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이끌 60인] 12. 설치미술가 이불
입력: 2006년 04월 02일 17:08:31 : 3 : 0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물이 그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항상 그 이면에 숨은 모습을 생각했죠.” 설치미술가 이불(42)의 운명은 어쩌면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새벽’이란 뜻의 ‘불’로 지어준 그때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막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새벽’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는 늘 ‘불온한 사상’ 때문에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취직을 할 수 없었던 가족의 생계는 가내수공업으로 해결했다. 반짝이는 구슬들이 집안에 굴러다녔던 어린 시절부터 이불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왜 교실 벽에 걸려있어야 하는지 의문이었고, 예쁜 구슬로 만든 액세서리는 갖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기에 앞서 노동의 대상이자 가족사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만약 그에게 이러한 가족사가 없었다면 오른손잡이를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삐딱한 왼손잡이’가 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 왼손으로 시험을 치러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도제식 학교 교육은 별 재미가 없었다. 졸업 즈음인 1987년 최정화, 고낙범, 이형주 등 홍대 출신 10여명과 함께 조직한 ‘뮤지엄’은 그룹전 활동의 마지막이자 미술계 ‘앙팡테리블’의 원조였다. 3년간 활동한 이 그룹은 한국미술사에서 ‘신세대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9년 ‘낙태’를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는 천장에 나체로 매달렸고, 이듬해엔 괴물같은 차림으로 공항에서부터 일본 도쿄까지 12일간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사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항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반짝이를 생선에 장식한 후, 그 썩어가는 냄새까지 ‘전시’한 작품 ‘화엄’이 1997년 뉴욕 MOMA에서 철거된 해프닝은 오히려 ‘월드 스타’로의 초대장이 되었다. 이후 사이보그, 몬스터, 노래방 시리즈를 연이어 발표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국내보다는 국제 전시가 많아졌다.

데뷔 20년. 순수 국내파 출신으로 ‘월드 스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이불은 ‘화려하고도 센세이셔널한’ 경력들을 장식물로 삼은 ‘미술계의 여전사’에서 방향을 급선회했다. 지난해 6월 바젤 아트페어에 출품된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이게 과연 이불의 작품이 맞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사이보그도, 페미니즘도 사라지고, 예쁜 구슬도 자취를 감췄다. 다만 미래도시의 폐허를 연상케 하는 뒤죽박죽의 건물들과 구조물, 고속도로 같은 것들이 전시됐다. ‘나의 거대한 서사시’라는 이 시리즈는 작가에게 영향을 준 책이나 영화, 설계로만 남아있는 동서양의 이상적 건축물 같은 것들이 석줄의 전광판 문장과 함께 전시된다. 하지만 그 사이를 지나가는 고속도로는 끊겨있다. 각각은 모두 인간의 열망과 이상을 담은 것이지만, 실제론 실현되지 못한 이상일 뿐이다. 이 ‘문명의 삭막한 풍경화’는 인간의 이상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사이보그나 몬스터 같은 기존의 작품들과 달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다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역사,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권력의 실체를 제 작품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사는 여성 예술가니까, 그 방법이 페미니즘적일 수도 있고,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일 수도 있었던 거죠.”

미술계에서는 그의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남편인 영문학자 제임스 리의 영향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미술과 문학이라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주고 받는 영향 외에도 이불의 해외활동에 남편의 도움이 컸다. 10년 전엔 치렁한 머리에 뚱뚱했던 이불이 지금은 정장차림에 숏커트의 날씬한 뉴요커처럼 변한 외모에서부터 그렇다.

단말마의 외침처럼 충격적 퍼포먼스와 뚜렷한 주제가 드러나는 작품으로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서부터 세계로 내달렸던 이불은 이제 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간과 문명에 대한 서사시를 읊고 있다. 자, 그녀의 서사시가 드러내는 세상의 이면을 볼 준비가 되었는가?

▶ 이불은 누구

▲1964년 강원도 영월 생 ▲1987년 홍익대 조소과 졸업 ▲1987~90년 ‘뮤지엄’ 활동 ▲1997년 뉴욕 MOMA에서 개인전 ▲휴고 보스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1999년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공로상 등 수상 ▲2002년 석주미술상, 로댕갤러리 개인전 ▲2003 일본 재팬 파운데이션 개인전 ▲2006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예정) ▲2007 파리 카르티에 재단 개인전(예정)

〈글 이무경·사진 박민규기자 lm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