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자 할머니의 그림책 <할머니의 꽃밭> 가운데 한 대목.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공
충남 부여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양화면 송정마을. 여느 농촌 마을처럼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일흔을 넘긴 어르신 50여명만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요즘 새로운 활력으로 꿈틀대고 있다. 평생 농사짓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주민들이 요새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바로 ‘그림책 세상’이다.
지난달 31일 송정마을에 ‘그림책 마을 찻집’이 문을 열었다. 그림책 문화예술 단체인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이 2015년부터 이곳을 찾아 주민들과 함께 ‘그림책 읽는 마을 찻집’ 조성 사업을 함께 한 결과물이다. 찻집에 비치된 그림책들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그리고 쓴 자신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제 마을을 찾는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됐다.
‘그림책 마을’이 된 충남 부여 송정마을
주민들이 직접 그리고 쓴 그림책 23권
마을 찾는 사람들에겐 ‘이야기꾼’ 되어
마을 간직한 기억이 세상으로, 다음 세대로
부여 송정마을 그림책 찻집에서 마을을 찾은 아이들에게 주민들이 자신이 만든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공
산골 어르신들에게 그림책은 평생 처음 보는 낯선 물건이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그림책 활동가들이 어르신들께 그림책을 읽어드렸다. 가족, 농사, 나무, 도깨비 등 어르신들의 삶과 연결되거나 좋아할 만한 주제를 다룬 그림책이었다. 그분들이 점차 당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을 때 ‘내 인생의 그림책’이 시작됐다. 2016년 7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 주민들이 경로회관에 모여서 그림을 그렸고, 그림책 작가들이 어르신들의 작업을 도왔다. 평생 연필이라곤 처음 쥐어 본다며 낯설어하고 힘들어한 분도 많았다. 농사일에는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어르신들이 종이와 연필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서는 고개를 썰썰 내둘렀다. 초반에는 수업에 빠지는 어르신들을 찾아 논밭으로, 집으로 헤매다녔다.
자신의 삶이 담긴 이야기를 직접 그리고 있는 부여 송정마을 주민들의 모습.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공
부여 송정마을 그림책 찻집에서 마을을 찾은 아이들에게 주민들이 자신이 만든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공
“얼라, 그림을 그리라고? 몰러, 몰러. 난 못 혀.” “그림 그리라구 허믄 회관 안 올 텨.” “아이, 생전 연필을 쥐어 봤으야지이.” “나 원 참, 다 늙게 별걸 다 허네.”
겨우 회관에 모여 앉으면, 어르신들은 그림 못 그린다고 아우성이다.
“어르신, 벼가 이렇게 생겼죠?” “얼라, 그건 보리여. 벼는 이렇게 생겼지.”
그렇게 어르신들이 잘 아는 것, 친숙한 것부터 시작해 하나씩 그림을 그렸다. “못 그린다고 숭보지 말어.” 자신 없어 하던 분들이, 조금씩 그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두 시간 반 동안 화장실도 안 가고 꼬박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연필 잡은 오른손에 힘이 없어 왼손으로 오른손을 밀면서 그리기도 하고, 뭉툭한 손끝으로 파스텔을 문질러 하늘이나 땅을 표현했다.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려가다 보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23명의 그림책이 다섯 달에 걸쳐 완성되었다. 완성된 그림책을 보고 어르신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림책이 농사만큼 힘드네그려.” “얼라, 그림책 농사 참 잘 졌네.”
자신의 삶이 담긴 이야기를 직접 그리고 있는 부여 송정마을 주민들의 모습.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공
자신의 삶이 담긴 이야기를 직접 그리고 있는 부여 송정마을 주민들의 모습.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공
어르신들의 그림책은 살아온 삶만큼 굽이굽이 정겹고 눈물겹고 흥겹다. 23권의 책이 제각기 다른 맛을 낸다. 전열귀 할머니의 자식 사랑은 우리네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여 눈물겹다. 모시 길쌈에, 농사일에 평생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고 하던 이 할머니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놓고, 때마다 보따리 서너 개를 이고 서울로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보따리마다 아이들 줄 밑반찬이며 직접 키운 작물들을 잔뜩 담아 갔는데, 아이들 볼 생각에 무거운 줄도 몰랐다. 아이들과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가져간 음식을 먹는 게 그렇게 좋았다. 집으로 올 때는 아쉬워서 울면서 왔다. 어르신의 인생이 그림책 <서울 나들이>가 되었다.
박춘자 할머니는 꽃을 워낙 좋아해서 ‘꽃 할머니’로 불린다. 어르신 집 마당에 핀 꽃들은 사연이 없는 꽃이 없다. 어르신이 꽃마다 지닌 사연을 들려준 그림책이 <할머니의 꽃밭>이다. 다른 동네 사는 친구가 준 물망초, 버스 타고 가다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받아와 키운 양귀비, 동생한테 선물한 달리아. 꽃을 보며 그 꽃을 준 이의 정을 그리며 사는 듯하다.
젊어서 도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박남순 할아버지의 그림책 <호두나무와 청설모 그리고 나>는 청설모와 실랑이하는 농부의 모습이 잘 그려져 흥겹다. 할아버지는 뒷산에 큰 호두나무를 심었는데, 10년이 넘도록 청설모 때문에 호두 한 알도 못 먹어봤다. 청설모가 호두를 못 먹게 하려고 별짓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도 약이 올라서 “급살 맞을 놈의 거. 너도 못 먹고, 나도 못 먹고” 하고는 호두나무를 베어버린 이야기다.
부여 송정마을 주민들이 만든 ‘내 인생의 그림책’ 23종.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공
그림책이 나오고, 어르신들이 달라졌다. 그림책을 손에 쥐고 더 늠름해졌다. 자식, 손주에게 자랑도 하고, 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다. 전열귀 할머니는 대학 나온 손주들도 이렇게 못 그린다 했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신다. 박춘자 할머니는 그림책을 장롱 안에 잘 두었다가 자식들이 오면 꺼내어 보여주신다. 박남순 할아버지는 ‘청설모 할아버지’로 마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지난 3월에는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내 인생의 그림책’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어르신들의 그림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들의 삶을 담은 책들은 그 삶의 깊이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스몄다. 어머니 생각난다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겠다며 그림책을 사가는 사람, 옛날 생각난다며 추억에 젖는 사람…. 작가들이나 출판 관계자들도 그림책이 담아야 할 것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림책 찻집이 문을 연 뒤 다양한 사람들이 마을을 찾는다. 어르신들은 손님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위해 밤낮으로 연습이 한창이다. 찾아온 아이들 보는 재미에 밭에서 일하다 말고 그림책을 들고 찻집으로 모인다. 도시 아이들은 놀러 갈 시골집이 없고, 마을 어르신들은 아이들 볼 기회가 많지 않으니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마을 할머니들이 직접 키운 작물로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과 차도 인기가 많다. 어르신들이 직접 만든 윷놀이 세트는 마을 주민들과 어린이들이 어우러져 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잇감이다.
송정마을 ‘내 인생의 그림책’ 23권에 담긴 이야기는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정직하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담겨 있다. 도시와 농촌, 어린이와 노인을 이어주고 나아가 마을이 세상과 소통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이 오랜 세월 간직해온 있는 그대로의 기억과 이야기로 찾은 송정마을의 희망은 평범하고 소박한 농촌 마을 어디에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림책을 통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이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그 힘으로 그 기억이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올해 송정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2년 동안 채록하여 정리한 <송정마을 이야기 모음집>(가제)과 그림책 작가가 직접 쓰고 그린 ‘송정마을 그림책’ 3종도 출간될 예정이다.
한명희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