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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휴(李承休)
출생지 / 성주
1224(고종 11)-13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이며,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 가리현(京山 加利縣 ; 지금의 경북 성주)출신으로 가리(加利) 이씨(李氏)의 시조이다.
그런데 이승휴는 부친을 일찍 여윈 관계로 외가인 삼척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그의 행적은 가리현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삼척에서만 대부분이 나타나고 있다. 이승휴는 1224년(고종 11)에 태어났다.
9세(1232)에 독서를 시작하여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당시의 명유(名儒) 신서(申?)에게서《左傳》과《周易》등을 익혔다. 14세(1237)에 부친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에게서 양육되었다.
그후 몽고군의 침입이 있자, 고려정부가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 들어가 최충(崔沖)의 사학(私學) 9재(九齋) 가운데 하나인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이규보(李奎報), 김창(金敞) 등에 의해 그동안 유명무실해진 사학(私學) 12도(十二徒)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는데, 이승휴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가 지은 병과시(病課詩)에 의하면, 한번은 낙성재 도회소에서 여러 학도들과 더불어 연회를 갖다가 그만 술에 취해 울고 말았는데, 이것을 기롱한 교도(敎導) 홍열(洪烈)의 시(詩)가 도하(都下)에 전파되어 주광(酒狂)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이승휴는 최자(崔滋)에게 지우(知遇)를 받게 되었다.
최자는 이규보의 대를 이어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친 인물이었다.
이승휴는 1252년(고종 39) 29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최자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주관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이승휴는 홀 어머니가 있는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1254년(고종 41) 몽고의 5차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자, 이승휴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삼척의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고군에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그후 강화도에 돌아가고자 해도 최자와 돌보아주던 종조모가 세상을 떠나 의지할만한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환도(還都)하지 못하고 삼척 두타산의 구동(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는 동안 최씨 무인정권은 무너지고 고려정부는 몽고와 강화하게 되었다.
이승휴는 40세가 되는 1263년(원종 4)에 당시 강원도 안집사(安集使)로 온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심(李深)의 주선으로 강화에 돌아가서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최윤개(崔允愷)·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최수황(崔守璜)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보내는 등 관직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도호부판관겸장서기(慶興都護府判官兼掌書記)에 보임되었다. 이후 1270년(원종 11) 삼별초가 봉기하자, 이승휴는 군의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이 크게 일어나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하였다.
1273년(원종 14)에는 식목녹사(式目錄事)로 있었는데, 당시 정부가 제배하는데 있어 초배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누차 제배받았던 인물들을 제외시키자 불만을 상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이것이 발각되어 문죄를 받게 되었을 때, 이승휴는 상소문의 기초자로 연루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원종(元宗)이 상부의 장의(狀意)와 방문(傍聞)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재조사를 시켜 누명이 벗겨졌는데, 이승휴는 양부(兩府)의 장론(狀論)에 실수의 오점을 남길 수 없다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하였는데, 그가 원나라에 가서 올린 진사선미(陳謝宣美)는 원나라의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으며, 동행하였던 송조국(宋祖國)도 '문장감중화자(文章感中華者)'라고 탄복하였다.
그후 이승휴는 원나라의 사행의 공으로 잡직서령겸도병마록사(雜職署令兼都兵馬錄事)에 보임되었다. 다음해에 이승휴는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는데, 그는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의 득실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그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충청도(忠淸道)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臟吏) 7인을 탄핵하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였다가 원한을 사서 동주(東州;지금의 철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이승휴는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 일컬었다. 그리고 얼마후 전중시사(殿中侍史)로 다시 임명되었다. 충렬왕은 즉위 초기에 문신 재추관료들과 결합하여 원나라 및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태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侍從)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승휴는 1280년(충렬왕 6) 감찰사(監察司)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를 간언했다가 파직되었다. 이승휴는 파면당한 뒤 다시 삼척의 구동(龜洞)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당호(堂號)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심용슬지역안(審容膝之易安)'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국사(國事)와 세론(世論)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자 하였으며, 도연명과 같이 전원의 일민(逸民)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고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이승휴는 <<帝王韻紀>>와 <<內典錄>>을 저술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선왕은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대다수 관료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기의 지지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
이에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 이전의 충렬왕 측근과 대립하였던 자들을 특별히 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휴도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충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 左諫議大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 試秘書監 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 判秘書寺事 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정치에는 충렬왕대에 국왕의 측근세력과 타협하면서 성장하였던 사람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이승휴는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구실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여 마침내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치사하였다.
그후 1300년(충렬왕 26)에 7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이사부(異斯夫)
출생지 / 미상
생몰년 미상, 신라 진흥왕대에 크게 활약한 장군·정치가, 일명 태종(苔宗). 내물왕의 4대손으로 지증왕이래 법흥왕·진흥왕대까지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이며 신라왕실의 중신이다. 505년(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悉直州)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이사부는 실직주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리고 512년에는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하였다.
원래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귀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사부는 계교로써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그 나라의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그들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541년(진흥왕 2)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당시의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요직의 하나였다. 그뒤 562년(진흥왕 23)까지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4년 왕에게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을 틈타, 이사부는 이 두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어 금현성 탈환을 위해 재차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의하면 549년(진흥왕 10) 전후에 이찬 이사부는 파진찬 두미(豆彌)와 아찬 비차부(比次夫)·무력(武力:김유신의 조부)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년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에 사다함(斯多含)이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 목 조(穆 祖)
출생지 / 전주
1274(원종 15),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본명은 이안사(李安社), 본관은 전주(全州), 장군(將軍) 양무(陽茂)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齊)의 딸이다.
목조는 전주의 토호(土豪)였는데,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지주(知州;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를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하여 가솔과 토착인 170여호를 거느리고 삼척(三陟)의 활기동(活耆洞)에 이주하였다. 여기서 1231년(고종 18) 5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노동(蘆洞)에 장사를 지냈고, 또 모친상을 당하여 동산(東山)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삼척에 이주해 온 이안사는 배를 건조하여 왜구를 방어하였으며, 1253년(고종 40) 몽고의 4차 침입에 대항하여 두타산성에서 항전하였다. 그런데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에 이곳에 부임하는 안렴사(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 있을 때 산성별감이었음으로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함길도(咸吉道)의 의주 용주리(宜州 湧州里) 곧 지금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 따라온 170여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는데, 고려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그뒤 원나라가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안사가 머물고 있던 의주도 이에 소속되었다. 따라서 이안사가 와서 그가 거느린 집단은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에 편입되어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남경(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여진족까지 다스리면서 그 세력 기반을 대를 이어 물려 주어 증손 이자춘(李子春 ; 桓祖)까지 몽고의 벼슬을 하였다. 그의 능은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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