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종택 보림출판사 대표가 지난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그림책카페 ‘노란우산’에서 다양한 종류의 그림책을 선보이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처음 책장을 폈을 땐 한 장의 그림인 줄 알았는데, 책장을 넘겨보니 배경이 되는 그림 앞에 섬세한 무늬를 오려낸 종이가 겹쳐 있었다. 섬세하게 오려낸 종이는, 공주의 치마 주름이 되기도 하고 거대한 창살이 되기도 한다. 오려낸 종이 수십장이 겹쳐져, 종이 한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던 입체감을 표현해내기도 한다.
“종이를 이렇게 1㎜ 단위로 섬세하고 가늘게 오려낼 수 있는 건, ‘레이저커팅’이라는 첨단 기술 덕택입니다. 지금, 이전과는 다른 그림책의 새로운 장르가 시작되고 있어요. 시대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책에도 진화가 필요합니다.”
지난 25일 서울 상수동의 그림책 카페 ‘노란우산’에서 그림책 전문 출판사인 보림출판사(보림)의 권종택(71) 대표를 만났다. 권 대표는 1976년 보림을 창업해 여태까지 그림책 외길을 걸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그림책 출판인이다. 보림이 운영하는 카페 ‘노란우산’에는 그동안 출간해온 책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어, 마치 알록달록한 그림책 세상에 발을 디딘 듯한 느낌을 준다. 고개를 들어보면, 계산대 위쪽에 보림의 경영철학을 드러내는 문구가 걸려 있다. “그림책은 0살부터 100살까지 보는 것이다.”
레이저커팅 기법으로 섬세하고 정교하게 종이를 잘라낸 그림책의 한 장면. 보림출판사 제공
최근 보림이 내는 책들을 보면, 과거 그림책을 좀 봤던 사람들이라도 적잖이 놀랄지 모른다. ‘컬렉션’이란 이름의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최근 나온 <프리다>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인생과 작품을 재해석한 그림들과 레이저커팅으로 섬세하게 잘라내어 배치한 페이지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나무들의 밤>(2012) 같은 경우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만든 독특하고 강렬한 나무들의 이미지를 마치 낱개의 작품처럼 담고 있다. 전체 2000권만 발행하여 각각의 그림책에 고유의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도 특징이다. 공들여 제작한 예술작품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며,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할 법한 그림책들이다. 시리즈 제목처럼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41년전 보림출판사가 태어났어요
작가 발굴·그림책 창작 몰두하며
볼로냐 아시아 최고상도 받았답니다
요즘엔 레이저커팅 기술로 오려내
책 펼치면 입체적 무늬가 ‘짠’ 나와요
스마트폰 갖다대면 증강현실도 돼요
그림책 새 시도로 매출도 늘었대요
권종택 아저씨표 진화는 계속됩니다
‘아트’(예술)와 ‘액티비티’(행위, 놀이)를 합친 말인 ‘아티비티’ 시리즈로는 기존 그림책의 문법에서 조금씩 일탈하는 그림책들이 나온다. 컬러링북, 숨은그림찾기 그림책, 입체 그림책 등이다. 최근에는 태블릿 피시나 스마트폰으로 그림책을 비추면 디지털 이미지가 나타나 움직이는 ‘증강현실’(AR) 그림책까지 내놨다. 전반적으로 볼 때, 그림책의 본래 속성은 살리면서도 ‘평면’이라는 기존 공간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시도가 읽힌다. 레이저커팅, 증강현실 등 첨단 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했다는 점, 대부분 외국 책을 수입한 것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태블릿 피시 등으로 그림책을 비추면 디지털 이미지가 나타나는 ‘증강현실’ 그림책. 보림출판사 제공
다른 어린이책들이 그렇듯, 그림책도 1980년대까지는 대체로 전집 일색이었다. 그러다 어린이책의 가치 평가가 점차 높아지면서 단행본 시장이 서서히 열렸다. 보림은 일찍부터 창작 그림책을 만들었고, 2000년부터는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을 열어 작가 발굴에도 앞장서는 등 국내 그림책 시장 개척에 큰 구실을 한 출판사로 꼽힌다. 올해 이탈리아에서 열린 ‘2017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아시아 지역 ‘올해 최고의 출판사 상’(BOP)을 받기도 했다. 주최 쪽은 “보림은 1976년 설립된 이래 예술적인 완성도를 갖춘 그림책들로 어린이 세대에 기쁨과 영감을 선사해왔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우리나라 그림책 시장이 커진 데에는 이른바 ‘386엄마’들의 힘이 결정적이었어요. 아이들을 좀더 자유롭게 키우고 싶은 욕망이 컸던 그분들이 그림책의 가치를 인정해줬고 실제로 그림책을 많이 샀죠. 그런데 시장이 점차 포화 상태가 되고 좀더 젊은 세대가 주된 구매층으로 떠오르면서, 새로운 돌파구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2010년께부터였다고 한다. 이전까지 줄곧 성장세였던 매출도 그때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국외의 그림책 경향을 샅샅이 살피고 다닌 권 대표가 내린 결론은 그림책의 ‘진화’였다. 그림책 분야에서도 실용서나 학습서가 대거 늘어나는 추세였지만,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인문교양서로서 그림책의 가치를 다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다만 ‘진화’하려면 새로운 기술의 도입 등 변화하는 세상에 응답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봤다. ‘컬렉션’, ‘아티비티’ 등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시도다. 또 국내에서는 아직 이런 책들을 만들 기반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외국 책들을 들여와서 소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레이저커팅 기법으로 섬세하고 정교하게 종이를 잘라낸 그림책의 한 장면. 보림출판사 제공
여태껏 해왔던 국내 창작 그림책들은 꾸준히 내고 있기 때문에, 발간 종수 자체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원래 한 해 10종 정도를 펴냈는데, 지난해에는 무려 40종이나 펴냈다. 권 대표는 “갑자기 발간 종수를 늘렸더니, 출판계에 ‘보림에 돈이 많다’는 뜬소문까지 퍼졌다. 그런데 실제로 하향세였던 매출이 지난해부터 반등하는 추세”라고 했다. 보림의 실험에 응답하는 독자들이 꽤 많다는 얘기다. ‘컬렉션’ 시리즈의 경우, 책값이 꽤 비싼데도 기본으로 3~4쇄씩 찍는다고 했다. 성인 독자들의 호응이 특히 크다고 한다.
권종택 보림출판사 대표가 지난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그림책카페 ‘노란우산'에서 다양한 종류의 그림책을 선보이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혹시 보림이 추구하는 그림책의 ‘진화’에 우려할 점은 없을까? 예컨대 증강현실 그림책이 오히려 그림책으로부터 아이들을 멀어지게 하지는 않을까? 권 대표는 “늘 고민되는 부분이지만, 세상의 변화에 응답하지 않을 순 없다. 중요한 것은 품질”이라고 말했다. 작품의 예술성이 담보된다면, 곧 예술이 과학과 기술을 채용하는 형태라면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수용 자체가 예술을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란 얘기다.
“어떤 시대라도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술적인 감성과 창의성이죠. 이것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그림책의 ‘진화’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최원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