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척 지명의 유래(1)

1980년 삼척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하여 동해시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고

1981년에는 장성읍과 황지읍이 통합되어 태백시로 승격되어 삼척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동해'와' 태백'을 떼어 주면서도 정작 삼척은

1986년에야 삼척읍이 삼척군에서 분리되어
삼척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는 삼척군을 흡수하여 통합 삼척시로 바뀌었다


삼척 지명의 유래

 

 

삼척三陟이란 지명의 속풀이는? 석삼三 오를척陟, 글 뜻대로 세번 오른다는 삼척三陟 입니다.

그 세번 오름은 삼척의 강성기 3번,신라왕이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세곳,

실직悉直을 한자 음독상 고처 쓴 삼척三陟으로 해석이 있습니다.

(출처 : 다음카페 및 삼척시립 박물관)


1) 세번의 번영

『삼국사기』권35 지리 제2항.실직국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망,

그 이전은 실직국이 번영을 누린 강성기.

② 해방후 70년대 이전 삼척은 산업자원의 보고로, 남한 최대 중공업도시로,

한국 경제성장 밑거름의 시대.

lng기지,종합발전단지 등 한국에너지 중심도시에서 동북아 에너너지

핵심도시로 비약하는 현 시대.


2)

태백산 오르는 길이 세가지!

『삼국사기』에 138년 신라의 일성이사금왕이 태백산에서 친히 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삼척에서 신라의 왕이 산제를 위해 태백산으로 오르던 길이 세곳 중의 하나 이다.

지금의 오십천,북평 전천,근덕 마읍천 중 한 길 이다.


3) 심의승의 『삼척군지』1916

삼척三陟은 실직悉直을 한자 음독상 고처 쓴 것이다.세

개의 직곡直谷 즉 지금의 오십천五十川인 장직곡長直谷,북평 전천箭川인 북천직곡北川直谷,

근덕 마읍천麻邑川인 마읍천직곡麻邑川直谷을 가진 곳이라 해석 했다.

실직과 삼척은 같은 의미이고,세개의 하천을 끼고 있는 곳이 삼척이다.

현재까지의 학자들의 연구로 보아 삼척지명의 유래는 심의승의 견해가 맞다.


덧붙여,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못나도 잘난 척이라서 삼척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습니다

 

 

 

* 삼척 지명의 유래(2)

 

삼척은 신라 때는 올곧은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실직(悉直)1)에서 꼭 지켜야만 할 땅이라는 북진(北鎭)2)으로 바뀌더니 고려 때는 오름의 땅이라는 척주(陟州) 그리고 따로 보배로운 땅이라는 진주(眞州)라고 하는 곳3)이더니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숫자 三이 들어간 세 가지 오름4)의 땅 삼척(三陟)이라 하는 곳이다.

 

 

이곳은 한때 군(郡)의 넓이나 인구, 세수(稅收)규모가 남한에서 최고였다. 지금의 태백시와 동해시의 남부 북평 지역이 모두 삼척에 속했다. 남평이라 하지 않고 북평이라 함은 삼척을 기준으로 ‘뒤뜰’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짐작을 해보면 강릉이 ‘하슬라’로, 삼척이 ‘실직’으로, 두 지역은 국경도시로 북진과 남진을 시도하기 위한 동해안 전초기지로 서로 경쟁관계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를 나타내는 화강암으로 된 1.5M 높이 정도의 지줏돌이 부곡동 승지골에 가면 보인다. 향로봉과 송이고개로 이어지는 구릉에는 고구려 군사가 매복하고 평릉과 부곡에는 신라군사가 매복하여 국경충돌이 자주 벌어진 곳이다. 근처에 위치한 사문치라는 고개도 삼국통일 후 김유신이 死門峙에서 士文峙로 개명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삼척은 묵은 한 왕조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왕조가 창업의 꿈을 키운 예사로운 땅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의 외향이기 때문이다.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인 준경묘와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가 삼척에 있다. 전주지방 호족이었던 이안사가 기생 한 명을 두고 산성별감과 다투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몸을 숨겨 찾아온 첩첩산중인 삼척시 미로면 할기리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묘자리를 찾던 중 “여기다 소 백 마리를 잡아 개토제(開土祭)를 올리고 금으로 관(棺)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면 5대 후에 창업할 귀한 인물이 나올 명당이다”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고승의 말을 따라 백 마리의 소 대신에 하얀 소[白牛]와 금관 대신에 금빛 나는 마른 귀리 짚으로 관을 만들어 묻었다는 무덤이 이른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2년(1393년)에는 현에서 부(나중에 삼척도호부)로 행정구역의 격이 승격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려왕조가 마직을 고한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부자가 1차 원주에서 2차 간성을 거쳐 다시 이곳으로 3차로 유배된 곳인데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을 집행한 ‘살해재’가 ‘싸리재’ 또는 ‘사래재’가 있는 곳이다. 근덕면 궁촌(宮村 Kimgdom-village)에 가면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어명을 받은 사형집행관 일행이 사형을 집행하고 머리만 증거물로 가져가 버린 머리만 묻힌 무덤으로 추정되는 공야왕의 능이 있고, 경기도 고양에서도 공양왕의 능이 있다. 후손들이 능을 이장했다면 시신이 없는 빈 묘가 궁촌에 있는 것이요, 아니면 이곳에는 목이 없는 시신만 묻혔는지 모를 일이다.

 

또 삼척은 우리민족의 억눌린 기상이 펼쳐진 곳이다.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1224-1300)에 의해 두타산 천은사에서 고려 충렬왕 13(1287년)에 칠언시(七言詩)로 된 ꡔ제왕운기(帝王韻紀)ꡕ를 완성한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