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배(門排), 세화(歲畵), 민화(民畵) 그 개념과 관계 다시보기①

문배도

한 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민족 대명절, 설에는 세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아름답고 정다운 이 풍습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점차 보기 어려워졌지만, 세화에 대한 관심과 관련 전시는 아직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문배와 세화, 민화의 역사와 그 연관 관계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벽사적 성격의 문배 그림에 송축하는 길상성이 더해져 확산·변화되면서 점차 세화로 확대된 이후 그 기능이 다양해지고 조선 후기의 민화는 집안 전체를 치장하는 그림으로 발전했다. 민화는 문뿐만 아니라 집안이나 가구를 비롯해 출입문, 우물, 굴뚝, 아궁이, 변소 등 붙여지는 곳이 대폭 늘어났다. 그 내용도 벽사적, 길상적, 감계적, 감상적 목적이 주를 이루거나, 이러한 모든 상징에서 벗어나 그저 장식적인 것으로 그려져 붙여지기도 했다.
문배와 세화 그리고 민화는 바로 이처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문배와 세화 그리고 민화는 서로 띨 수 없는 밀접하게 관계 즉, ‘문배→세화→민화’로 연결되는 순차적인 전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 연결고리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문배門排
물활론에서 시작된 상징이 문배로 자리잡아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문을 사람의 출입뿐 아니라 복이나 재앙도 문을 통해 들어오거나 나간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선조들은 집안의 모든 길흉화복이 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인식 때문에 행복이 문으로 들어오길 바라고 악운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문 앞에서 복을 비는 다양한 의례를 행하거나 그림과 글귀를 붙였으며, 그리하여 문에 관한 여러 민속과 풍습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를테면 새해에는 복 받기를 바라고 재앙을 막기 위해 집집마다 의례를 행하는 한편, ‘수성노인 그림’, ‘까치호랑이 그림’, ‘용 그림’ 등의 세화를 어김없이 붙였다. 또한 입춘을 맞이해서는 대문이나 벽에 입춘방立春榜(또는 立春帖, 春帖子)을 붙였다. 주로 ‘입춘대길立春大吉’,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등의 글귀를 붙여 복이 문으로 들어오기를 바랐다. 또한 한편으로 문을 인생의 시작이나 끝나는 곳으로 생각하면서, 등용문이나 취직문 등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운 고비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문은 같은 학교 출신의 사람들을 일컫는 동문同門을 뜻하거나 한 집단의 지체를 뜻하는 명문名門과 문벌門閥의 뜻을 담아 사용하기도 했다. 그 밖에 손님을 즉시 영접한다는 ‘문불정빈門不停賓’, 대성황을 뜻하는 ‘문전성시門前盛市’ 등으로 비유하여 사용한 예가 남아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문은 우주의 섭리와 선악을 지배하는 신들이 출입한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것들은 들어오고 나쁜 것들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러 장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의미를 부여하여 널리 사용했다.
모든 것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거나 나간다. 문은 집안의 통로이자 집안의 상징이며 중요한 방어기능도 가지고 있다. 문배는 이와 같은 문, 즉 ‘공간’과 그 공간을 구역화하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우리 선조들은 건강과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문 앞에서 여러 가지 제의적 성격을 가진 행위를 벌이거나 문에 특별한 사물을 설치해 왔다. 물론 이와 같은 행위나 다양한 장치를 동원해 설치한 것은 복이 문으로 들어오지만 잡귀나 악운도 이곳으로 침입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추적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 민족은 모든 자연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그 영혼은 영원할 것이라 믿어 왔다. 샤머니즘은 이와 같은 자연계의 온갖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물활론物活論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다름 아닌 산, 암석, 나무 등의 자연숭배 사상을 말한다. 그렇다. 선조들은 자연에 대한 인식과정에서 비바람과 천둥, 번개 등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자연계의 각종 재난을 제어할 수가 없어 생산력이 저하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현상들을 신령한 영혼들이 주재한다고 믿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의 신령(태양, 하늘, 산, 강, 암석, 나무 등)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행동반경에 제약을 가하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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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키는 수문장과 같은 역할

이렇듯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로 길흉화복이 중첩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가 집결되어 자연의 초월적인 힘이 인간의 운수와 길흉을 좌우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믿음 아래, 신령이나 복이 문으로 들어오지만 잡귀나 악운도 이곳으로 침입한다고 여겨 다양한 장치와 방법을 동원하면서 벽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짐승의 피를 문이나 벽에 바르는 것이었다. 출입하는 문에 닭의 피를 바르거나 닭의 머리鷄頭 또는 범의 뼈를 걸어두었으며, 엄나무 가지, 빗자루, 복조리 등을 걸어두기도 했다. 엄나무 가지를 다발로 걸어두는 것은 굵은 가시가 촘촘하게 돋은 것을 보면 잡귀가 겁이 나서 달아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빗자루를 걸어 두는 것은 집에 해가 되는 것을 비로 쓸어내듯이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밖에 복숭아 가지, 버드나무 가지, 소나무 가지, 쑥 다발 등을 문 위에 걸어두기도 했는데 이 역시 잡귀와 부정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흥미롭게도 바다가 인접해 있는 어촌에서는 대문 처마에 큰 게를 매달아 두기도 했는데, 이는 게의 집게다리가 힘이 뛰어나기 때문에 들어오는 잡귀를 그 다리로 꽉 붙들어달라는 믿음에서였다. 또한 아이를 낳으면 문에 금줄(禁줄, 또는 人줄)을 걸어 놓은 것도 역시 잡귀와 부정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즉 아이를 낳은 집 대문간에 새끼로 꼰 금줄을 걸어둠으로써 출생을 알리는 동시에 타인의 출입과 잡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책이었다. 생각해 보면, 범뼈를 걸어 놓고 싶었지만 범뼈는 금값에 버금가기 때문에 이를 구하지 못하는 집에서는 엄나무 가지 다발, 빗자루, 복조리 등 다양한 보조적인 장치로 대신하거나, 범뼈만이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집에서는 범에 관련한 그림이나 글귀로 대신하여 잡귀를 쫓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벽사 그림이나 글귀는 복을 빌기에 더욱 편리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차츰 잡귀를 물리치는 부적이나 그림을 붙여서 악운을 쫓으려는 문배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문배의 뿌리가 되는 솔거의 ‘단군상’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6세기 신라 진흥왕 때의 화가 솔거가 그린 ‘단군상’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문배의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 기록에는 솔거가 꿈에서 본 단군의 얼굴을 천여 장 남짓 그려 그것을 신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중엽의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사유고東事類考』에도 솔거의 ‘단군상’에 관련한 기록이 나오며, 당시에 ‘단군상’을 사용한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흔적은 조선시대에도 역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조선의 세종 때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지어 단군상을 숭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로 볼 때 솔거에 의해 표준화된 ‘단군상’이 벽사적이고 길상적인 상징성을 담고 대대세세로 줄기차게 전승되어 왔으며 결국 조선조의 여염집에도 걸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9세기 신라의 ‘처용 그림’에서 문배의 뿌리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기록에는 “화를 내지 않고 있으니 역신이 감동하여 금후로는 맹세코 처용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처용상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꾀했다”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신라 때부터 사람들은 문간에다 처용의 얼굴을 그려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복을 맞아들이는 일을 했다. 이러한 행위는 조선 전기를 걸쳐 후기까지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때의 처용상은 계속해서 문배로 사용되거나 새해 첫날 문에 붙이는 세화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화歲畵
고려 말부터 수많은 문헌에 등장한 세화

세화세화歲畵란 설날에 액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이기 위해 문이나 문설주에 걸거나 붙였던 것을 말한다. 새해를 송축하고 재앙을 막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라서 연하장과 부적의 용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요즘에도 연말연시가 되면 평소 친분 있는 사람에게 연하장을 돌리듯이, 조선 시대 말까지는 세화를 돌리는 풍습이 있었다.
새해가 다가오면 도화서에서 수성노인, 선녀, 신장, 호랑이, 닭 그림 등을 그려 왕에게 바치면 왕이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러한 그림이 바로 세화다. 조선 초부터 매년 12월 20일경에 도화서의 화원들에게 수십 점씩 세화를 그려내도록 했고, 왕은 그것을 왕실에 충성한 집안이나 관리, 공직자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고려 말의 이색(1328~1396)이나 조선 초의 성현(1439~1504) 그리고 조선 후기의 양주익(1722~1802) 등이 왕으로부터 세화를 하사받아 감은感恩의 글을 남겼다. 물론 각 지방의 관아에서도 역시 위와 같은 그림을 관원끼리 서로 교환하거나 여염집에서도 서로 선물하여 집안에 붙였는데 이러한 풍습의 그림을 세화’ 또는 ‘설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에는 60장가량을 제작하여 궁에서도 쓰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중종(16세기) 때에 들어서면 신하에게 내리는 것만 해도 한 사람에 20장씩, 전체로는 400장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 되기도 했고 이런 막대한 양을 제작하느라 3개월이 걸렸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당시에는 종이나 붓 그리고 안료가 귀했기 때문에 때로는 세화의 진상을 중지하자는 의견과 엄격한 규제도 있었지만, 여러 관련된 기록으로 볼 때 그치지 않고 궁중의 신년 행사로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867년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세화歲畵는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
각 30장, 본서 화원畵員이 각 20장을 12월 20일에 봉진奉進하여야 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관련하여 좀 더 살펴보면, 세화라는 명칭의 직접적인 기록은 고려 말 이색의 『목은집』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색은 『목은집』에서 세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가운데 왕으로부터 받아 집에 소장하고 있는 ‘세화십장생도’에 대한 찬문을 병중에 쾌유와 장생을 바라면서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세화가 고려시대에도 틀림없이 사용되었고 그 도상이 줄곧 유전되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고 여겨지나 세시풍속과 관련하여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그 유래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용재총화』,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경도잡지』, 『육전조례』 둥 여러 문헌에서 명확히 밝혀낼 수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 태종 8년(1408), ‘국상 기간 동안이므로 3년간 세화 제작을 금하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조선 초부터 세화의 제작이 매년 관습적이고 제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이후 성종 14년(1483)의 기록, 연산군 2년(1496), 11년(1505)의 기록, 중종 5년(1510), 32년(1537)의 기록, 현종 10년(1667)의 기록, 숙종 2년(1676), 12년(1686)의 기록 등에서 세화가 관습적으로 꾸준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 이후로 『조선왕조실록』에는 더 이상 세화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으나, 정조(1777~1800 재위) 때의 양주익이 세화를 하사받았으며 채재공도 2번에 걸쳐 세화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어 이후 어느 시점인가 세화풍습이 다시 부활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서 언급했던 1867년 편찬된 『육전조례』에 세화와 문배의 진상에 대해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어, 세화 제도가 꾸준히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차츰 서민층에 스며들어

조선 서민층한편 세화 풍습이 일반 평민에게 통용된 것은 조선 중기부터로, 이때부터 새해가 되면 여염집 안팎에도 세화가 붙여져 행복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당시의 세화 수요층은 처음에는 서울에 사는 양반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점차 재력 있는 중인 계층과 부유한 평민계층으로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천민층까지 이르게 되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여러 관가官家와 척리戚里의 문짝에도 모두 이것들을 붙이고 여염집에서도 모두 이를 본뜬다’라는 내용과 함께 ‘설날 도화서에서 세화의 표본을 그려서 전시하면 시골 환장이들이 운집하여 본떠 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반 평민들도 액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이 초하루 설 풍속에서 큰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에서 지방 읍면으로, 읍면에서 고을로 첨차 확대되었으며 사찰과 정자 건물에까지 확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문건李文揵(1459~1567)이 1546년 이후 성주에 귀향가서 적은 『묵재일기黙齋日記』에는 민간에서의 세화 풍습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문건은 12년 동안 매년 제석除夕 15일 전부터 세화를 직접 그려 정초 새벽에 문에 붙였다가 보름 후에 떼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화의 소재는 종규나 신다와 울루, 신장, 처용, 선녀, 산신, 수성노인 등의 인물상과 호랑이, 용, 닭, 십장생 등의 동물상 등이 주로 그려졌다. 그러나 세화의 소재는 확대되어 다양한 도상으로 바뀌기도 했다. 세종 2년(1456)에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그리는 세화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四民의 연중행사와 생활 모습을 담은 그림을 사용했다는 기사나 중종 5년(1510)에 화회花卉, 인물人物, 누각樓閣을 세화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박미朴彌(1592∼1645)는 10폭짜리 모란병풍을 세화로 소장하고 있다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궁중에서 ‘금강산 그림’과 ‘관동팔경 그림’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으며 그림뿐 아니라 문자로 써서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세화는 고정된 도상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제재를 상당수 포함시키기도 했으며 글씨를 비롯해 일반회화로 분류된 그림들까지 일부 포함시켰다. 이는 수요층이 점점 많아지면서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또한 이들 소재들은 낱장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병풍 형태로도 그려져 사용되었던 흔적도 확인된다.

 

글 : 김용권(문학박사/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