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봉이

 

한혜영

 

오늘은 연극 배역이 결정되는 날입니다. 이번 돌아오는 어린이 날 학예회 때 할 연극이지요. 학부모들까지 참석한다는 말에 아이들은 은근히 자기에게  좋은 배역이 돌아와 주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자 마침내 선생님은 명단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일제히 아이들이 떠들기 시작해서 교실 안은 갑자기 시끄러워졌습니다.
"자! 자! 조용히 해요! 이제부터 이번 학예회 때 연극할 사람의 배역을 결정하겠다. 혹 자기가 뽑히지 않았다고 불만을 사거나 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배역이라고 해서 불만을 갖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생님도 많이 생각하고 결정한 것이니까 될 수 있으면 선생님의 의견을 따라주면 고맙겠다. 알았나?"
"네!"
아이들은 힘차게 대답하고 쥐죽은듯 조용했습니다. 아마 속으로는 제각각 주인공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연극 속이 주인공은 남몰래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주인공, 맘씨 좋은 아저씨 역에 강만봉!"
교실 안은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만봉이는 반에서 못됐기로 소문 난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못됐는지 여자아이들 사이엔 악명이 높을 뿐 아니라 싸움대장이라서 아무도 그 아이를 당해낼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맘씨 좋은 아저씨 역에 강만봉? 이건 말도 안돼."
모두는 수군거리기만 할뿐, 아무도 선생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불만을 내보인다면 만봉이가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요. 거기다 만봉이는 키도 체격도 얼마나 큰지 모른답니다.
선생님은 배역을 맡을 사람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생선 파는 할머니 역에 김은정! 리어카꾼 역에 김준호! 수위 역에 최철민! 거지아이 역에 배정수!"
리어카꾼 역을 맡은 김준호는 아무래도 주인공을 점찍었던 모양인지 시큰둥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수는 거지 역할인데도 자기에게 배역이 하나 돌아왔다는 사실에 싱글벙글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벌써부터 거지야! 거지야! 하며 정수를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제일 신이 나는 건 만봉이었습니다.
"배역을 맡은 사람은 각자 집에서 연습해 오도록 알았나?"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만봉이가 나와서 우쭐댔습니다.
"야! 너희들 그날은 엄마 아빠 모두 모시고 와야한다? 관객이 많아야 신이 날 거 아냐. 그리고 생선 파는 할머니 김은정! 그리고 리어카꾼 너! 또 수위! 거지 배정수 어디 갔어? 모두 충분히 연습하고 올 것!"
만봉이는 마치 제가 선생님이나 되는 것처럼 큰소리를 쳤습니다. 아이들은 귓속말을 몰래 주고받았습니다.
"치, 저나 잘하지. 아니 저 애가 어떻게 맘씨 좋은 아저씨야. 이번 연극은 볼 것도 없이 실패라구. 저 우쭐대는 꼴 좀 봐."
"그러게 말이야. 얼마 전에 쟤네 엄마가 선생님을 찾아왔었다지 뭐니. 틀림없이 쟤네 엄마가 특별히 부탁을 했을 거야."
이렇게 엉뚱한 이야기까지 오고 갔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결정된 배역에 대하여 이야기하느라 자리를 뜰 줄 몰랐습니다. 마음이 맞는 친구끼리 쑤군쑤군, 만봉이가 주인공으로 결정된 것에 대해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얏호! 내가 주인공이다!"
만봉이는 신이 나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만봉이 엄마도 기뻐하며 만봉이의 등을 토닥거렸습니다.
"엄마! 이게 바로 연극 대본이에요."
책가방에서 자랑스럽게 대본을 꺼냈지만, 만봉이는 소리도 내지 않고 속으로만 읽었습니다.
"얘는, 큰소리로 읽어야 연습이 되지."
아무래도 만봉이는 창피한 모양이었습니다. 후닥닥 제 방으로 달아나서는 '딸까닥' 문까지 걸어 잠그고도 조그마한 소리로 읽었습니다.
"어험, 할머니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이 많은 생선을 언제 다 파시겠어요."
왠지 어색한 것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자연스럽지 않고, 자꾸만 말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스스로 듣기에도 거북했습니다.
이번엔 다른 대사를 해보았습니다. 바로 거지아이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네 발이 꽁꽁 얼었구나. 그래 밥이라도 먹었니?"
몇 번이고 되풀이해보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만봉이는 극본을 휙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 놀았습니다.

다음날입니다. 선생님은 첫날이니까 대본을 보면서 해도 좋지만 빨리 대사를 외워서 다음부터는 대본을 보지 말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만봉이가 할 차례였습니다.
"할머니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이 많은 생선을 언제 다 파시겠어요."
"잠깐! 만봉이 너는 지금 불쌍한 할머니한테 동정 어린 말투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마치 넌 투정하는 것처럼 하고 있잖아. 다시 한번 해봐."
선생님은 만봉이에게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를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주인공 아저씨는 하루하루 노동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렇게 힘들여 번 돈으로 남을 돕는 아주 착한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봉이는 다시 한번 똑같은 대사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번에도 역시 만봉이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만봉아. 너는 주인공의 마음씨를 닮지 않으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
만봉이는 속으로 잔뜩 불만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할 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는 선생님이 자기에게만 꼭 뭐라고 하셨으니까요.

학예회 날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만봉이와 그 외 배역을 맡은 아이들은 매일 방과 후 남아서 연습을 했습니다. 만봉이도 열심히 했습니다. 모처럼 주인공이라는 행운을 잡았는데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만봉이에게 연극은 처음입니다. 이제까지 연극이라면 주인공은커녕 단역마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학부모들도 오신다니 이런 기회에 멋지게 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 그런데 왜 맘씨 좋은 아저씨는 힘들여 번 돈으로 남을 도와주는 거야?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날더러 그 마음씨를 닮으라는 거지?"
만봉이는 아무래도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동정심이 많은 아저씨라고 하니까 목소리에 힘을 있는 대로 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선생님은 야단을 쳤습니다.
"야! 네가 동정을 받는 사람이니? 그게 아니야. 너는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라야 된다구. 알았어? 다시 한번 해봐."
만봉이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왔습니다. 선생님한테 야단 맞을 때마다 웃던 얼굴들, 비웃는 듯한 은정이의 얼굴도 떠오르고 배정수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이 따위 연극 나 집어치울 거야!"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미 학예회 날짜는 임박했고 엄마는 동네 사람들한테 벌써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만봉이는 슬슬 걱정이 되었습니다.
"태정이 엄마도 오신다고 했는데, 아 정말 미치겠네."
태정이 엄마도 태정이 엄마지만, 만봉이는 태정이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그 생각만 하면 싸움대장 만봉이도 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돼. 그만 둘 수는 없어."
만봉이는 선생님이 말씀하는 것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할머니 이 따끈한 국밥 좀 드세요. 그렇게 허기가 져 가지고는 자칫하다 몸져눕고 말아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만봉이의 눈에는 할머니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허기가 져서 기운을 못 차리는 노파의 모습은 곧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 같기도 하고 또 혼자 살다 불쌍하게 돌아가신 뒷집 할머니 같기도 했습니다.
만봉이의 목소리는 어느 틈에 저절로 동정 어린 말투가 되었습니다. 말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슴도 메어질 듯 아파 왔습니다.
"네 발이 꽁꽁 얼었구나. 그래 밥이라도 먹었니?"
대사를 외우던 만봉이는 울컥 목이 메어왔습니다. 지난날 거지아이라고 업신여기며 심지어는 돌멩이까지 던졌던 일이 부끄러웠습니다.
"얘야, 여기에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죽겠다. 나하고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 아이고 이 꽁꽁 언 손 좀 봐."
만봉이는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길거리에서 얼어죽은 거지 아이의 얼굴이 보였고, 그 아이가 죽은 책임이 마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학예회 날입니다. 많은 학부모들이 모였습니다. 교실 뒷자리에는 여러 선생님들도 와 있었습니다.
만봉이는 온통 잘해야 할텐데 하는 생각 때문에 정작 태정이도 태정이 엄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만봉이 엄마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 미소는 많은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만봉이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연극은 곧 시작이 되었습니다.
생선 파는 할머니가 생선 광주리를 앞에 놓고 추워서 오돌오돌 떱니다. 이때 맘씨 좋은 아저씨가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멈춰 서서 말을 겁니다.
"할머니 날씨도 차가운데 이 많은 생선을 언제 다 파시겠어요."
"이걸 팔지 않으면 아이들이 밥을 굶는다우. 점심도 못 먹었더니 도무지 기운을 못차리겠구랴."
"아이들이라니요. 할머니 손자들 말씀이세요?"
"그렇다우. 아직도 어린것들이 둘이나 있어요. 지지리 복도 없는 것들이지. 작은 것이 돌도 되기 전에 어미아비가 교통사고로 한날 한시에 죽었다우."
"할머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내 가서 따끈한 국밥 한 그릇 말아 달래서 가져올게요."
만봉이는 진짜처럼 연극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물까지 글썽글썽해 가지고 정말로 할머니가 불쌍해서 못 견디는 맘씨 좋은 아저씨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교실 안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잔잔한 술렁거림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가라앉질 않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저 아이가 도대체 누구지요? 누군데 저렇게 진짜처럼 잘할 수 있어요? 정말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렇게 맘씨 좋은 아저씨는 처음 보겠어요."
연극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단원들이 모두 나와 함께 인사를 할 때 학부모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만봉은 이날 이후, 전혀 다른 아이가 되었습니다. 공연히 반 아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물론 없어졌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를 돕고 싶어 애를 썼습니다. 어른에게는 인사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고, 선생님들 사이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소문이 났습니다.
"내가 만봉이를 주인공으로 뽑은 일을 정말 잘한 일이야."
선생님은 자신의 결정에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선생님께서 이렇게 되리란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말썽꾸러기 강만봉, 싸움 대장 강만봉을 착한 어린이로 만들겠다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반 아이들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만봉이 곁에는 늘 아이들이 붕붕거리는 벌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강만봉은 이렇게 맘씨 좋은 아저씨, 아니 맘씨 좋은 아이가 되어 반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