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동안 이승휴帝王韻紀하권 전문

帝 王 韻 紀 (제왕운기)

動安 李承休(동안 이승휴)

 

요동별유일건곤,[遼東別有一乾坤],ㅡ요동(또는 요하 동쪽)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
두여중조구이분,[斗與中朝區以分].ㅡ두드러져 중국과 구분되어 나누어 졌네,
홍도만경위삼면,[洪濤萬頃圍三面],ㅡ큰 파도 수 만 이랑 삼면을 두르고
어북유륙연여선,[於北有陸連如線],ㅡ북쪽에 육지 있어 실처럼 이어져 있다.

중방천리시조선,[中方千里是朝鮮],ㅡ가운데가 천리니 이 땅이 곧 조선이라.
강산형승명부천,[江山形勝名敷天],ㅡ강산 좋은 경치 그 이름 천하에 알려졌다.
경전착정예의가,[耕田鑿井禮義家],ㅡ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이라.
화인제작소중화,[華人題作小中華],ㅡ중국사람들은 작은 중화라 부른다네.

 

초수개국조풍운,[初誰開國肇風雲],ㅡ누가 나라 열어 풍운을 열었는가.
석제지손명단군,[釋帝之孫名檀君],ㅡ천제의 손자,단군이라 불렀다네.
병여제고흥무진,[竝與帝高興戊辰],ㅡ(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시기 무진에 일어나.
경우역하거중신,[經虞歷夏居中宸],ㅡ우임금을 지나 하나라를 거칠 때까지도 임금자리에 있었다네.

어은호정팔을미,[於殷虎丁八乙未],ㅡ은나라 호정 팔년 을미에.
입아사달산위신,[入阿斯達山爲神],ㅡ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네.
형국일천이십팔,[亨國一千二十八],ㅡ나라 누리기 일천이십팔년이 되어.
무내변화전환인,[無奈變化傳桓因],ㅡ변화가 환인에게서부터 전해짐을 어이하리.

각후일백육십사,[却後一百六十四],ㅡ이 뒤 일백육십사 년에.
인인료부개군신,[仁人聊復開君臣],ㅡ어진사람 다시 군신관계를 열었도다.
후조선조족기자,[後朝鮮祖足箕子],ㅡ후조선의 시조는 기자인데.
주호원년기묘춘,[周虎元年己卯春],ㅡ주나라 무왕 호원 원년 기묘년 봄에.

포래지차자립국,[逋來至此自立國],ㅡ도망하여 여기에 와서 나라를 세우니.
주호요봉강명윤,[周虎遙封降命倫],ㅡ무왕이 멀리 봉하는 윤음을 내렸도다.
예난불사내입근,[禮難不謝乃入覲],ㅡ에의상 사양하기 어려워 들어가 보니.
홍범구주문이륜,[洪範九疇問彛倫],ㅡ홍범구주의 떳떳한 인륜을 물었다네.

사십일대손명준,[四十一代孫名準],ㅡ(기자의) 사십일대 손의 이름은 준.
피인침탈료거민,[被人侵奪聊去民],ㅡ남의 침탈을 입어 백성을 버렸다.
구백이십팔년이,[九百二十八年理],ㅡ다스린지 구백이십팔년.
유풍여렬전희순,[遺風餘烈傳熙淳],ㅡ끼친 풍속과 남은 공렬이 화락하고 순수했다.

준내이거금마군,[準乃移居金馬郡],ㅡ준은 이에 금마군에 이어 살면서.
입도우부능군인,[立都又復能君人],ㅡ도읍을 세우고 다시 임금이 되었다.
한장위만생자연,[漢將衛滿生自燕],ㅡ한나라 장수 위만이 연나라에 나서.
고제십이병오년,[高帝十二丙午年],ㅡ고제 십이 병오년에.

내공축준내탈국,[內攻逐準乃奪國],ㅡ와서 준을 쳐서 좇아내고 나라를 빼았으니.
지손우거영궐건,[至孫右渠盈厥愆],ㅡ손자 우거에 이르러서 그 허물 가득찼다.
한호원봉삼계유,[漢虎元封三癸酉],ㅡ한나라 무제 원봉 삼년 계유년에.
명장출사래토언,[命將出師來討焉],ㅡ장수에게 명해 군사를 내어 와서 토벌하였다.

삼세병위팔십팔,[三世倂爲八十八],ㅡ삼대를 합하여 모두 88.
배한촉준앙의연,[背漢逐準殃宜然],ㅡ한나라를 배반하고 준을 좇았으니 재앙이 마땅하다.
인분차지위사군,[因分此地爲四郡],ㅡ이로 인하여 땅을 나누어 네 고을로 만들어.
각치군장수민편,[各置君長綏民編],ㅡ군장을 각각 두어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

진번임둔재남북,[眞番臨屯在南北],ㅡ진번과 임둔은 남북에 있고.
낙랑현토동남편,[樂浪玄兎東南偏],ㅡ낙랑과 현도는 동남에 치우쳐 있었다.
언광이생이자절,[焉匡以生理自絶],ㅡ서로 도와 사는 도리 저절로 끊어져.
풍속점리민미안,[風俗漸離民未安],ㅡ풍속은 점점 경박해져 백성들은 편치 못했다네.

수시합산부침제,[隨時合散浮沈際],ㅡ때에 따라 합쳤다 흩어졌다 부침하는 사이에.
자연분계성삼한,[自然分界成三韓],ㅡ저절로 경계 나누어져 삼한을 이루었다.
삼한각유기주현,[三韓各有畿州縣],ㅡ삼한에는 각각 몇 주현이 있었던고.
치치산재호산간,[蚩蚩散在湖山間],ㅡ어리석어 호수와 산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네.

각자칭국상침능,[各者稱國相侵凌],ㅡ각자가 나라 일컬어 서로 침략하고 깔보아서.
수여칠십하족징,[數餘七十何足徵],ㅡ수효가 칠십이 넘으니 어떻게 충분히 증거하리.
어중하자시대국,[於中何者是大國],ㅡ그 중 어느것이 큰 나라인가.
선이부여비류칭,[先以夫餘沸流稱],ㅡ먼저 부여와 비류를 일컫는다.

차유시라여고례,[次有尸羅與高禮],ㅡ다음으로 시라(신라)와 고례(고려 = 고구려)가 있다.
남북옥저예맥응,[南北沃沮濊貊膺],ㅡ남북으로 옥저와 예맥도 있었으니.
차제군장문수후,[此諸君長問誰後],ㅡ이 모든 군장들은 누구의 후손인가.
세계역자단군승,[世系亦自檀君承],ㅡ혈통은 역시 단군에게서 이어 받았다.

기여소자명하등,[其餘小者名何等],ㅡ그 나머지 작은 것은 이름이 무엇인가.
어문적중추미능,[於文籍中推未能],ㅡ문서와 책으로는 추구할 수 없으나.
금지주부별호시,[今之州府別號是],ㅡ지금의 주, 부 별칭이 그것이건만.
언설나지응불응,[諺說那知應不應],ㅡ상말아라 어찌 알겠는가,맞고 안 맞음을.

상득한황수원의,[想得漢皇綏遠意],ㅡ생각하면 한 무제가 먼 땅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과.
정상증처해려증,[定想蒸處害黎蒸],ㅡ백성을 안정하려는 것이 백성을 해쳤구나.
진마변인종정시,[辰馬弁人終鼎時],ㅡ진한,마한,변한사람 마침내 솥발같이 맞설때.
라여여제상차흥,[羅與麗濟相次興],ㅡ신라,고구려,백제 서로 이어 일어나.

자분위군지라기,[自分爲郡至羅起],ㅡ저절로 나누어 고을이 되니 신라가 일어나기에 이르렀네.
계년칠십이산령,[計年七十二算零],ㅡ햇수로 계산하면 칠십이년.
신라시조혁거세,[新羅始祖赫居世],ㅡ신라의 시조는 혁거세인데.
수출불시인간계,[所出不是人間系],ㅡ나온 곳이 인간 계통 아니었다네.

유란강자창창래,[有卵降自蒼蒼來],ㅡ알이 있어 하늘에서 내려와.
기대여표홍루계,[其大如瓢紅縷繫],ㅡ그 크기는 박 만하고 붉은실로 매었다.
개중장생인성박,[箇中長生因姓朴],ㅡ그 속에서 자라고 났기로 성을 박이라고 했다.
차기비위천소계,[此豈非爲天所啓],ㅡ이 어찌 하늘이 열어준 것이 아니랴.

한의오봉원갑자,[漢宜五鳳元甲子],ㅡ한나라 선제 오봉 원년 갑자에.
개국진한정강계,[開國辰韓定疆界],ㅡ진한이 개국하여 경계를 정하니.
풍순속미도국평,[風淳俗美都局平],ㅡ풍속은 순후하고 아름다워 나라가 편안하였다.
성군현상임상계,[聖君賢相臨相繼],ㅡ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정승 서로 이어 임하여.

희황상세하이가,[羲皇上世何以加],ㅡ복희씨 옛 세상이 무엇이 이보다 나을 것인가.
조야숙목무기폐,[朝野肅穆無欺弊],ㅡ조야가 공경하고 화목하여 속임이 없었고.
사녀희희분노행,[士女熙熙分路行],ㅡ남녀는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길을 나눠 다녔다네.
행불제양문불개,[行不齊糧門不開],ㅡ여행갈 나서도 양식을 싸가지 않고 문도 닫지 않았다.

화조월석휴수유,[花朝月夕携手遊],ㅡ꽃 피는 아침 달 밝은 저녁에 손을 맞잡고 놀며.
별곡가사수의제,[別曲歌詞隨意製],ㅡ별곡과 가사를 마음 내키는 대로 지었다.
혹감계림혹김궤,[惑感鷄林惑金櫃],ㅡ혹은 계림에 혹은 금궤(황금 상자)에 감응되어.
석씨김씨상승계,[昔氏金氏相承繼],ㅡ석씨 김씨가 서로 교대로 임금이 되었다.

이시구대춘추왕,[二十九代春秋王],ㅡ이십구대 되는 김춘추왕이.
청병어당편여제,[請兵於唐平麗濟],ㅡ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 백제를 평정하였다.
유신김공시공신,[庾信金公是功臣],ㅡ김유신 공이 곧 공신인데.
득묘병서정환예,[得妙兵書精患藝],ㅡ병거에 신묘하고 무예에 정통하였다.

문장하신동중화,[文章何臣動中華],ㅡ문장은 어떤 신하가 중화를 움직였는가.
청하치원방연예,[淸河致遠方延譽],ㅡ청하 최치원이 명성을 아리었나니.
석언원효여상사,[釋焉元曉與相師],ㅡ스님으로는 원효와 의싱대사가 있어.
심여고불상부계,[心與古佛相符契],ㅡ마음이 옛부처와 서로 맞았다네.

홍유설후제리서,[弘儒薛侯製吏書],ㅡ큰 선비 설총은 이두를 만들어서.
속언향어통과사,[俗言鄕語通科肆],ㅡ속언과 지방말로 과거의 과정[科程]을 익힘에 통하였다.
성현잡환래찬양,[聖賢雜還來贊襄],ㅡ많은 성현이 여러번 와서 도와.
준준검창개천예,[蠢蠢黔蒼皆踐禮],ㅡ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예를 지켰다.

과면추원업장쇠,[瓜綿楸遠業將衰],ㅡ세대가 멀어져서 왕업이 쇠해지니.
예훤향상행광폐,[裔萱向上行狂吠],ㅡ궁예와 견훤은 주인을 향하여 미친 개 짖듯 하니
군정흉흉미지귀,[群情洶洶未知歸],ㅡ민심이 물 끓듯 돌아갈 곳 모르니.
김부대왕능원계,[金傅大王能遠計],ㅡ김부대왕은 먼 계책을 알앗도다.

후당말제청태이,[後唐末帝淸泰二],ㅡ후당 말의 황제인 청태 이년.
을미중동조아폐,[乙未仲冬朝我陛],ㅡ을미 동짓날에 (경순왕이) 우리 임금(왕건)께 조회 하였다.
처이장주봉상부,[妻以長主封尙父],ㅡ낙랑공주를 아내로 주고 상보로 삼았으며.
의관역사조연예,[衣冠亦使朝連예],ㅡ신라 신하도 모두 조정반열에 두엇다.

구백구십이년래,[九百九十二年來],ㅡ구백 구십 이년 동안.
오십육왕능칭제,[五十六王能稱制],ㅡ쉰여섯 임금이 조정에 임하였다.
지금여경유불궁,[至今餘慶猶不窮],ㅡ지금까지도 남은 경사 여전히 다하지 않아서.
난대봉각류모예,[鸞臺鳳閣流苗裔],ㅡ난대와 봉각에 자손이 눌러있다.

지기능약신다재,[知畿能弱信多哉],ㅡ기미를 알고 약한 길 취햇으니 참으로 잘한 일이로다.
탄미족처신무체,[嘆未足處臣無替],ㅡ부족한 걸 탄식하며 신하노릇 변함이 없었다.
임서점검개벽래,[臨書點檢開闢來],ㅡ글에 임해 개벽 이래의 일 낱낱이 살펴보니.
만유천고무사례,[萬有千古無斯禮],ㅡ천고 만고에 이런 예가 없엇다네.

여조성고시동명,[麗祖姓高諡東明],ㅡ고구려 시조의 성은 고씨요,시호는 동명인데.
선사고이주몽명,[善射故以朱蒙名],ㅡ활을 잘 소기로 주몽으로 이름지었다네.
부해모수모류화,[父解慕漱母柳花],ㅡ아버지는 해모수이고 어머니는 유화였네.
황천지손하백생,[皇天之孫河伯甥],ㅡ황천(천제)의 손자요,하백의 외손이라.

부환천궁불부환,[父還天宮不復還],ㅡ아버지는 천궁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모재우발청강정,[母在優渤淸江汀],ㅡ어머니는 우발의 맑은 강가에 있었다네.
부여국왕명금와,[夫餘國王名金蛙],ㅡ부여국 왕의 이름은 금와인데.
위개별관상요영,[爲開別館相邀迎],ㅡ별관을 마련하고 유화를 맞아들였다네.

오승대란좌협탄,[五升大卵左脇誕],ㅡ닷되 들이 큰알 왼편 옆구리에서 탄생하니.
음은지일생양정,[陰雲之日生陽晶],ㅡ흐리고 구름 낀 날도 환한 광채 났다네.
아생수월능언어,[兒生數月能言語],ㅡ아이가 난 지 몇 달 만에 말을 하고.
점지장대재호영,[漸至將大才豪英],ㅡ차츰 장대해지니 재주가 호방하고 영걸스러웠다네.

시왕태자생투기,[時王太子生妬忌],ㅡ금와왕의 태자가 투기하여.
참령목마구형형,[讒令牧馬謳형형],ㅡ참소하여 말을 기르게 하니 말이 살쪘다.
왕래욕도개사수,[王來欲渡蓋斯水],ㅡ주몽왕이 도망하여 개사수를 건너려 하니
어별화작교량횡,[魚鱉化作橋梁橫],ㅡ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로 변하여 가로 놓였다.

한원입소이갑신,[漢元立昭二甲申],ㅡ한나라 원제 입소 이년 갑신에.
개국마한왕검성,[開國馬韓王儉城],ㅡ마한이 왕검성에 개국하였다.
천견인래입궁궐,[天遣人來立宮闕],ㅡ하늘이 사람을 보내어 궁궐을 세우니.
산혼곡암문정정,[山昏谷暗聞丁丁],ㅡ산은 어둡고 골짜기는 캄캄한데 정정하는 소리 들렸다.

위칠일이운무권,[爲七日已雲霧捲],ㅡ칠일이 되자 운무 걷히고.
금벽돌올마신청,[金碧突兀磨新晴],ㅡ금벽이 우뚝 솟아 갠 하늘에 다았다.
오이마리여협부,[烏伊摩離與挾父],ㅡ오이와 마리와 협부.
삼신동덕유찬성,[三臣同德聊贊成],ㅡ세 신하가 같은 덕으로 도와 이루었다.

비류국왕송양자,[沸流國王松讓者],ㅡ비류국 왕 송양이.
예이후선개국쟁,[禮以後先開國爭],ㅡ개국의 선후로 예를 다투었다.
심위대우소표돌,[尋爲大雨所漂突],ㅡ얼마 뒤에 큰 비에 표몰되어.
거국관부수충성,[擧國款附輸忠誠],ㅡ나라 들어 귀순하여 충성을 다하엿다.

왕래천상에천정,[往來天上詣天政],ㅡ천상에 왕래하며 하늘 조정에 나가니.
조천석산린재경,[朝天石上麟蹄輕],ㅡ조천석 위에 기린의 발굽 가벼웟다.
재위십구년구월,[在位十九年九月],ㅡ왕위에 있은 지 십 구년 구월에.
승천불부회운병,[升天不復廻雲輧],ㅡ하늘에 올라 돌아오지 않고 수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성자유리래시위,[聖子類利來嗣位],ㅡ성인의 자식 유리가 와서 왕위를 잇고.
장유옥편성분영,[葬遺玉鞭成墳塋],ㅡ남긴 옥 채직을 장사하여 분묘를 이루었다.
지번역무승승리,[枝繁葉茂承承理],ㅡ가지가 번성하고 잎이 무성하여 대대로 이어져 다스려.
시여강수쟁징청,[時與江水爭澄淸],ㅡ때로는 강물과 맑음을 다투었다.

개소문자병시진,[蓋蘇文者秉時進],ㅡ연개소문이란 자 때를 타서 나와.
영색교언위총경,[令色巧言爲寵卿],ㅡ웃는 얼굴 교묘한 말로 총신이 되었다네.
간회장상농국병,[姦回掌上弄國柄],ㅡ간사하게 손바닥 위에서 나라권세를 희롱하고.
임사방편주양신,[臨事方便誅良臣],ㅡ일에 임하여 제 마음대로 충량한 신하들을 베었다네.

천권중외일사학,[擅權中外日肆虐],ㅡ안밖에 권세를 휘둘러 갈수록 포악하더니.
민추도탄방기경,[民墜塗炭邦基傾],ㅡ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기초는 기울였다.
후군고장우실도,[後君高藏又失度],ㅡ뒤 임금 고장이 또 법도를 잃어.
안능부정여인정,[安能復定與人情],ㅡ민심을 어찌 다시 정할 수 있을 것인가.

당고총장원벌진,[唐高摠章元伐辰],ㅡ당 고종 총장 원년 무진에.
라왕주겅왕사정,[羅王奏乞王師征],ㅡ신라왕이 왕사의 징벌을 아뢰어 벌렸다.
이적행군수감거,[李勣行軍誰敢拒],ㅡ이적의 행군을 뉘 감히 막으랴.
선성재급개분경,[先聲縡及皆奔驚],ㅡ소문이 전해지자 모두 놀라 달아났다.

공계이십유팔왕,[共計二十有八王],ㅡ모두 합하여 이십팔 군왕.
칠백오년제태평,[七百五年題太平],ㅡ칠백오년 태평을 누렷다네.
이후이백삼십일,[爾後二百三十一],ㅡ그 뒤 이백 삼십 일년 동안.
지위라인지소병,[地爲羅人之所倂],ㅡ국토는 신라에 병합되었다.

라왕경문생서자,[羅王景文生庶子],ㅡ신라 경문왕이 서자를 낳앗는데.
치유양중함부성,[齒有兩重含付聲],ㅡ두겹으로 이가 나서 어물어물 하는소리.
상시해군내방축,[相是害君乃放逐],ㅡ임금을 해칠 상이라 방축되어.
탁적부도잠유행,[託迹浮圖潛遊行],ㅡ종적을 절에 의탁하여 가만히 돌아다녓네.

서흥교사해재거,[棲興敎寺邂齋去],ㅡ흥교사에 있으면서 제를 올리고 떠나가.
시이응발수중경,[時以應鉢手中擎],ㅡ때로 응발을 손 가운데로 받는다.
유조함락시기중,[有鳥含落是器中],ㅡ까마귀가 물어서 그릇 가운데 떨어뜨린 것.
왕자루재황아주,[王字鏤在黃芽柱],ㅡ왕이라는 글자가 누런 아주에 새겨 있었다.

중심자기비불출,[中心自奇秘不出],ㅡ마음에 신기하여 비밀을 간직하고.
방촌분부장간맹,[方寸盆復藏姦萌],ㅡ더욱 다시 간흉한 싹을 감추었다네.
명본선종개궁예,[名本善宗改弓裔],ㅡ본디 이름은 선종인데 궁예로 고치고.
투북원적양길병,[投北原賊梁吉兵],ㅡ북원의 적 양길의 군중에 들어갔다.

당소대순원경술,[唐昭大順元庚戌],ㅡ당나라 소종 대순 원년 경술에.
칭후고려입왕정,[稱後高麗立王旌],ㅡ후고구려라 일칻고 왕의 기틀 세웠다.
초둔금성일벽토,[初屯金城日闢土],ㅡ처음에는 금성에 둔취하여 날로 땅을 넓히고.
전택철군신개경,[轉宅鐵郡新開京],ㅡ철원군에 거처를 옮겨 새로 서울을 열었다.

지양정명사무인,[至梁貞明四戊寅],ㅡ양나라 정명 4년 무인에 이르러.
이십유팔연광경,[二十有八年光更],ㅡ스물여덟 연광이 고쳐졌다.
막괴이래우폭자,[莫愧邇來尤暴姿],ㅡ그동안 포악하고 방자함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위아태조구창생,[爲我太祖驅蒼生],ㅡ우리 태조를 위하여 창생을 몰아 주었다.

백제시조명온조,[百濟始祖名溫祖],ㅡ백제의 시조 이름은 온조인데.
동명성제기황고,[東明聖帝其皇考],ㅡ동명성제는 그의 아버지라네.
기형유리래사위,[其兄類利來嗣位],ㅡ형 유리 돌아와서 왕위 이으니,
심불능평내남도,[心不能平乃南渡],ㅡ마음이 불안하여 남쪽으로 (물을) 건너갔다.

한성홍가삼계묘,[漢城鴻嘉三癸卯],ㅡ한나라 성제 홍가 3년 계묘에.
개국변한원무무,[開國弁韓原무무],ㅡ변한에 개국하니 땅이 비옥하였다.
천시지리득인화,[天時地利得人和],ㅡ천시와 지리에 인화를 얻어.
경영불일천관구,[經營不日千官具],ㅡ경영한지 몇일 안 돼 천관이 갖추어 졌다.

계장난지연분방,[系將蘭芷衍芬芳],ㅡ혈통은 난지 분방을 펼치고.
업여송죽동포무,[業與松竹同苞茂],ㅡ왕명는 소나무나 대나무 같이 무성하였다.
후주혹호남부여,[後主惑號南夫餘],ㅡ후대의 왕이 혹은 남부여라 호칭하고.
혹칭응준여라투,[惑稱鷹準與羅鬪],ㅡ혹은 응준이라 일컬었는데 신라와 싸웠다.

지영일구급의자,[持盈日久及義慈],ㅡ성만한 자 날들이 오래되고 의지왕에 이르러.
색취성감실왕도,[色醉聲감失王度],ㅡ성색에 취하여 왕의 법도를 잃었다.
당고현경오경신,[唐高顯慶五庚申],ㅡ당고종 현경 5년 경신에.
나왕신주요청토,[羅王申奏邀天討],ㅡ신라왕이 당나라에게 아뢰어 토벌을 청하니.

명소정방하웅비,[命蘇定方下熊비],ㅡ소정방을 명하여 웅비를 거느려.
수륙시석분여우,[水陸矢石粉如雨],ㅡ수륙으로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졌다.
기다홍분추청류,[畿多紅粉墜淸流],ㅡ얼마나 많은 구녀들이 강물에 떨어졌든가.
낙화암용대왕포,[落花巖聳大王浦],ㅡ대왕포에 우뚝솟은 낙화암.

육백칠십팔년중,[六百七十八年中],ㅡ육백 찰십 팔년 동안.
삼십사왕수천우,[三十四王受天佑],ㅡ34왕이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이백삼십이,[爾後二百三十二],ㅡ그 뒤 이백 삼십 이년 동안.
지위라인지소무,[地爲羅人之所撫],ㅡ땅이 신라사람 차지가 되었다.

가은현인아자개,[加恩縣人阿慈介],ㅡ가은현 사람 아자개.
생득일아업농포,[生得一兒業農圃],ㅡ한 아들 나아 밭에서 일 하는데.
치향전두부부운,[置向田頭夫婦耘],ㅡ밭머리에 놓아두고 부부가 김을 매면.
조래서복호래유,[鳥來舒覆虎來乳],ㅡ새는 와서 덮어주고 범은 와서 젖을 먹였다네.

기장사라조행간,[旣壯仕羅造行間],ㅡ장성하자 신라에 벼슬하여 항오사이 나갔는데.
재력리윤성웅호,[才力離倫性雄虎],ㅡ힘과 재주 뛰어나고 성품이 웅건하고 호방하였다.
성본시이명견훤,[姓本是李名甄萱],ㅡ성은 본디 이씨고 이름은 견훤.
승명출향남방수,[承命出向南方戍],ㅡ명을 받아 나가 남방의 수자리를 지켰다.

잠합대지하시편,[潛合大志何時便],ㅡ가만히 큰 뜻 품어 때를 엿 보고.
당사유민상토포,[당士誘民常吐哺],ㅡ선비 꾀이고 백성 유혹함에 늘 먹던 밥 토할 정도로 부지런했네.
당소경복원임자,[唐소景福元壬子],ㅡ당 소종 경복 원년 임자에.
거호진성초수우,[據虎珍城初樹羽],ㅡ무진성에 웅거하여 처음으로 우익 세웠다.

병강기예자횡행,[兵强氣銳姿橫行],ㅡ군사는 강하고 기세는 날카로워 마음대로 횡행하여.
명후백제사십오,[名後百濟四十五],ㅡ후백제라 이름하여 사십 오년 지냈다.
유자불량장내하,[有子不良將奈何],ㅡ자식이 불량하니 이를 어찌 하리요.
기명신검내유부,[其名神劍乃幽父],ㅡ그 이름은 신검이라 아비를 가두었다네.

금산불전호수개,[金山佛殿戶誰開],ㅡ금산 불전에 문을 누가 열었단고.
태화천리당촌보,[泰華千里當寸步],ㅡ태화천 리를 촌보 같이 달렸다네.
청태삼년병신춘,[淸泰三年丙申春],ㅡ청태 3년 병신년 봄에.
투도벽강귀아조,[偸渡碧江歸我祖],ㅡ가만히 강을 건너 우리 태조에게 돌아왔다.

대이왕예위어조,[對以王禮慰於朝],ㅡ왕의 예로 대접하여 조정에 위로하고.
왕토적자시저로,[王討賊子尸저路],ㅡ도둑같은 자식을 길에서 죽였다.
임홍구혈나가추,[臨홍歐血那可追],ㅡ죽음에 임하여 피를 토하니 어찌 미치랴.
미의라왕지거취,[美矣羅王知去就],ㅡ아름답다 신라왕의 거취를 안 것이여.

전려구장대조영,[前麗舊將大祚榮],ㅡ전 고구려 장군 대조영이.
득거태백산남성,[得據太白山南城],ㅡ태백산 남쪽성에 웅거하였다.
어주측천원갑인,[於周則天元甲寅],ㅡ무측천(측천무후) 원년 갑인년에.
개국내이발해명,[開國乃以渤海名],ㅡ나라 열고 발해로 이름 지었다.

지아태조팔을유,[至我太祖八乙酉],ㅡ우리 태조 8년 을유년에 이르러.
거국상솔조왕경,[擧國相率朝王京],ㅡ온 나라가 서로 거느려 왕경에 조회하였다.
수능지변선귀부,[誰能知變先歸附],ㅡ누가 변을 알고 먼저 돌아와 의탁하겠는가.
예부경여사정경,[禮部卿與司政卿],ㅡ예부경과 사정경이였다.

역년이백사십이,[歷年二百四十二],ㅡ연조를 거친것이 이백 사십 이년.
공문기군능수성,[共問畿君能守城],ㅡ그 동안 몇 임금이 수성하엿던가.

자고수명군,[自古受命君],ㅡ옛부터 천명 받은 임금님을.
숙불비상류,[熟不非常類],ㅡ누가 비상한 부류가 아닐까마는.
유아황가계,[惟我皇家系],ㅡ우리 황가의 가계는.
어차우기이,[於此尤奇異],ㅡ여기서 더욱 기묘하고 이상하다.

당숙잠룡시.[唐肅潛龍時],ㅡ당나라 숙종이 잠룡으로 잇을때.
유상동산수,[遊賞東山水],ㅡ우리나라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예피팔진선,[禮被八眞仙],ㅡ저 팔진선을 순례하고.
기속송산지,[寄宿松山趾],ㅡ송악산 밒 양지동 보육의 집에서 머물러 잤다.

성골장군손,[聖骨將軍孫],ㅡ구룡산 천왕인 성골장군의 손자에게.
유여성의미,[有女聖而美],ㅡ달이 있는데 어질고 아름다웠다.
수합생경강,[遂合生景康],ㅡ마침내 합하여 경왕을 낳았는데.
선사무륜비,[善射無倫比],ㅡ활을 잘 쏘아서 비교 할 사람이 없었다.

욕근천자부,[欲覲天子父],ㅡ천자인 아버지를 뵈려고.
기달상인의,[寄達商人艤],ㅡ장사꾼의 배에 몸을 붙어 탔다.
급지해중앙,[及至海中央],ㅡ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주내선류지,[舟乃旋流止],ㅡ배는 걷 빙빙돌아 멈추었다.

상인괴기연,[商人怪其然],ㅡ장사꾼들이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겨.
차복이차의,[且卜而且議],ㅡ점처 보기도 하고 또 의논해 보기도 했다.
부출치고석,[扶出置孤石],ㅡ붙릉러 내어 외딴 바위에 두고.
주행야과취,[舟行如過鷲],ㅡ배는 지나가는 독수리처럼 떠나가 버렸다.

심즉용왕출,[尋卽龍王出],ㅡ조금 뒤에 용왕이 나와.
피성진소이,[披誠陳所以],ㅡ성의를 보이며 까닭을 말했다.
원유노야호,[爰有老野狐],ㅡ늙은 야생 여우가 있어.
시시홀래차,[時時忽來此],ㅡ대때로 갑자기 이곳으로 와서.

사현불위의,[詐現不威儀],ㅡ거짖 부처님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발경분설사,[拔經紛說似],ㅡ요망한 경문을 어지러이 말하는 것 같앗다.
아즉발두통,[我卽發頭痛],ㅡ나는 곧 두통이 일어나.
차사난감의,[此思難堪矣],ㅡ이 생각에 어지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원자탄신궁,[願子彈神弓],ㅡ원컨데,그대는 신궁을 당겨서.
위아이제피,[爲我而除彼],ㅡ나를 위해서 저것을 없애다오 하니.
과여기소운,[果如其所云],ㅡ과연 그가 말한 것과 같이.
폐지이일시,[斃之以一矢],ㅡ화살 하나로 죽이였다.

용왕부출사,[龍王復出謝],ㅡ용왕이 다시 나와 사레하며.
인입심궁리,[引入深宮裏],ㅡ검은 궁궐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수처이장여,[遂妻以長女],ㅡ마침내 맡 딸을 아내로 주니.
걸여금모시,[乞與金毛豕],ㅡ금털돼지 주기를 빌었다.

겸이칠보수,[兼以七寶隨],ㅡ겸하여 칠보도 달려 주기를 빌었다.
재송서겅사,[載送西江浚],ㅡ따라서 서강의 물가에 실어 보냈다.
환래거송악,[還來居松嶽],ㅡ돌아와 송악에 살며.
어언탄성지,[於焉誕聖智],ㅡ얼마뒤에 성지를 탄생했다.

성모명선사,[聖母命銑師],ㅡ성모가 도선대사를 명했는데,
지차명당위,[指此明堂謂],ㅡ이것을 가리키며 명당이라 일렀다.
사위종제전,[斯爲種제田],ㅡ이것이 기장을 심는 밭인데.
인이위주씨,[因以爲主氏],ㅡ이로 인하여 왕시가 되었다.

세조어라시,[世祖於羅時],ㅡ세조는 신라때에.
금성승금기,[金城承錦寄],ㅡ금성의 부탁을 받았었다.
궁예자북원,[弓裔自北原],ㅡ궁예는 북원에 와서.
개국어시지,[開國於是地],ㅡ이 땅에서 나라 얻었다.

이도철원군,[移都鐵原郡],ㅡ철원군으로 도읍을 옮기고.
관인이백규,[官人以百揆],ㅡ백성을 백관으로 임명했다.
인사예지조,[因仕裔之朝],ㅡ인하여 궁예의 조정에 벼슬하여.
태조제원수,[太祖除元帥],ㅡ태조가 원수로 임명되었다.

부전복제방,[不戰服諸方],ㅡ싸우지 않고 사방을 복종시키니.
공업창이치,[功業昌而熾],ㅡ공업이 창성하고 성하였다.
예내자사학,[裔乃自肆虐],ㅡ궁예는 날마다 방자하고 포악해지니.
민심여정비,[民心如鼎沸],ㅡ민심이 솥에 물 긇는듯 하였다.

유시사공신,[惟時四功臣],ㅡ이때 네 공신들이.
심차도탄추,[深嗟塗炭墜],ㅡ도탄에 덜어지는 것을 깊이 탄식하였다.
거란신책삼,[契丹神冊三],ㅡ거란의 신책 3년.
주량정명사,[朱梁貞明四],ㅡ주량의 정명 4년.

무인유월망,[戊寅六月望],ㅡ무인년 6월 보름날에.
단연동거의,[端然同擧義],ㅡ과감하게 함게 의거 일으켰다.
예아태조가,[詣我太祖家],ㅡ우리 태조의 집에 나아가니.
추대즉대위,[推戴卽大位],ㅡ추대하니 대위에 올랐다.

불기이회자,[不期而會者],ㅡ약속하지 않고도 모인 사람이.
삼천보여기,[三千步與騎],ㅡ보병과 기병이 모두 삼천이나 되었다.
약한지망운,[若旱之望雲],ㅡ가뭄에 구름 바라보듯 하여.
사방쟁혜희,[四方爭헤喜],ㅡ사방이 다투어 기다리고 기뻐 하였다.

조정십팔년,[租征十八年],ㅡ정벌을 시작한지 18년 만에.
삼한동인궤,[三韓同人軌],ㅡ삼한이 통일 되었다.
수의팔년가,[垂衣八年間],ㅡ옷 드리운지 8년 동안.
문물예악비,[文物禮樂備],ㅡ문물과 예악이 갖추어 졌다.

혜정급광종,[惠定及光宗],ㅡ혜종과 정종 그리고 광종은.
개시조지자,[皆是祖之子],ㅡ모두 태조의 아들이다.
혹삼혹오년,[或三或五年],ㅡ혹은 3년 혹은 5년.
혹삼구임위,[或三九臨位],ㅡ혹은 27년 임금 자리에 있었다.

경시광지자,[景是光之子],ㅡ경종은 광종의 아들인데.
칠재작천리,[七載作天吏],ㅡ7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유계득추봉,[有繼得追封],ㅡ이음이 잇으면 추봉을 받았으니.
조자대안시,[祖子戴安是],ㅡ태조의 아들 대종과 안종이 그들이다.

대자왈성종,[戴子曰成宗],ㅡ대종의 아들이 성종인데.
임헌십칠사,[臨軒十七祀],ㅡ왕사위에 임한 것이 17년 이었다.
경자목십삼,[景子穆十三],ㅡ경종의 아들 목종 13년.
김치양요자,[金致陽요姿],ㅡ김치양은 음란방자했다.

강조서경래,[康兆西京來],ㅡ강조가 서경에 오니.
안지현종기,[安子顯宗起],ㅡ안종의 아들 현종이 일어났다.
중흥이십삼,[中興二十三],ㅡ중흥하여 이십삼년,
후유왕성사,[後有王聖嗣],ㅡ뒤에 어진 임금이 왕위를 이었다.

덕하지사년,[德何止四年],ㅡ덕종은 어지하여 4년에 그쳤는가.
채우래정서,[彩羽來呈瑞],ㅡ봉황새가 날아와 상서를 바쳤다.
정형십삼추,[靖亨十三秋],ㅡ정종은 십삼년을 누리었다.
국가한무사,[國家閑無事],ㅡ국가가 한가하여 별 일이 없었다.

문삼십팔년,[文三十八年],ㅡ문종는 삼십팔년을 누리 었다.
사방가기취,[四方歌旣醉],ㅡ사방이 노래하여 취하였다.
문자순사삭,[文子順四朔],ㅡ문종의 아들 순종은 넉 달 동안이었고.
기제선일기.[其弟宣一期],ㅡ그 아우 선종은 십 이년을 누리었거.

선자헌이년,[宣子憲二年],ㅡ선종의 아들 헌종은 2년을 누리고.
양향숙종위,[讓向肅宗委],ㅡ숙종에게 양위하여 맡기었다.
뭄자숙응도,[文子肅膺圖],ㅡ문종의 아들 숙종이 왕위를 받아.
십일년공기,[十一年恭己],ㅡ십일년 동안 몸을 공손히 하였다.

숙자에십팔,[肅子睿十八],ㅡ숙종의 아들 에종 십팔 년을 누리였다.
조야다기사,[朝野多奇士],ㅡ조야에 기이한 선비가 많았다.
예자인오오,[睿子仁五五],ㅡ에종의 아들 인종은 오십오년을 누리었다.
견핍자겸이,[見逼資謙李],ㅡ이자겸에게 핍박을 받았다.

인자의명신,[仁子毅明神],ㅡ인종의 아들 의종과 명종 그리고 신종이.
즉조서린차,[卽祚序鱗次],ㅡ차례로 왕위에 나섰다.
의향이십오,[毅享二十五],ㅡ의종은 이십오년을 누렸는데.
정충보화시,[鄭忠輔禍始],ㅡ정충보의 화가 시작되어.

의관위회진,[衣冠委灰塵],ㅡ문신이 잿더미로 되었다.
지금설경계,[至今說庚癸],ㅡ지금 경계의 난을 말한다.
경대승주흉,[慶大升誅凶],ㅡ경대승의 흉도를 베었으니,
이의문도피,[李義門逃避],ㅡ이의문은 도망하여 피하였다.

비부아명단,[悲夫我命短],ㅡ슬프다 우리 명이 짧아.
치이부래사,[致爾復來肆],ㅡ저것이 다시 와서 방자하게 되었다.
기이십삼년,[期二十三年],ㅡ명종은 이십삼년을 누리었다.
견손죄재이,[見遜罪在爾],ㅡ페위를 당한 것은 그 죄가 자신에게 있다.

이악기일시,[爾惡豈一時],ㅡ자시의 죄악이 어찌 일시적인 것이랴.
권신기하자,[權臣起何自],ㅡ권신이 어디로서 일어나는가.
신어팔성숙,[神御八星宿],ㅡ신종은 8년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었고.
기자희역이,[其子熙亦爾],ㅡ그 아들 희종도 역시 그러하였다.

희후명종주,[熙後明宗胄],ㅡ희종뒤의 명종의 아들이.
자자향천의,[子子享天意],ㅡ대대로 하늘의 뜻을 받았다.
강삼후고종,[康三後高宗],ㅡ강종이 3년 동안 임금자리에 있는 뒤에.
사십칠년리,[四十七年理],ㅡ고종이 사십칠년을 다스렸다.

원림십육년,[元臨十六年],ㅡ원종은 십육년 동안 임금 자리에 있었는데.
임연중폐치,[林衍中廢置],ㅡ임연이 중간에 폐위 시켰다.
시시금페하,[是時今陛下],ㅡ이 때 지금의 페하께서는,
춘궁정영위,[春宮挺英偉],ㅡ동궁으로서 영특하고 위대하였다.

왕빙어중조,[往聘於中朝],ㅡ중국조정에 가서 문안하여.
국미양하이,[國美揚遐邇],ㅡ나라의 아름다움을 널리 드날리었다.
환급압강두,[還及鴨江頭],ㅡ다시 압록강에 이르러,
풍표경천이,[風表傾天耳],ㅡ풍표가 천이를 기울였다.

견인편추구,[遣人遍推求],ㅡ사람을 보내어 두루 구하였다.
심득고주사,[尋得告奏使],ㅡ고주사 곽여필을 찾아 얻었다.
반패고찬황,[返패告天皇],ㅡ다시 들어가 천황께 아뢰었다.
숙숙승병위,[肅肅承兵衛],ㅡ엄숙하게 군사호위를 받았다.

징문난소유,[徵問亂所由],ㅡ난이 일어난 까닭을 불러 물으니.
원묘부신기,[元廟復神器],ㅡ원종이 신기를 회복하였다.
세사재건곤,[勢似再乾坤],ㅡ형세는 세상이 다시 만들어진 것 같고.
사미논순치,[事未論脣齒],ㅡ일은 위급함을 의논할 수 없었다.

진패재순유,[晉覇在巡遊],ㅡ진 문공의 패업은 순유함에 있었고,
순공창력시,[舜功彰歷試],ㅡ순임금의 공은 고루 시험한 데서 나타났다.
심승리강총,[尋承釐降寵],ㅡ조금뒤 하가의 은총을 입었으니.
성의빈왕리,[盛矣賓王利],ㅡ성하다 빈복한 왕가의 이익이여.

궁행거진효,[躬行居震孝],ㅡ몸소 장남이 된 효도를 행하여.
응수당리지,[膺受當리祉],ㅡ남족으로 면하는 복록을 받았다.
밀물계풍운,[密勿啓風雲],ㅡ천자의 옆에 있어 풍운을 열고.
우근천경위,[憂勤闡經緯],ㅡ근심하고 부지런하여 경륜을 널리 나타냈다.

천매리궁위,[天妹理宮위],ㅡ공주는 궁위를 다스리고.
제손작저이,[帝孫作儲貳],ㅡ황제의 외손은 세자가 되었다.
조업갱휘강,[祖業更輝光],ㅡ조종의 기업은 다시 빛나고.
황은원점지,[皇恩遠漸漬],ㅡ황제의 은혜는 멀리 젖엇다.

청사송강재,[靑史頌康哉],ㅡ청사에는 편안한 것을 찬양하고.
창생가락지,[蒼生歌樂只],ㅡ백성들은 즐거움을 노래 할 뿐이다.
유원억만년,[惟願億萬年],ㅡ오직 원하노니 억만년 동안.
장수부여귀,[長守富與貴],ㅡ이 부귀를 오래 동안 지켜가소서.

양당진한주,[梁唐晉漢周],ㅡ양나라와 단나라,진나라와 한나라 그리고 주나라.
송금개시비,[宋金皆矢비],ㅡ송나라와 금나라는 모두 고삐를 잃엇다.
역원어군민,[歷遠御群民],ㅡ오래도록 많은 백성을 통치한.
인방능유기,[仁邦能有畿],ㅡ어진 나라가 몇이나 잇엇더냐.

자경봉명시,[自慶逢明時],ㅡ밝은 때를 만난 것을 스스로 경사로 삼아서.
신승휴근기,[臣承休謹記],ㅡ폐하의 신하 이승휴는 삼가 기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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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관노 가면극」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관노들이 가면을 쓰고 추는 성황신제 계통의 탈춤을 중심으로 강릉 단오제 때 행하는 민속극.


[개설]
「강릉 관노 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구한말까지 강릉부에 속했던 관노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매년 단오 때마다 관노들이 놀이판에 직접 참가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무언극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강릉 관노 가면극」은 조선시대의 다른 가면극처럼 풍자가 혹독하지 않고 춤과 동작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를 통한 화해와 사랑, 시시딱딱이를 통한 벽사의식, 장자마리의 풍요추구 등 성황신제 계통극의 전형성을 갖추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강릉의 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관노라는 신분에 있다는 사실이 공개됨에 따라 전승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구한말 개화 이후 관노가 없어진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관노 가면극이라고 호칭함으로써 그들의 신분이 공개되었고, 따라서 연희를 기피했던 것이다. 강릉의 향토지인 『증수 임영지(增修臨瀛誌)』에 의하면 관노방이 8칸, 관노가 20명 있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도 대부분의 관노들이 여기에 참여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무속 관련 일에도 관여했던 이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문화재인 김동하, 차형원은 자신들이 관노였다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다가 결국 이를 시인했다. 이들이 스스로 실토한 이야기가 오늘날 「강릉 관노 가면극」의 복원에 절대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강릉의 가면극에 관노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일제 강점기 때에 경성 제국 대학에 교수로 있던 추엽융이 1928년 강릉 지역을 답사한 뒤 당시에는 전승이 끊긴 탈놀이를 산대희라고 하면서 『일본 민속학지』 2권 5호에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물론 강릉에 탈놀이와 비슷한 것이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幷書)」에서 “계묘년(선조36, 1603)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을 맞이한다 …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을 위한 잡희(雜戱)가 베풀어 졌다고 한 것을 보면 강릉 탈놀이의 시원이 이러한 잡희에 있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 유추된다. 실제로 여러 문헌에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잡희를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강릉의 향토지 『증수 임영지』에 언급된 창우배(倡優俳)의 잡희는 무당들의 풍악과 구별되는 가면극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창우배는 가면을 쓰고 노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면 강릉 가면극은 허균이 언급한 잡희로부터 출발하여 창우배로, 다시 가면극으로 어휘가 바뀌면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과연 허균이 보았던 잡희와 오늘날의 가면극이 같은 것인지에 관한 의문이 남지만 이러한 역사를 가진 강릉의 가면극은 소급해보면 17세기 중엽부터 단오제에 전승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가면극은 일제 강점기 때에 추엽융이 조사할 당시에도 전해지지 않았으며 1966년 무렵 임동권이 조사할 때에도 이 탈놀이는 전승되지 않았다. 한일합방을 전후한 때를 현재 가면극이 마지막 상연된 시기로 추정한다. 심일수의 문집인 『둔호유고(遯湖遺稿)』에는 융희 3년(1909) 일본인들에 의해 무격희가 폐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추엽융은 갑오개혁(1894) 이래 맥이 끊어져 볼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임동권 교수에 의해 가면극 연희자로 파악된 김동하가 1966년 당시 84세, 차형원이 당시 78세로 이들은 각각 21세와 17세 때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회고했다.

임동권 교수는 1960년 7월 24일에 1차 답사를 하였으며, 1964년에 2차 답사, 1966년 6월 20일에 3차 답사를 했다. 임동권 교수는 김포에서 비행기로 북평 비행장에 내려가 강릉까지 자동차로 이동하여 대한여관에 투숙하였다. 이때에 당시 향토사가인 최선만, 홍덕유 교육장, 된장 회사 사장 남기의와 함께 대창역을 답사하였다. 1966년 6월 22일 저녁, 가면극에 대한 확증을 잡고 6월 23일 대한여관에서 녹음을 실시했다. 당시 교육 위원회에서 협조를 해서 교육 위원회 직원과 제보자인 차형원[79], 김동하[84], 장대연[88], 최재분[77.무가 제공], 홍재옥[60.오독떼기 제공], 최인수[68.집례맡은 사람], 우동식[80], 함종태[58], 방정자[49], 최돈순[53], 입암동 박씨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동하 옹은 21세, 차형원 옹은 17세 때 「관노 가면극」을 강릉 단오제 공연 때 보았다고 하며, 장대연 무녀는 18세 때 그 춤을 마지막으로 본 것으로 기억하였다. 이러한 언급을 고려하면, 1966년 당시로부터 62년 내지 63년 전에 「관노 가면극」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동권 교수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1967년 1월 16일에 「강릉 관노 가면극」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67년 7월 20일에 4차 답사를 하여 관노가면을 제작하였는데 당시 중앙 대학교 조각과 윤영자 교수와 함께 삼흥여관에 투숙하면서 강릉 여자 고등학교에 보관중인 최상수 씨가 만들었던 가면을 인수하였고, 함종태 씨의 조언과 김동하, 차형원 옹의 고증으로 윤영자 교수가 석고로 가면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동하 옹과 차형원 옹은 강릉 여자 고등학교에 보관되었던 가면이 원형에서 거리가 멀다고 하였으나 임동권 교수의 언급에 의하면 두 노인이 석고로 만든 것을 보고 “그만하면 쓰고 놀 수 있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는 석고로 만들어진 탈들이 김동하, 차형원 옹의 회고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작상의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시시딱딱이탈의 경우는 입이나 코, 색상 등 전반적인 인상구현에 있어서 고증한 내용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이 지적된다. 이러한 차이점은 강릉 지역에서 출토된 망와와 대비한 글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1900년 초기에 사라졌다가 1965년 10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서울 덕수궁 뜰에서 행해진 제6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강릉 성황신제 관노 가면희’라는 이름으로 강릉 지역 출신의 정의윤 선생이 도교육감의 추천 하에 춘천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쳐서 참가, 장려상을 받으면서 탈놀이가 부활되었다. 당시 「강릉 관노 가면극」은 전국민속경연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처음 출전하여 부활되었는데 초창기 이 일에 참여한 것으로 언급되는 최상수 씨는 발굴과 재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음력 5월 5일 강릉에서는 단오굿 할 때에 주로 관노들의 놀음으로 탈놀음(假面戱)이 있었으니 이조말기 경술국치(國恥)되던 해까지 연출되었었다. …[중략]… 탈놀음은 하나의 여흥으로서 주로 강릉부에 소속되어 있는 관노(官奴)들이 5월 5일에 사창(社倉)앞의 넓은 광장에서 얼굴에 탈을 쓰고 또 가장을 하여 한 바탕 놀음을 노는데 오전 11시경부터 저녁때까지 행한다. 이때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수수댁, 소무(小巫)각시, 양반, 장자말이로 이들이 번갈아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약간의 재담(才談)이 있으나 주로 춤이 위주이다.”

최씨에 의하면 1964년 이 글을 발표하고 가면희를 부활했으며 1965년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출연했을 때 해설문을 발표하고 또한 그 해 『중앙일보』 10월 12일자에 ‘강릉 성황신제 가면희의 부활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1942년부터 1962년 되던 해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 강릉 지역 민속을 조사하여 이 탈놀음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이 탈놀음에 대해서 대부분의 강릉 지역 인사들도 그러한 탈놀음이 자기네 고장에 있었던 것조차도 아는 이가 거의 없었고 다만 나이 많은 몇몇의 노인들만이 소년 시절에 보았다는 이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회상하였다.

최상수 씨가 조사한 대상은 1942년과 1958년 당시 강릉에서 김도수(金度洙)[강릉군 강릉읍 홍제리, 1942년 7월 조사], 김돌이(金乭伊)[강릉읍 초당리, 1942년 7월 조사], 김동하(金東夏)[강릉읍 교동리, 1958년 7월, 1964년 8월 조사] 씨가 있었는데 이들의 말을 참고하여 서울에서 조각하는 사람에게 위촉하여 만들었다. 당시의 등장인물로 시시딱떽이[수수댁], 소매각시(小梅각시), 양반, 장자말이라 했는데 그 이전 1928년 추엽융 조사에서는 양반광대(兩班廣大), 소무각시(少巫閣氏), 시시딱딱이, 장자말이로 기록되었고 『조선 총독부 생활 상태 조사 보고서』에도 양반광대, 소매각시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린 바가 있다. “양반광대는 창우(倡優)로서 얼굴에 찰(札)[나무를 가지고 사람 상을 만들어 분장하여 장식하는 것]을 걸고, 머리에는 꿩 깃을 만든 뿔 모양의 관을 쓰고, 손에는 큰 그림부채를 쥐며, 몸에는 보통과 다른 옷을 입고, 무용 등을 한다. 소매각시는 창녀(倡女)로서 찰, 부채, 복장은 전자와 약간 달라도 춤은 같다.”

차형원 옹의 언급에 의하면 “그 재담이라는 거는 서루 말을 통하는 거 보담도 그 탈을 씨고 앉아서 서로 찝쩍거립니다. 가서 이렇게 서로 댕기고, 이래 서로 보고 이래, 취미로 그 이래지 뭐 뭔 사전에 뭔…” 이렇게 대사가 없다보니 효과적인 몸짓언어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탈놀이의 반주음악은 비교적 소상한 고증이 남았는데 차형원 옹은 날라리, 장구, 꽹새, 징 등을 오음육율에 따라 쳤다고 하였다. 이 탈놀이에 소요되는 시간은 고증에도 한 두어 서너 시간이며 대체로 더운 절기에 행해지므로 놀다가 더우니까 그 탈바가지를 벗어 놓는다 하였다. 여러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강릉 관노 가면극」은 무언극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거나 약간의 재담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이 부분은 인간문화재의 고증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1965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1966년 문화재지정자료가 작성되고 1967년 1월 16일 강릉 단오제의 한 종목으로 가면극이 인정되어 무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되어 확고한 전승체계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60여 년 간 잠자고 있던 탈놀이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강릉 여자 고등학교, 강릉교육대학교가 이를 전수했고, 1976년부터 강릉 여자 고등학교와 관동대학교가 전수 받고, 1990년부터 강릉 원주 대학교에서 이 놀이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임영회, 경포 초등학교 등에서 전수를 받고 있다.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강릉 관노 가면극」을 강릉시 유천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1983년 2월부터 지도하여 1993년 8월 2일 기예능 보유자로 권영하(權寧夏)[1918년 6월 4일생, 작고]가 지정되었고 뒤를 이어 김종군(金鍾群)[1942년 3월 5일생]이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앞서 여러 단체에서 사용한 탈이나 놀이내용의 고증이 미흡하다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됨에 따라 현재는 1966년 김동하 옹과 차형원 옹이 제보한 고증과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연희를 충실히 복원하여 전수하도록 애쓰고 있다.


[구성]
탈놀이의 내용은 고증 내용에 따라 놀이마당을 분류하면 대체로 다섯 마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장자마리 개시, 둘째 양반광대 소매각시 사랑, 셋째 시시딱딱이 훼방, 넷째 소매각시 자살 소동, 다섯째 양반광대 소매각시 화해이다.

(1) 첫째 마당 : 탈놀이 시작과 함께 먼저 포대자루와 같은 포가면을 전신에 쓴 두 명의 장자마리가 연희를 개시한다. 요란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불룩한 배를 내밀면서 놀이마당을 넓히기 위해 빙빙 돌아다닌다. 관중을 희롱하기도 하고 선 사람을 앉히기도 하며 모의 성적 행위의 춤도 춘다. 옷의 표면에는 말치나 나리 등의 해초나 곡식을 매달고, 옷 속에는 둥근 대나무를 넣어 불룩하게 나오도록 한다. 장자마리는 희극적인 시작을 유도하며 마당을 정리하고 해학적인 춤을 춘다.

(2) 둘째 마당 : 장자마리가 마당을 정리한 후 양반광대와 소매각시가 양쪽에서 등장한다. 양반광대는 뾰족한 고깔을 쓰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고 위엄 있게 등장하여 소매각시에게 먼저 사랑을 구한다. 소매각시는 얌전한 탈을 쓰고 노랑 저고리 분홍 치마를 입고 수줍은 모습으로 춤을 추며 양반광대와 서로 뜻이 맞아 어깨를 끼고 장내를 돌아다니며 사랑을 나눈다.

(3) 셋째 마당 : 시시딱딱이는 무서운 형상의 탈을 쓰고 양쪽에서 호방한 칼춤을 추며 뛰어 나온다.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에 질투를 하며 훼방을 놓기로 모의하고 때로는 밀고 잡아당기며 훼방하다가 둘의 사이의 갈라놓는다. 시시딱딱이는 무서운 벽사가면을 쓰고 작은칼을 휘두르며 춤춘다.

(4) 넷째 마당 : 시시딱딱이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 사이를 갈라 한쪽에서는 양반광대와 놀고 다른 편에서 소매각시를 희롱하며 함께 춤추기를 권하나 소매각시는 완강히 거부한다. 이를 본 양반광대는 크게 노하며 애태우나 어쩔 수 없어 분통해하다가 시시딱딱이를 밀치고 소매각시를 끌고 온다. 소매각시가 잘못을 빌어도 양반광대가 질책을 계속한다. 소매각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는 구실로 양반광대의 긴 수염에 목을 매려고 한다. 수염에 목을 매어 죽으려는 소매각시의 결백호소에 양반광대는 놀라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소매각시를 용서한다. 결국 소매각시는 결백을 증명한 셈이 된다. 수염으로 목을 감는 모습은 해학적인 표현임과 함께, 권위의 상징인 수염을 당기어 결백을 오히려 시인케 하는 내용은 죽음 의식을 초월한 희극화된 표현이다.

(5) 다섯째 마당 : 수염을 목에 감고 자살을 기도하여 결백을 증명하려 했던 소매각시의 의도는 양반광대의 관용과 해학으로 이끌어져 서로 오해가 풀리고 결백이 증명되므로 탈놀이는 흥겨운 화해와 공동체 마당으로 끝을 맺는다. 악사들과 괫대, 구경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춘다.


[가사]
「강릉 관노 가면극」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무언극이다.


[내용]
등장인물은 모두 개성이 강하게 표출되는데 「강릉 관노 가면극」에는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으로 총 6명이 등장한다.

먼저 양반광대는 호색 풍자나 어리석음을 희화화(戱畵化)하기 위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양반광대의 광대(廣大)는 『고려사(高麗史)』124권 「전영보전(全英甫傳)」에 “우리말로 가면을 쓰고 노는 자를 광대라 한다”는 언급과 같이 탈놀이하는 연희자를 일컫는다. 특히 일본인 추엽융의 1928년 조사에서 양반광대가 쓰고 나오는 변(弁)은 호랑이 수염이 달린 가면에 긴 뿔이 있는 관을 쓴다고 하였고, 1931년 생활상태조사 보고서에서도 머리에는 꿩 깃으로 만든 뿔 모양의 관을 쓴다 하였다. 차형원 옹은 정자관을 썼다고도 하나 여러 고증에 뿔 모양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나장(羅將)이 쓰던 깔대기 전건(戰巾)이었거나 고구려인이 썼던 절풍건(折風巾)일 가능성이 크다. 『증수 임영지(增修 臨瀛誌)』는 나장의 전건을 소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중국 귀주 산간지방의 나례(儺禮)에서 양반광대의 것과 같은 모양의 흑백 고깔을 쓰고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양반광대 역시 나례인물로 짐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소매각시는 양반의 상대역으로 호색을 풍자하기 위한 인물로 표상된다. 소매각시에 대한 오해는 소무각시라고 기록한 추엽융의 강릉 단오제 조사보고서에서 비롯된다. 소매각시를 무녀로 파악하기도 하였으나 추엽융은 소무각시(少巫閣氏)라고 썼지만 괄호 안에 영어로 ‘Somai’(소매)라고 적어 놓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소매가 나오며, 유득공[1748~?]의 『경도잡지』에는 “小梅亦古之美女名(소매는 역시 옛 미녀이름이다)”이라는 내용과 “閣氏者東語女子也(각씨는 우리말로 여자이다)”라는 내용을 방증자료로 삼은 바가 있다. 따라서 강릉 가면극의 소매는 나례의 의식에 나오는 소매(小妹, 小梅)를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시딱딱이는 수수댁, 시시딱떽이, 시시딱대기, 시시닦덕기, 수수딱때기 등으로도 나타나는데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추엽융의 조사에서 방상씨(方相氏)의 가면과 같은 무서운 목제가면을 쓴 것으로 나타나고 인간문화재의 고증에서도 방상씨가 언급된다는 점, 그리고 ‘쉬시 쉬시’하면서 등장한다는 점과 딱딱이패가 놀이패를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시시’라는 축귀어(逐鬼語)에 딱딱이가 합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최상수의 고증과도 일치한다. “이 가면희(假面戱)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 그 어의(語意)가 불분명한 것이 있으니, ‘시시딱떽이’이다. 이 말을 그 지방 노인(老人)들도 무슨 말인지 그 말뜻은 모른다. 나의 생각으로는 쓰고 나오는 이 가면(假面)이 방상씨(方相氏) 가면(假面)인 것으로 보아 ‘시시(쉬쉬)’와 ‘딱떽이’가 복합(複合)된 말로서, 시시딱떽이란 이 가면(假面)을 쓰고 사방의 사귀(邪鬼)를 쫓아내는 구나(驅儺)때에, 방망이를 쥐고 이곳 저곳을 “시(쉬)- 시(쉬)”하고, 또 방망이로 이곳저곳을 딱딱 때리는 것이므로 ‘시시딱떽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 인물은 벽사의 역할을 하며, 전염병을 예방하는 뜻으로 잡귀를 쫓기 위해 오방색 탈을 쓰고 방망이 또는 황토를 칠한 칼을 들고 나타난다. 시시딱딱이가 들고 나타나는 것이 방망이냐 칼이냐 하는 문제는 김동하, 차형원 옹의 고증상에는 분명히 분홍색 칠을 한 칼을 들고 나타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조선의 향토오락』에서도 강릉 지방의 「오광대놀이」라고 소개하면서 목제인형을 만들어 노는 것이 전염병예방을 위한 것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단오 무렵 질병을 구축하기 위한 상징적 나례의식으로도 파악된다.

장자마리는 장자말, 장재말이라고도 하는데, 양반을 뜻하는 장자(長者)의 하인인 마름이 합성된 것으로 유추된다. 양반광대를 해학적으로 만들며 놀이를 희극화하는 인물로 회청색 포대를 뒤집어쓰고 불룩한 배를 만들어 이것을 돌리면서 무대를 넓히고 관중을 웃긴다. 옷의 색깔은 땅과 바다를 연상케 하고, 옷의 표면에 곡식의 줄기인 나리나 해초인 말치 등을 매달고 나와 풍농어를 기원한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포대가면은 하회별신극의 주지, 통영 오광대의 중광대처럼 신앙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일본 오키나와의 신가면이나 경우에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따라서 강릉가면극의 등장인물은 명칭이나 형태에서 나례의 기능인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러한 신앙적 기능은 탈놀이의 원초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의 춤사위를 고증한 내용을 바탕으로 추려내면, 장자마리의 춤사위는 소위 ‘마당딱이춤’이다. 마당을 닦듯이 추는 춤이라는 뜻인데 매우 독특하다. 이와 함께 ‘도리깨춤’을 춘다. 배불뚝이 모습으로 도리깨를 쳐내듯이 마당을 넓게 하려는 의도로 추는 춤이다. 차형원 옹의 언급대로 “장자마리가 맨 먼저 나와서 그 참 마당땍이야. 전부 그 노는 장소를 한 번 멀리도 맨들어 놓고 좁으면 저리 좀 피해라고 사방 이렇게 물려서 널찍하게 이렇게 맹글어 놓고…그거는 보통 그 참 누구 말마따나 마뎅이, 그전 옛날 마뎅이 할 때 도리깨 쳐내듯이”라고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춤사위로 고증에는 점잖게 추는 ‘맞춤’과 ‘어깨춤’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춤은 반드시 대무(對舞)인데 남자는 소매를 펄럭이고 여자는 손을 뒤집는다”는 표현과 일치한다. 즉 차형원 옹은 “나가서 우선 발 드는 것이 저짝 여자는 왼짝을 듭니다. 남자는 가서 인제 오른짝을 들고 나갑니다. 인제 서로 좌우에 갈라서서 서로 춤을 추고 걸음걸이도 함부덤 안 걸었습니다. 아주 이렇게 자욱을 곱게 이렇게 참 떼어놓으며 춤을 추고 이렇게 딱 마주합니다. 해 가지고는 서로 돌아가고...”라고 묘사하고 있다.

시시딱딱이 춤사위는 가면극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데, 무서운 탈을 쓰고 칼을 휘둘러 재앙을 쫓는 ‘칼춤’과 사랑놀음을 훼방하는 ‘제개는춤’ 그리고 소매각시를 유혹하는 ‘너울질춤’을 춘다. 차형원 옹은 “아 그 험한 탈을 쓰고 거기 가서 인제 가꾸 제갭니다. 이리두 찝쩍, 저리두 찝쩍”한다고 묘사했고, 김동하 옹은 “벌건 저 버드낭그로써 깎아서 뻘건 칠을 해서 지레기 요만큼 해서 들었지요. 그 속에서 들고 있다가 그저 이렇게 휘 둘르고 추고 이러니 그 칼이 이러니 가끔 불쑥불쑥 나오더구만요.”라고 묘사했다.

차형원 옹의 고증에는 날라리, 꽹과리, 북, 장구, 징 등을 사용했고 무당들이 반주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관련 의례]
강릉 가면극은 주로 음력 5월 5일 단오 무렵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강릉 관노 가면극」 연희자였던 김동하(金東夏)[1884년 1월 22일생], 차형원(車亨元)[1890년 9월 5일생]씨를 대상으로 조사된 1966년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음력 5월 1일 본제가 시작될 때 화개(花蓋)를 만들고 이때부터 연희가 이루어져 4일과 5일에 걸쳐 이어졌다고 한다. 추엽융의 조사에도 5월 1일 본제 때부터 화개를 꾸미고 가면극을 했는데, 화개는 부사청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면극은 4일 날 대성황사 앞에서 놀고 5일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연희장소는 강릉 남대천 변이 아니라 대성황사를 비롯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는데 음력 5월 5일에는 오전 대성황사 앞에서 먼저 행하고 다음에는 화개를 받들고 약국성황당, 제관청, 여성황당의 순으로 순례하며 탈놀이를 했다. 현재는 여성황당을 제외한 나머지 장소가 없어졌기 때문에 남대천 단오터에서 4일간 연희하고 있다.


[현황]
「강릉 관노 가면극」은 관노들에 의해 추어진 탈놀이다. 관노들이 단오제 행사에 참가하였음은 물론 제관 중에 삼헌관으로 관노가 있었고 관노가 앞에서 태평소를 불며 일행을 이끌었던 것 등을 보아 관노들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 때 공식적으로 공사노비법이 혁파된 후 전승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1909년경에는 중단되었다. 대략 6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당시의 연희자들을 찾고 고증을 하여 「강릉 관노 가면극」은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연희자였던 김동하·차형원의 고증과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성황제 탈놀이로 강릉 탈놀이는 다시 정립되었다. 이제는 관노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어졌고 신분상의 제약이 연희의 활성화에 지장을 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 지역의 유천동 연희자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강릉 관노 가면극」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무언극으로 마을 축제에서 행해진 성황신제 가면극이다. 구한말까지 행해지다가 관노제의 폐지로 중단되었으나 1967년 국가 지정 무형 문화재13호로 지정되면서 부활하였다. 한국가면극의 토착적 시원을 보여주는 무언극으로 강릉 단오제의 의미를 구현하는 연희로 평가받고 있다.

앞으로 동해안 무속춤이나 강릉농악 춤사위를 보다 폭넓게 원용하거나 같은 부류에 들어가는 하회 성황제 탈놀이의 춤사위도 활용한다면 춤사위가 풍부하게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장자마리의 춤은 신앙적 행위로 신비로운 벽사춤이 되어야 할 것이고, 양반광대와 소매각시는 어깨춤을 중심으로 한 허튼춤을 꾸준히 추면서 성적인 매력을 위시하며 극적 내용을 몸짓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시시딱딱이 춤은 본격적인 검무가 나와야 할 것으로 지적되는 것은 타당하다.

아울러 장단도 단조로운 강릉 농악 장단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구한말 악공들이 연주했던 춤가락을 활용하고 강릉 무속 음악을 원용하는 방안도 강구되어야 하겠다. 그것은 관노 중에 무격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탈놀이와 무격희를 대성황당이나 여러 곳을 함께 순례하면서 행했던 이유에서도 기인한다. 따라서 반주 음악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무속 음악을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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