연한 말이 ‘쉬운 교육이 곧 민주교육’이라는 근거 희박한 교육철학이 지배하는 현실의 고등학교 현장에서는 전혀 당연한 말이 아니다. ‘내신이 강조되면 지방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유리해진다. 그래서 민주적이다.’ 이 논리가 학교현장에 오면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시험범위와 함께 예상문제를 찍어주는 코미디로 전개된다. 문제를 어렵게 내서 학생들의 내신을 까먹은 선생은 학생들의 앞길을 막는 역적이 되기 때문이다.

수능이 쉬워지고 TV과외에서 출제되면 사교육이 없어진다고? 매번 변별력 시비를 겪을 만큼 쉬워진 지난 7-8년간의 수능과 같은 기간 사교육시장의 추세를 비교해서 입증해 보라. 제발 그 논리를 믿게 해 달라. ‘메가스터디’같은 맥도날드 형 학원이 코스닥의 우량주가 되어 과외공부도 표준화 네트워크화 국제화(?)까지 넘보게 된 것도 다 쉬워진 수능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이여 제발 한번이라도, 자신들의 의도가 아닌 자신들의 열매를 보라. ‘메가스터디’가 바로 당신들의 열매다. 당신들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맥도날드 과외공부’가 학교를 삼키고 있단 말이다.)

예측 가능한 학교시험. 쉬운 수능. 이런 공부를 위해서라면 굳이 이치까지 깨달을 필요가 없다. 공식을 이해하는 정도의 이해력과 여러 공식을 암기할 정도의 암기력 다양한 형태로 조금씩 비튼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응용력과 반복된 훈련을 수행할 성실함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출제되는 서울대의 논술문제. 좋은 답안을 위해서는 교과서를 뒤집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서울대는 이미 2003년도 논술에서 문화상대주의를 비판하라는 문제를 출제했었다. 교과서에서는 ‘문화상대주의가 문명이고 문화보편주의 혹은 일방주의는 야만’이라는 공식을 가르치고 있는데 말이다.

교과서를 성실히 이해한 학생은 그 논술에서 당연히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럼, 왜 중국과 일본 동남아는 한국의 TV드라마에 열광하지?’ 라며, 교과서의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둔한 학생이라야 눈에 띄는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교과서의 단원들은 나름대로 고전의 맥락에 맞닿는 주제들이다. 그 단원 하나하나가 고등학생들에게까지 가르쳐져야 한다는 공감을 얻기까지 수 십년 혹은 수 백년에 걸친 논쟁이 그 주제를 휘감았다. 인류가 자랑하는 수많은 천재들의 인생이 그 단원 하나하나에 녹아 있다.

그 천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어 평생을 바쳐 씨름한 주제. 고등어 대가리와 꽁지를 잘라 먹기 좋은 몸통만 밥상에 올려 놓은 것이 바로 교과서인 것이다. 이 자반을 덥석덥석 잘 받아먹으면 천재라고 쓰다듬어 준 것이 우리 교육이었다. 민주적이건 8학군이건 고등어 몸통만 먹는 교육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갈릴레오가 중력가속도는 똑같다고 피사의 탑에서 실험을 보여주었을 때도 사람들은 눈앞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무거운 것은 빨리, 가벼운 것은 느리게 떨어진다는 관념이 2000년 동안 사람들의 상식을 지배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도 이 관념이 더 맞았다.

‘중력가속도는 같다.’는 어색하고도 부자연스런 이론을 우리 학생들은 덥석덥석 잘도 이해한다. 그 뿐인가 바로 다음시간에는 또 다른 놀라운 이론을 쉽게 이해해 버린다. 천재가 분명하다. 노벨상 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천재들이 매년 100만 명씩 배출되는 나라다.

2008년도 서울대 논술 예제는 교과서와 교과서의 이치에 주목하고 있다. 이 대목이 마음에 든다. 교과서의 주제와 단원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치는 단원과 과목을 꿰뚫고 몇 개의 뿌리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서울대 예제에 나온 ‘시장이냐 정부개입이냐’ 하는 문제의 이치는 사회의 단위와 주체를 개인으로 볼 것이냐 집단으로 볼 것이냐 하는 오래된 맥락에 닿아있고 이 이치는 다시, 자연법 사상을 둘러싼 논쟁의 뿌리이기도 하다. 자연법 사상은 ‘법과 정치’ 과목의 중요한 산맥이다. 이렇게 교과목의 단원들을 흔들고 털어 맥락의 뿌리만을 걸러 낸다면 그 수가 십 여개를 넘지 않을 것이다. 원래 학문이라는 게 개별 현상들의 배후를 찾아내어 이를 보다 보편적인 법칙에 꿰어 맞추고자 하는 노력이고 보면 이는 당연하다 못해 너무 평범한 주장이다.

더욱이 대학이 강조하듯이 좋은 논술 답안이 미려한 문장의 ‘세련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참신한 접근과 독창적 표현이라는 ‘기본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과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해 궁극의 이치를 깨닫는 스타일의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이다.

교과서를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둔해서 성찰을 통해서만 더디게 이치를 꿰뚫는 학생이 뭐든 쉽게 이해하는 ‘머리 좋은’학생들 보다 유리한 서울대학의 논술이 사교육 시장의 확장을 줄일 수는 없더라도 분명한 것은 ‘메가스터디’와 같이 표준화된 교육방식의 대량생산이라는 코미디는 더 이상 양산하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는 확신이 간다. 단, 누군가 더디 깨우치는 깊은 성찰마저도 표준적으로 대량 보급하는 방식을 개발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오태민 (명지외고 통합논술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